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6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69화
막간–여신의 속죄 (1)
“다음, 이라고?”
데네브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젠 넝마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정도로 처참한 상태인데도.
푸른 귀화가 일렁이는 두 눈만큼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체… 뭘 사도로 만든 거야, 베가.”
피부 위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
이젠 내기고 뭐고 생각나지도 않았다.
데네브만이 아니다.
관중석을 가득 채운 성좌들조차 오진이 내뿜는 기세에 압도된 채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뭐, 하고 있, 어?”
오진은 씨익 입가를 올리며 비틀비틀 데네브를 향해 걸어왔다.
데네브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읏….”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흠칫 어깨를 떠는 데네브.
북극성의 성좌가.
별에서 탄생한 초월자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존재가.
일개 인간이 내뿜는 기세에 압도된 채 뒷걸음질을 친 것이다.
평소였다면 다른 성좌들의 조롱을 한 몸에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
장난기 많은 스피카도, 관중석에 앉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성좌들 중 그 누구도 데네브에게 조롱의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홀린 듯 비틀비틀 걸어가는 오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다, 음.”
풀썩.
앞으로 걸어가던 오진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안면으로 시원하게 바닥을 들이받으려는 순간.
[나의 아이야.]순식간에 나타난 베가가 쓰러지는 오진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보고 있기 괴롭다는 듯 입술을 짓씹으며 피에 젖은 오진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알바일 있느냐?]베가가 관중석을 둘러보며 물었다.
물병자리의 성좌, 알바일.
그라면 아무리 지독한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목숨만 붙어 있다면 어렵지 않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네. 있습니다.”
관중석에서 점잖은 인상의 청년이 일어섰다.
줄이 달린 외알안경을 쓴 그는 경기장으로 내려와 쓰러진 오진의 몸을 살폈다.
“…지독한 상처네요.”
아무리 성역 안에서 죽지 않는다고 한들.
이런 상처를 입고 계속해서 싸웠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치료할 수 있겠느냐?]“물론입니다.”
보고 있기 괴로울 정도로 처참한 상처긴 하지만, 그는 물병자리의 성좌.
숨만 붙어 있다면 어떻게든 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알바일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몸 주변에 물방울이 떠오르며 오진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순식간에 치유되기 시작하는 오진의 몸.
넝마나 다름없었던 그의 몸이 비디오를 역 재생하듯 치유됐다.
“푸하! 쿨럭! 쿨럭!”
기절했던 오진이 거친 숨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거친 숨을 토해내던 오진이 괴롭다는 듯 가슴을 움켜쥐며 기침을 토했다.
“내상까지는 완전히 치료되지 않은 상태니 한동안 안정을 취해주셔야 합니다.”
[알겠느니라.]치료를 마친 알바일이 외알안경을 쓱 올리며 몸을 돌렸다.
“베가…?”
의식을 되찾은 오진이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멍청한 것!!]퍼억!
베가가 성난 표정으로 오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오진의 입에서 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체 왜… 왜 매번 그리 본녀를 속 썩이는 게냐!!]눈을 글썽이며 오진을 꾸짖었다.
“…베가.”
[이미 이긴 승부가 아니었더냐! 이렇게 다쳐가면서 싸울 이유는 없었지 않았느냐!!]오진의 머리를 품속에 끌어안은 채 서러운 목소리로 외치는 베가.
오진은 양 뺨을 압박하는 풍만한 감촉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이유야 한두 개가 아니긴 한데.’
일단 너무 열이 올랐다.
마약을 먹기라도 한 듯 각성 상태에 돌입한 터라, 본능적으로 강자와의 전투를 갈망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순간의 충동에 몸을 맡겨 경기를 이어간 것은 아니다.
‘잡기 직전이었으니까.’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뇌전 9레벨.
10레벨로 올라설 실마리를 붙잡을 수 있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에 멈추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아마 실제로 샤오린과의 싸움에서 멈춰 섰다면 10레벨에 도달하는 일은 없었겠지.
“흐음.”
오진은 관중석을 가득 채운 성좌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서로 속닥이고 있었다.
데네브의 사도와의 싸움을 계속 이어나갔던 또 다른 이유.
‘성좌들에게 내 존재는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 같네.’
너무 열을 올린 탓에 뭔가 좋은 이미지보다는 나사 빠진 또라이로 인식이 된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직녀성의 사도’라는 이름값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실력은 차고 넘치게 보여줬다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신격 말고도 필요한 게 있어서.”
[필요한 거라니?]“잠깐만.”
오진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데네브를 향해 다가갔다.
“자, 약속한 대로 신격은 주셔야죠?”
“아, 알고 있어,”
데네브가 흰색으로 빛나는 수정 같은 걸 내밀었다.
뭔가 ‘신격’이라 부를만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많은 성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가짜를 주지는 않았으리라.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흑천을 사용해 데네브의 신격을 꿀꺽하고 싶었지만.
베가의 위계(位階)가 황도 12궁급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걸 안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한 가지 더, 라니?”
“제가 이긴 건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잖아요. 당연히 그에 따른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데네브가 눈을 찌푸렸다.
“그런 말은 없었잖아!”
