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7)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7화
검은 별의 성유물 (4)
입술을 뒤덮는 부드러운 감촉.
꿀꺽.
혀를 타고 파고드는 달콤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으으….”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포근한 감촉을 느끼며 오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드느냐?]“…베가 님?”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찬란한 은발에 황금빛 눈을 지닌 아름다운 여신의 모습.
30cm로 줄어든 크기가 아닌,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와 같은 성인 여성의 모습이었다.
‘뭐야 이거.’
오진은 두 눈을 부릅뜨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베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는 자신.
그녀는 마치 지쳐 쓰러진 아이를 보살피는 것처럼 상냥하게 자신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런 미친!’
오진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더 누워 있거라.]“예? 하지만….”
[어허. 본녀가 누워 있으라 하지 않느냐?]베가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마를 지그시 누르는 손길을 따라 다시 그녀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렸다.
사락.
뒷덜미에 닿은 드레스의 감촉이 간지럽다.
“…어떻게 된 겁니까?”
[힘을 너무 많이 쏟은 모양이더구나. 전투가 끝나자마자 기절했느니라.]그래서 베가가 직접 기절한 자신을 보살펴주고 있었던 건가.
‘성좌의 허벅지를 베고 처자다니.’
이런 정신 나간 경험을 해본 각성자는 자신이 처음이 아닐까.
[그대는….]베가는 오진의 이마 위에 살며시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보기와 달리 과격한 성격이로구나.]힐난하는 말투.
[조금 더 몸을 챙기거라. 아무리 회귀자라 한들 똑같은 인간 아니더냐.]“…….”
이번에 무모한 짓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녀 때문이지만, 그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여기선 얌전히 수긍하자.
“예, 명심하겠습니다.”
[흐음.]베가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지그시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고개를 가로젓던 그녀가 영 석연치 않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뭐지?’
설마 걱정하지 말라고 존나 자신 있게 말하고는 줘 터지다가 축복 빨로 간신히 이겨서 의심을 산 건가?
‘씨벌.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 상황에서 축복 말고는 점액질 거인을 상대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크흠.]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베가가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 뭐냐. 아까 전에 본녀를 존칭 없이 부르지 않았더냐?]“아.”
거인에게 한 대 후려 처맞고 정신이 없었고, 뭔가 정체 모를 열기가 몸에 퍼진 상태라 반말로 말해버렸다.
“죄송합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요.”
점액질 거인에게 줘 터진 것은 다행히 신경 쓰지 않는 모양.
[그대를 힐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제까지 존칭 없이 본녀를 부른 적이 몇 번 있지 않았더냐?]그녀의 말마따나,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척 연기를 하기 위해 반말을 사용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되느니라.]“예?”
[그대가 원한다면, 본녀를 편히 불러도 되느니라.]이건 또 무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뭔 문제라도 있더냐?]“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어차피 지난 삶에선 본녀와 그대는 그… 기, 긴밀한 사이 아니었더냐?]아뇨.
그런 사이 아니었는데요.
[아니면….]베가가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뺨을 꼬집었다.
꽤나 힘이 들어가 있다.
[그때의 본녀에겐 말을 놓아도, 지금의 본녀에게는 놓을 수 없다는 말이더냐?]어딘가 노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았어. 그럼 편하게 말할게.”
[후훗. 그렇게 하려무나.]만족스럽다는 듯 들뜬 목소리로 웃었다.
-파직!
[읏…!]그때, 갑작스러운 스파크가 튀어 오르며 베가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제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양이로구나.]축복을 준 것도 모자라 완전한 본체로 현신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괜찮아?”
[음… 이번에는 회복에 좀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구나.]“오랜 시간이라면?”
[빠르면 2주. 늦으면 한 달 정도는 걸리겠구나.]저번에 축복을 내려줬을 때보다 2배는 더 길어졌다.
그만큼 이번에 힘을 무리하게 사용했다는 의미이리라.
“…미안.”
[무얼. 그대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 않으냐.]베가는 나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상대한 괴수는 못 해도 5성은 될법한 괴수였느니라. 그것도 일반적인 괴수와는 어딘가 다른.]확실히.
일반적인 괴수와 비교하면 뭔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괴수였다.
