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8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82화
막간-내일보다 나은 어제를 위해 (1)
치지지지직.
귓가에 울려 퍼지는 노이즈.
시야가 뒤틀리며 이신혁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흘러들어 왔다.
“하, 하은 씨 동생이 실종됐다고?”
“…응.”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신혁.
이우혁의 놀란 두 눈이 그를 향했다.
“그럼 하은 씨는….”
“완전 패닉 상태지.”
이신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우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제부터 연락도 안 받고 계속 동생을 찾으려 돌아다니고 있나 봐.”
“…허.”
충격받은 표정으로 헛웃음을 삼킨 이우혁이 이마를 짚었다.
“근데 그 동생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고 하지 않았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자마자 바로 나간 모양이야.”
이신혁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동생이 드디어 침대에서 일어났다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그녀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자신에게 향하지 않는, 향할 리 없는 환한 미소.
들뜬 그녀의 미소를 볼 때마다 마음속 한구석이 칼로 저미듯 아팠다.
“왜 나간 건데?”
“그건….”
이신혁은 말끝을 흐렸다.
차마 말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군 채 굳게 입술을 닫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이우혁이 눈을 찌푸렸다.
“아니 근데 이 상황에도 하은 씨는 왜 우리한테 왜 아무 연락도 안 하는 거야? 이상하잖아?”
동생이 실종됐다면 주변에 함께 찾아달라고 도움을 구하는 게 상식 아닌가.
하지만 하은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동생에 대해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름도, 생김새도, 심지어 나이조차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체 하은 씨는 무슨 생각으로….”
“이건 내 추측이긴 한데.”
고개를 떨군 채 고민에 잠겨 있던 이신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마… 그 동생이란 사람, 위성교에 들어간 거 같아.”
“…뭐?”
부릅떠진 이우혁의 두 눈.
‘위성교’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서 스산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럼, 위성교에 들어갔다는 걸 숨기기 위해 하은 씨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거라고?”
이신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녀의 동생이 위성교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렇게 필사적으로 동생의 정체를 숨기려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지금 위성교는 말 그대로 세계의 ‘공적’이었으니까.
“반신불수가 된 사람이 갑자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겠어?”
“각성… 밖에 없겠지.”
이신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성교에는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에게 성흔을 부여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그 뒤에 끔찍한 대가가 뒤따르겠지만.
반신불수가 된 채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깟 대가가 대수일까?
“설마 하은 씨의 동생이… 위성교였다니.”
이우혁은 깊은 한숨과 함께 입술을 짓씹었다.
하은은 지금 이우혁, 이신혁 형제와 더불어 ‘수호성’의 핵심 멤버였다.
그녀의 동생이 위성교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 여파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하은 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거였구나.”
“아직 추측일 뿐이야. 좀 더 확인해 보고 다시 얘기해 줄게.”
이신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돌려 나가려는 그를 이우혁이 불러세웠다.
“어디 가게?”
“누날 도와주러 가야지.”
“하지만….”
“알고 있어.”
이신혁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으리란 걸.
하지만.
“갈게. 나중에 급한 일 생기면 연락 줘.”
이우혁은 씁쓸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달칵.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이신혁은 발할라 길드 하우스 옥상에 잠시 올라갔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하은을 도와 그녀의 동생을 찾으러 달려가고 싶었지만, 복잡하게 뒤엉킨 상념을 먼저 풀어내는 게 우선이었다.
“하아.”
평소 머리를 환기하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길드 하우스 옥상을 자주 즐겨 찾았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옥상에 올라와도 뒤엉킨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았다.
“고위 각성자가 되면 뭐 하냐… 정작 누나는 나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데.”
하은을 지켜주기 위해 피나는 수련을 통해 9성에 올라섰지만.
고백에서 차인 이후 그녀는 자신에게 거리를 두며 제대로 말조차 섞지 않고 있었다.
가슴을 저미는 고통.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짙은 한숨이 아지랑이처럼 퍼졌다.
“음?”
그렇게 옥상 위에서 궁상을 떨고 있을 때.
옥상 구석에 반듯이 놓인 편지 봉투 하나가 보였다.
“뭐지?”
실수로 누가 흘렸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반듯이 놓여 있었다.
아니 애초에 발할라 길드원 중에서 옥상을 이용하는 건 자신 말고는 없었으니 누가 흘렸을 리는 없었다.
“이신혁 님에게… 어? 나?”
편지 봉투 위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이신혁이 크게 눈을 떴다.
“뭐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새하얀 편지지 위에 적힌 건 한 줄의 문장.
-우리 누날 잘 부탁드립니다.
그 문장이 가리키는 존재가 누군지, 누가 이걸 썼는지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
편지를 받아든 이신혁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예, 제가 누날 꼭 지키겠습니다.”
얼굴도, 나이도, 이름조차 모르는 그녀의 ‘동생’을 향해.
그는 굳은 결의가 담긴 목소리로 각오를 다졌다.
각오를 다지는 이신혁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치지지지지직.
익숙한 노이즈와 함께 시야가 뒤틀렸다.
