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63)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63화
다음 (1)
베가, 리아크와 함께 데네브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별빛으로 빛나는 기다란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축구 경기장 네다섯 개를 이어붙인 크기의 넓은 광장이 보였다.
“성소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입구에 있는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장소.
그리스 신화나 북유럽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광활하고 웅장한 광장의 풍경이 오진을 압도했다.
광장이라고 해서 이런저런 물건을 파는 가게나 상인들이 들어찬 것은 아니었다.
넓은 길을 따라 당장에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생한 조각상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끝에는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넓은 원형 건축물이 보였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은 출입할 수 없는 장소이니라.]“그럼 성좌들만 따로 모이는 곳이야?”
[으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니라. 성좌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는 이곳 말고 따로 있느니라.]“흐음.”
그러면 여기는 무슨 용도로 사용되는 곳이지?
의문을 품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뒤따라오던 리아크가 입을 열었다.
“보통 성령(聖靈)들끼리 자웅을 겨루거나 성좌들끼리 힘을 겨루는 데 사용되는 장소다.”
“성좌들끼리 힘을 겨룬다고?”
오진은 놀란 눈으로 리아크를 돌아봤다.
성좌가 무슨 길거리 시정잡배도 아니고 일대일로 싸워 힘을 겨룬단 말인가?
“성좌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하긴.
성좌라고 해도 정신적인 면만 놓고 보면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북극성’이라 불리는 베가와 데네브만 하더라도 이번에 마찰이 생기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성좌라는 초월자들이 흔히 말하는 ‘맞짱’을 떠서 갈등을 해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뭐, 신격이 현저히 낮은 성좌가 아니면 성좌끼리 직접 붙는 건 역사적으로도 손에 꼽히는 일이다.”
“그럼?”
“보통은 대리전을 많이 하지. 자신의 영혼을 이어받은 성령을 내세워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호오.”
그래서 이런 경기장이 생긴 거구만.
비유하자면 중세시대의 귀족들과 비슷하다 볼 수 있었다.
귀족들끼리의 불화가 생긴 경우 기사들을 통해 대리전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럼 이번에 나랑 데네브의 사도들이랑 붙는 것도 대리전 느낌이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꽤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성좌들끼리의 갈등을 대리전이란 형태로 풀고 있었다니.
‘애초에 성좌들끼리 갈등이 이렇게 많은 줄도 몰랐으니까.’
인간의 입장에서 성좌들의 이미지는 딱 제우스나 포세이돈, 하데스와 같은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미지였다.
성소 안에 있는 으리으리한 신전에서 하하호호 태평하게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뒷사정이 있을 줄이야.
‘하긴, 그런 걸로 치면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도 신들 간의 갈등은 흔히 있었지.’
신이건 인간이건 지성체들이 모인 장소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건 필연이었다.
“어쨌든 성좌들끼리 싸웠던 경기장이라면 싸우다 박살 날 일은 없겠네.”
“정확히는 박살 나도 금방 복구될 거다.”
“성역 안에서 싸우는 것처럼?”
리아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을 때.
-웅성웅성.
경기장 안쪽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음…?]베가의 눈이 가늘어졌다.
데네브와 그의 12사도들이 모두 경기장에 미리 대기하고 있다고 해도 너무 소란이 컸다.
[이게 무슨?]눈을 찌푸리며 경기장 입구로 다가가자.
“베가 언니!! 여기야, 여기!”
새벽에 맺힌 이슬 같은 목소리가 경기장 안쪽에서 들여왔다.
“언니?”
오진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경기장 입구에서 호다닥 뛰어오는 건 복슬복슬한 핑크색 머리를 지닌 여인.
이제 막 자라난 새싹처럼 청순함과 싱그러움이 물씬 풍겨 나오는 여인이었다.
[스, 스피카?]“오랜만에 보네! 벌써 1년이나 됐나? 사도가 생기고 나서 통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잖아!”
스피카라 불린 여인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베가에게 다가왔다.
‘스피카?’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기억의 서랍을 뒤지던 오진은 어렵지 않게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처녀자리의 성좌잖아.’