“이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상식 아닙니까? 원래 ‘세 번’ 이기면 이기는 승부에서 네 번 이겼으니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죠.”
“흥!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흐음. 그럼 추가적인 보상은 없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한텐 개똥도 안 줄 거야!”
“아니 개똥은 필요 없고.”
오진은 입가를 슬쩍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을 이유라도 있어?”
“많죠.”
오진은 관중석을 채운 성좌들을 쓱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번 대리전에 내보내신 사도들의 서열도 저랑 얘기했던 거랑 다르지 않습니까?”
“그, 그건.”
“질 것 같으니까 높은 서열의 사도를 내보냈고, 그래도 지니까 이 새끼 한 번 당해보라는 생각으로 더 높은 서열의 각성자를 내보내셨죠.”
“그건 네가 먼저 하자고 한….”
“그래서. 서열 5위랑 4위까지 내보내고도 졌으면서 이제 와선 입 싹 다무시겠다 이거죠?”
“…….”
데네브의 표정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오진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과연 이걸 다른 성좌님들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지금 날 협박하려는 거야?”
“협박이라뇨. 애초에 남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겠다고 성좌란 성좌들은 죄다 불러들인 건 데네브 님 아닙니까?”
“큭.”
데네브는 할 말이 없다는 침음을 흘렸다.
오진의 말마따나 여기서 입을 싹 씻고 모른 척하기에는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제기랄!’
자신이 판 함정에 스스로가 걸려든 꼴.
데네브는 분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아악! 짜증 나! 진짜 개짜증 나 저 자식!!”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데네브.
관중석에서 내려온 알렌이 발작하듯 소리치는 데네브를 진정시켰다.
어린아이처럼 짜증을 부리던 데네브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오진을 노려봤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칠성을 세 명이나 보유하고 있는 데네브답게, 그가 지니고 있는 보화들을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가 지니고 있는 무수한 보화 중 오진이 원하는 것은 하나.
“엘릭서.”
“…엘릭서?”
“예. 엘릭서를 주셨으면 합니다.”
오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엘릭서를? 다른 것도 많잖아.”
데네브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은 이를 부활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높은 치유 효과를 지닌 엘릭서.
물병자리의 고위 각성자도 치유가 힘들다는 ‘잘려나간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신체 부위’까지 재생시킬 수도 있는 귀중품이긴 했지만.
‘그런 상처는 안 보이는데?’
이번에 짓이겨진 왼팔을 스스로 잡아 뜯는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주긴 했지만, 그 상처는 이미 알바일의 힘으로 모두 치유된 상태였다.
굳이 오진이 엘릭서를 필요로 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지만.
“뭐, 알았어. 엘릭서를 주면 되는 거지?”
내심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까 걱정하던 데네브의 입장에선 반길 만한 소식이었다.
물론 엘릭서도 그 값어치를 돈으로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물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지니고 있는 보화 중에서는 급이 살짝 떨어지는 물건이었으니까.
-우우우웅!
데네브가 끼고 있는 반지가 빛을 뿌리더니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진 것처럼 허공에 파문이 일었다.
그 속에 손을 집어넣은 데네브는 청명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유리병을 꺼냈다.
“자, 여기.”
“감사합니다.”
오진은 엘릭서를 받아들며 옅게 웃었다.
‘원래는 직접 만들어 줄 생각이었지만.’
일단 엘릭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물병자리의 고위 각성자가 돼야 한다.
그걸로 끝이면 모를까.
엘릭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년에 걸친 준비와 재료 수집이 필요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이유는 없지.’
오진은 손에 쥔 병을 조심스럽게 품속에 넣었다.
[하은에게 줄 생각이느냐?]“응.”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오진.
[…….]그런 오진을 바라보는 베가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어? 나?”
[아니. 그대 얘기가 아니니라.]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방금 한 말은 본녀 스스로에게 한 말이니라.]“갑자기 왜.”
[…….]베가는 떨리는 눈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온몸이 넝마가 되어 망가지면서도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던 오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그렇게 처절하게 싸웠던 이유는.
‘모두… ‘남’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더냐.’
처음에는 베가의 신격을 되찾아주기 위해.
그다음에는 하은에게 엘릭서를 선물해주기 위해 그는 싸웠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을 듯 괴롭고 힘들어도.
굴하지 않고 일어섰다.
‘나는… 이런 아이에게 의심을 품고 있던 게냐.’
오진이 자신을 율법의 속박에서 풀어준 날 발견했던 흑천의 기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은 의심의 씨앗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는데.
[부끄럽구나.]오진을 믿지 못했던 자신이 너무나 어리석게 느껴졌다.
“뭐가 부끄럽다는 거야?”
[그 누구보다 그대를 믿고 보살펴 줘야 하는 게 본녀의 역할이거늘… 어리석게도 본분을 잊어버리고 있었구나.]“그게 무슨….”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려 했던 오진의 표정이 살며시 굳었다.
최근 베가가 보여줬던 수상쩍은 행동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씨바 무슨 실수라도 했던 건가?’
다급히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베가에게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한 기억은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그녀가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이건 속죄가 필요하겠구나.]“속죄?”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이던 베가가 이내 결심을 굳힌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몹쓸 성좌에게 따끔한 체벌을 내려주거라!]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