발할라 길드 하우스의 옥상이 아닌, 희뿌연 연기와 탄내가 진동하는 부둣가의 모습이 보였다.
“…….”
오진은 반쯤 녹아내린 리빙 아머의 시체를 멍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뭐야.’
짓씹은 입술.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방금 뭐였냐고 뭐냐고 씨발.’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반신불수가 된 채 하은의 보살핌을 받고 있던 1회차의 자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고민하고, 고뇌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지킬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그녀를 구할 수 있을지.
‘그 결론이라는 게.’
그녀의 곁에서 사라지는 거였다고?
자신을 대신해, 이신혁을 하은의 곁에 두는 거였다고?
“지랄, 하지 마.”
파지지직!
움켜쥔 주먹 위로 푸른 뇌전이 흘렀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에서 푸른 귀화가 일렁였다.
“지랄하지 말라고.”
과거의 자신을 향해.
아니, 미래의 자신을 향해 외친다.
그녀의 곁에 가장 필요한 게 누군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
기껏 생각한다는 게 다 내팽개치고 도망치는 거였다고?
‘머저리 새끼.’
분노가 머리를 뜨겁게 달궜다.
과연 같은 자신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욕지기가 치솟았다.
미래의 자신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상황에 놓였는지는 알고 있다.
반신불수가 된 채, 지켜주고자 했던 여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하루하루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겠지.
절망했을 것이다.
좌절했을 것이다.
찬란히 빛나야 할 그녀의 삶에, 먹물 자국이 된 자신의 모습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포기하면… 안 되잖아 이 멍청한 새끼야.”
속이 뒤틀리는 듯한 감각.
다리에 힘이 풀리며 휘청휘청 몸이 흔들렸다.
“오, 오지나? 왜 그래?”
하은이 다가와 오진의 팔을 잡았다.
“…….”
오진은 팔에 닿은 온기를 느끼며 하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막을 수 없는 충동이 끓어올랐다.
“오지… 흐읍?!”
하은의 허리를 거칠게 잡아끌며 입을 맞췄다.
놀란 토끼 눈을 뜨며 뒷걸음질 치려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흐읍… 읍.”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혀를 넣었다.
바짝 굳어있던 하은이 입술 사이로 파고들어 온 혀를 조심스럽게 빨았다.
오진은 끌어안은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팔에 힘을 주며 키스를 이어갔다.
“푸하! 가, 갑자기 뭐, 뭐, 뭐야?”
간신히 오진의 팔에서 풀려난 하은이 벌겋게 뺨을 붉히며 물었다.
오줌이 마렵기라도 한 듯 허벅지를 비비며, 부끄럽다는 듯 두 손을 꼬물꼬물 움직였다.
“…….”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던 불쾌한 기억을 씻어내듯, 더없이 사랑스러운 그녀의 몸짓을 눈에 담았다.
오진의 눈에 일렁이는 푸른 귀화가 사납게 타올랐다.
“난, 너와는 다를 거다.”
미래의 자신을 향해.
그녀를 지키지 못한 채, 모든 것 내팽개치고 도망쳐버린 자신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뭐가 다를… 흐읍!”
다시 한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오, 오지니 너 진짜…!”
하은이 사과처럼 뺨을 붉힌 채 오진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마치 자신을 갈망하듯 탐욕스럽게 입을 맞춰주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때와 장소 정도는 가려야 하지 않은가.
“그, 그런 건 지, 지, 집에서.”
하은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푹 고갤 숙였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오진과 함께 집으로 가 뒷일(?)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후우. 일단 천혜 길드에 보고부터 하자.”
리빙 아머와 두꺼비 파벌에 대해 보고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있었다.
심지어 작전 중 사망자도 발생했으니 보고 절차가 복잡해질 것은 당연지사.
한시라도 빨리 천혜 길드로 복귀하는 게 상식이지만.
“아니. 그건 이사벨라가 알아서 해줄 거야.”
오진은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평소 치밀하고 계산적이었던 그의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진 행동.
하은은 놀란 표정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이런 건 집에서 하라고 했지?”
오진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집으로 가자.”
“꺄악! 자, 잠깐 오지나!”
거칠게 잡아끄는 오진의 팔 힘에 하은이 비명을 질렀다.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던 그녀는 이내 쪼르르 오진의 뒤를 따라 걸었다.
오진은 그녀의 팔을 잡아끌며 하은이 타고 온 바이크 쪽으로 걸어갔다.
‘너는 지키지 못했지만, 나는 지켰어.’
미래의 자신을 향해.
들릴 리 없는 외침을 머릿속에서 쏟아냈다.
‘너는 구하지 못했지만, 나는 구했어.’
품속에 있는 엘릭서 병을 살며시 매만졌다.
하은의 눈과 다리를 되돌려준 건, 이신혁이 아닌 자신이다.
‘너는 포기했지만.’
푸른 눈동자가 어둠이 내려앉은 검은 하늘을 향했다.
“나는 포기 안 해 씹새야.”
미래보다 나은 과거를 위해.
내일보다 나은 어제를 위해.
오진은 하은의 팔을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