[본녀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대의 실력이 밑받침되지 않았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니라.]“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허세를 부리다가 털린 것에 내심 의심을 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녀의 반응을 보면 의심은커녕 신뢰가 더 깊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럼 슬슬 일어… 음?”
투둑.
허벅지 위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바닥을 굴러다니는 빈 유리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상시를 대비해 가져온 중급 포션 세 병이었다.
[그대가 빨리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본녀가 직접 사용해 줬느니라.]베가가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며 어깨를 쭉 폈다.
흐흥!
거센 콧바람까지 내뱉고 있는 걸 보면 칭찬이라도 바라는 모양.
“그, 그, 랬… 구나.”
오진은 꾸욱 주먹을 움켜쥐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덜덜덜.
움켜쥔 주먹이 떨린다.
‘아니.’
세 병.
세 병이라니!!
‘한 번에 세 병을 다 쓰면 어떻게 해!!!’
부글부글.
울화통이 끓어올랐다.
당장에라도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발작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저게… 저게 다 얼마야 시발….’
하나당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포션 값을 생각하니 눈가에 절로 눈물이 맺혔다.
[후훗.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한 게로구나!]닥쳐, 제발.
“…하, 하하. 응. 고, 고마워.”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며 따지고 싶었지만, 받들어 모시는 성좌에게 그런 미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오진의 시선이 빈 포션병으로 향했다.
문뜩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 하나.
“이거 어떻게 먹인 거야?”
[……!]베가는 두 눈을 크게 뜨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고개를 홱 옆으로 돌리며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 신경 쓰지 말거라.]“엉? 뭘 신경 쓰지 마?”
[이만 보, 본녀는 가보겠느니라!!!]“아니.”
베가가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그녀의 몸이 찬란한 은빛 빛무리로 변해 목걸이에 흡수됐다.
“…뭔데.”
얼떨떨한 표정으로 목걸이를 내려다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쌉어색한 침묵.
홀로 남은 공동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끄응.”
오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돌렸다.
지금은 베가가 자신에게 어떻게 포션을 먹였는지보다 중요한 게 남아 있다.
“흐, 흐흐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석상의 미간 중앙에 박힌 검은 술잔을 바라보자 절로 입가에 군침이 맴돌았다.
“자, 어디 그럼 전리품을 까볼까?”
가볍게 점프해 석상 머리 부근에 도착한 오진은 실실 웃음을 흘리며 검은 술잔을 손에 쥐었다.
빠각.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은 술잔이 미간에서 뽑혀 나왔다.
‘어떤 능력이 있으려나?’
오진은 눈을 빛내며 검은 술잔을 만졌다.
술잔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검은 빛에는 뭔가 끈적하고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꺼림칙한 기운에 불쾌함이 앞섰지만.
‘일단 가지고 나가자.’
그렇다고 해서 힘들 게 얻은 성유물을 버릴 순 없는 노릇.
지금 당장은 성유물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지만, 전문적인 감정사에게 의뢰를 맡기면 어렵지 않게 그 능력과 등급을 알 수 있으리라.
“기왕 고생해서 얻은 거 3성 이상급 성유물이면 좋겠네.”
3성만 되도 1~2억.
4성이면 5억 이상도 노려볼 수 있다.
‘워 씨.’
상상만 해도 짜릿하네.
-쿠륵, 쿠르륵.
“…어?”
그때, 무언가 기이한 감각이 전신에 퍼졌다.
━아까 전에 느꼈던 정체 모를 고양감.
도수 높은 술을 마신 듯 뜨거운 감각이 몸을 달궜다.
‘뭐, 야.’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
오진은 본능에 따라 검은 술잔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흑천이 성유물 안에 깃든 검은 별의 힘을 흡수합니다!]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검은 별의 힘…?”
그건 또 뭐란 말인가.
-쿠르르륵!!
의문이 이어지기 전에, 손끝에서 흘러나온 검은 먹구름이 성유물을 뒤덮었다.
“크윽!”
검은 먹구름을 통해 흘러드는 마력.
일반적인 마력과는 어딘가 다른, 끈적하고 불쾌한 느낌의 마력이 그의 몸에 깃들었다.
[검은 별의 힘을 성공적으로 흡수했습니다!] [흑천의 특성이 진화합니다!] [‘흑막’ 특성이 이제 흑천의 기운뿐만이 아니라 모든 기척을 감춥니다. 이 효과는 사용자의 의지대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흑천의 세 번째 개화 조건 중 일부가 달성됐습니다.]쿠르륵.