그렇다는 건 지금 새내기 대학생과 같은 풋풋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는 여인이 황도 12궁에 속하는 성좌 중 하나라는 건가.
[이곳에 네가 어쩐 일이느냐?]베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스피카를 바라봤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스피카.
“어쩐 일이냐니? 이번 대리전의 사회를 맡은 게 난데?”
[…사회?]“뭐야, 얘기 못 들은 거야 언니? 이번에 언니의 사도랑 데네브의 사도랑 대리전을 지른다고 한 달 전부터 소문이 쫙 돌았는데.”
[뭐, 뭐라?]쩍 벌어지는 베가의 입술.
이번 데네브의 사도와 오진과의 결투가 있다는 걸 다른 성좌에게 떠벌린 적은 없었다.
그녀가 말한 적 없는데 다른 성좌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다는 건.
[데네브 이노옴…!]베가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뭐야, 이제 온 거야? 좀 늦었네?”
귓가에 들리는 익살스러운 소년의 목소리.
경기장의 위쪽.
성벽처럼 높게 세워진 외벽 위에 데네브가 올라서 있었다.
베가는 날카로운 눈으로 데네브를 노려보며 호통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더냐!]“무슨 일이긴? 이런 북극성의 사도끼리의 대결이 치러지는데 관중 하나 없이 진행하는 건 너무 아쉽잖아?”
데네브는 팔짱을 낀 채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 안에 담긴 의도가 뭔지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른 성좌들이 보는 앞에서 베가를 망신시키려고 하는 건가.’
직녀성의 성좌가 수년 만에 어렵사리 구한 사도.
오진이 데네브의 사도들에게 처참히 지는 모습을 다른 성좌들에게 보여줘 자신의 과시욕을 채우려는 것이다.
‘진짜 애새끼다운 생각이네.’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베가는 설마 데네브가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건지 당황한 눈치였지만.
‘딱 생각대로야.’
데네브의 목적이 베가에게 망신을 주는 거라면.
뭔가 수를 쓰긴 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데네브. 그대가 아무리 경망스럽다 한들 이 정도로 경우가 없을 줄은 몰랐거늘.]베가에게서 스산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오진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다.
[대결은 없었던 일로 하자꾸나.]“흐응. 도망치려는 거야? 우리 위~대하신 직녀성의 성좌님께서?”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다.]베가는 차갑게 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만약 이번 대결이 자신과 데네브의 문제로만 끝났다면 설사 오진이 지더라도 어느 정도 모욕만 감수하면 됐다.
하지만 만약 다른 성좌들까지 그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베가 혼자만이 아닌, 오진에게까지 그 조롱의 시선이 향하게 된다.
‘그건 용납할 수 없느니라.’
오진은 역천의 별. 이 세계를 구원할 운명을 타고난 영웅이었다.
언젠가 다가올 멸망에서 그 누구보다 앞장서 움직여야 할 그에게 ‘패배자’라는 프레임이 씌워진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큰 결점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도망쳐도 괜찮겠어? 지금 수백의 성좌들이 관중석에서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망신을 당하더라도 싸우다 깨지는 게 도망치는 것보다 훨씬 덜 할 것 같은데 말이지.”
[…네놈.]베가는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데네브의 말마따나, 여기서 오진을 데리고 돌아간다 하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패배자’란 프레임이 ‘겁쟁이’로 바뀌게 될 뿐이니까.
“괜찮아.”
[허, 허나!]“말했잖아? 내가 이길 거라고.”
[…….]베가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물론 오진의 재능과 능력을 믿고 있긴 하지만.
아직 그는 각성자가 된 지 이제 막 1년이 지난 새싹이었다.
‘아무리 나의 아이가 회귀자라고는 하나 데네브의 사도들을 하나도 아닌 셋이나 상대하는 건….’
절대적인 시간의 부족을 ‘회귀’라는 것 하나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열심히 키우던 RPG 게임의 계정이 날아가 다시 키우게 됐을 때, 아무리 그 게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고 해도 바로 고렙을 달성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흥. 그렇게 자신 있으면 도망치지 말고 빨리 들어오라고.”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데네브가 코웃음을 치며 오진을 향해 손짓했다.