성유물을 뒤덮고 있던 검은 먹구름이 잘 먹었다는 듯 꾸물거리며 그의 몸속으로 다시 흡수됐다.
“허.”
오진은 허탈한 표정으로 손에 쥔 검은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이건?’
흑천에 성유물에 담긴 힘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이거 진짜 성유물 맞아?’
이제껏 성유물에 검은 별의 힘이라는 게 깃들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혹시 아까 베가가 말한 꺼림칙한 기운이란 게 이건가?”
아직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했지만, 이 성유물이 일반적인 성유물과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잠깐만.”
이 성유물이 일반적인 성유물과 다르건 아니건.
어쨌든 흑천이 이 안에 담긴 힘을 날름 다 처먹어버리지 않았던가?
“서, 설마 이거 깡통 된 거야?”
다급하게 손에 쥔 검은 술잔을 이리저리 뒤집어봤지만, 처음 술잔을 만졌을 때 느꼈던 불길하고 끈적한 기운은 씻은 듯 사라진 상태였다.
“아니.”
이게 뭔데.
“내, 내 성유물. 내 성유물 어디 갔어?!”
끓어오르는 분노.
“아, 안 돼. 안 돼!!”
무슨 능력이 있는지, 몇 등급인지조차 미처 알아보지 못한 성유물.
긁기도 못한 복권이 갈기갈기 찢겨진 허망함에 그는 몸부림쳤다.
“이런 씨이이이이바아아아알!!!”
공동 전체에 쩌렁쩌렁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오진은 아가리에 주먹을 밀어 넣은 채 엉엉 눈물을 흘렸다.
“끄흐으윽… 끄윽. 씨발… 씨발… 어떻게 얻은 성유물인데… 이런 개….”
냉정하게 생각하면.
절대 손해를 봤다고는 할 수 없다.
뭔가 꺼림칙하긴 하지만 성유물 안에 깃들었던 마력도 흡수했고, 일부지만 흑천의 세 번째 개화 조건도 달성했으니까.
무엇보다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던 ‘흑막’ 특성까지 진화하지 않았던가.
사실 어지간한 성유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보상을 얻게 된 것이다.
‘알아.’
나도 안다고.
‘근데도 존나 억울한 걸 어떻게 하라고.’
이건 이성보단 감성의 영역이다.
부모님에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에 삼단 합체 로봇이 아닌 두둑한 현금이 들어 있는 걸 본 아이와 같은 기분이려나.
현금이 로봇을 사고도 남을 정도로 많다 해도 뭔지 모를 실망감이 들 수밖에 없다.
“제기랄.”
오진은 허탈한 표정으로 빈 깡통이 된 검은 술잔을 이리저리 만졌다.
-저벅, 저벅.
“응?”
넓은 공동에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
오진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라? 선객이 와계셨네요?”
빽빽하게 솟은 종유석 사이로 걸어 나온 것은 검은 로브로 전신을 가린 사람들이었다.
‘뭐야 저 새끼들은?’
숫자는 다섯 명.
후드를 푹 눌러 쓴 그들에게선 뭔가 끈적하고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검은 술잔에서 느껴지던 것과 같은 기운이.
“음… 설마 저희보다 빨리 게이트에 들어오신 분이 계실 줄은 몰랐네요.”
마음이 편안해지는 온화한 목소리.
다섯 명 중 가운데 있던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후드를 젖혔다.
옅은 갈색 머리칼에 실눈을 지닌 청년이 오진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검은 술잔을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혹시 이걸 찾고 계셨던 겁니까?”
오진은 손에 든 검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하하. 예. 근데 이거 늦어버리고 말았군요.”
갈색 머리칼의 청년은 순박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저희한테 꼭 필요한 물건인데… 이걸 어찌한담.”
싱글벙글.
청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실눈을 떴다.
가는 실눈 사이로 비친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아, 그래요?”
오진은 손에 쥔 술잔을 빙글 돌렸다.
성큼성큼 그들을 향해 다가가 검은 술잔을 쓱 내밀었다.
“그럼 이거 저한테 사실래요?”
싱글벙글.
청년과 같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