[…하아.]베가는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경기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음… 아무래도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네.”
스피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복슬복슬한 핑크색 머리칼을 흔들며 오진을 향해 눈을 빛냈다.
“얘가 그 유명한 뇌랑 맞지? 내 사도들한테 얘기는 몇 번 들었는데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네!”
“권오진이라 합니다.”
“응응! 들었어! 생각보다 엄청 잘 생겼는데?”
스피카가 눈을 반짝이며 오진에게 다가왔다.
그런 그녀의 앞을 슬며시 베가가 막아섰다.
[그대는 이미 ‘운명의 사람’이라고 자랑하던 각성자가 있지 않더냐?]“응? 어머, 뭐야?”
스피카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오진과 베가 사이를 번갈아 돌아봤다.
“서, 설마 언니…?”
[네가 상상하는 관계는 아니니라.]“꺄아악! 말도 안 돼! 그 목석같던 언니가 진짜로?!”
[아니라 하지 않았느냐!]베가가 당황한 표정으로 스피카의 입을 틀어막았다.
‘운명의 사람?’
오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둘을 바라봤다.
간신히 베가의 손에서 빠져나온 스피카가 짓궂은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미안, 미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좀 놀라서 그랬어.”
[크, 크흠.]“흐응. 베가 언니한테 이런 사도가 생겼단 말이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스피카.
그녀는 오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싱긋 웃었다.
“우리 언니 잘 부탁해~! 감정 표현이 좀 서툴긴 하지만, 그게 또 귀여운 매력이 있거든.”
[시끄럽구나.]“헤헤헤.”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을 보며 오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베가한테 이 정도로 친한 성좌가 있을 줄이야.’
이제껏 다른 성좌에 대한 얘기는 거의 입에 담지 않았기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사회자라 어느 한쪽의 편을 들 순 없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을게!”
폭풍처럼 나타났던 스피카는 오도도 달려 나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베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오진을 향해 획 고개를 돌렸다.
[크흠. 여하튼 방금 스피카가 말한 ‘운명의 사람’이라는 건 신경 쓰지 말거라.]“굉장히 신경 쓰이는데?”
[신경 쓰지 말라 하지 않았더냐!]“하하. 알았어, 알았어.”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베가와 함께 대전이 치러지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콜로세움처럼 생긴 원형 건축물 중앙에는 가로세로 길이가 100미터가 넘는 넓은 경기장이 있었고, 그를 따라 쭉 관중석이 둘러져 있었다.
-웅성웅성.
미리 경기장에 도착해 관중석을 차지고 하고 있던 성좌들이 오진의 등장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쟤가 그 직녀성의 성좌구나’, ‘이번에 호된 꼴 좀 당하겠는데?’와 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오진은 관중석을 가득 채운 성좌들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다들 할 일도 없나 보구만.’
하긴.
성소(星所) 안에서 성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율법의 제약에 묶여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그들에게 있어 ‘대리전’만큼 재밌는 볼거리는 없을 것이다.
‘그게 북극성의 성좌끼리의 대리전이라면 더더욱.’
오진은 그렇게 수백의 성좌들의 관심을 받으며 경기장 안으로 입장했다.
“오늘 이렇게 다들 모여줘서 고마워!!!”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니 경기가 가장 잘 보이는 상석을 날름 차지한 데네브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데네브는 관중석을 가득 채운 성좌들을 돌아보며 양팔을 활짝 펼쳤다.
“다들 얼마 전에 드디어 베가의 사도가 생겼다는 건 알고 있겠지?”
데네브는 씨익 입가를 올리며 오진을 바라봤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베가의 사도가 어떤 인간이지,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히 볼 수 있을 거야.”
데네브가 높게 손을 들어 올렸다.
“자! 모두 즐겁게 지켜봐 줘!”
따악!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콜로세움 상공에 거대한 홀로그램 화면이 떠올랐다.
화면 안에는 딱딱하게 굳은 베가의 표정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직녀성의 별이 추락하는 모습을!!!”
데네브의 맑은 웃음소리가 경기장 안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