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8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84화
막간-내일보다 나은 어제를 위해 (3)
늦바람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달콤한 쾌락을 맛보게 된 두 사람은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처럼 눈만 맞으면 서로를 탐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서로의 눈이 마주쳤을 때.
여전히 어설픈 솜씨로 식사를 준비하는 하은의 등을 오진이 장난스럽게 끌어안았을 때.
오진이 먼저 씻으러 들어간 사이 수영복을 입은 하은이 몰래 욕실에 침입했을 때.
이제까지 서로 몸을 섞지 않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하루 종일 사랑을 나누며 진득한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따로 할 일도 없고.’
원래라면 흑천이 일곱 번째 개화를 하면서 새롭게 얻은 능력이나 힘들을 체크하고 몸에 익히는 데 집중했겠지만.
지금은 안 그래도 심했던 내상이 리빙 아머와의 전투에서 더 커지면서 치료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번 사건 보고도 이우혁이랑 이사벨라가 알아서 해줬으니까.’
갑자기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운 자신에 대해 이사벨라가 불만 가득한 잔소리를 퍼붓긴 했지만.
내상이 너무 심해서 빨리 치료받으러 갔다는 변명으로 어떻게 잘 넘길 수 있었다.
‘지금은 좀 쉬어야지.’
그토록 바라왔던 하은과의 사랑이 결실을 보지 않았나.
내상도 치료할 겸 한동안은 그녀와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오지나, 영화나 같이 볼래?”
“영화?”
워낙 가난하고 팍팍하게 살았던 터라 영화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이번에 하은이 75인치 티비를 새로 주문하면서 시간만 있다면 언제든 볼 수 있게 되었다.
“뭐 보게?”
“요즘 오징어 게임인가? 그거 재밌다고 하더라고.”
“그거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 아냐?”
세계적으로 히트를 한 드라마라 뉴스에서 들어본 적 있었다.
“아, 그런가? 뭐, 어쨌든 같이 보자!”
하은이 눈을 빛내며 오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오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히! 그럼 치킨부터 주문하자 치킨!”
하은이 들뜬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주문한 치킨이 도착한 후,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
“아~”
허벅지가 닿을 정도로 찰싹 달라붙은 하은이 어미에게 모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늘씬하고 쫙 빠진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돌핀 팬츠에, 헐렁한 흰색 티셔츠 하나만을 걸친 아슬아슬한 복장의 하은이 눈을 감은 채 입을 벌리니 온갖 음험한 상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오진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프라이드치킨 다리를 하나 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헤헤. 맛있당.”
하은이 오물오물 입술을 움직여 치킨을 받아먹었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먹는 그녀의 모습은 원고지 수백 장을 써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더 먹어.”
오진은 아예 치킨 상자를 옆에 끼고 그녀에게 치킨을 한 조각씩 먹여줬다.
닭 다리 두 개에 날개 하나까지 그녀에게 먹였을 때.
오진의 팔을 끌어안은 채 넙죽넙죽 치킨을 받아먹고 있던 하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지니 너도 먹어야지.”
“이 아빠는 우리 딸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단다.”
“뭐래.”
하은이 피식 웃더니 상자 안에 든 치킨 조각을 뒤적였다.
“흐응. 다리가 없네.”
그야 누나가 다 먹었으니까.
아니, 정확힌 내가 먹여준 거지만.
“다리가 없으니까 대신 이거라두 먹을래?”
하은이 길고 늘씬한 맨다리를 쭉 뻗더니 오진의 허벅지 위에 턱 올렸다.
매끈매끈한 다리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닭 다리치고는 좀 큰데.”
오진은 허벅지 위에 올라온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두들겼다.
찰싹찰싹.
언제 다리가 잘렸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하게 붙어 있는 오른발을 볼 때마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서 안 먹게?”
“이걸 뭘 어떻게 먹으라고.”
“히히. 왜 어젯밤처럼 츄릅츄릅 혀로…….”
“어허.”
이 누나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눈을 찌푸리며 하은의 다리를 살짝 간질였다.
간지럼에 약한 하은이 발버둥을 치며 다리를 빼냈다.
“닭 다리 말고 다른 거 먹으면 되니까 괜찮아.”
오진이 그렇게 말하며 퍽퍽한 가슴살을 손에 쥐려 했을 때.
“아, 잠깐 기둘려 봐!”
하은이 벌떡 일어나더니 현관 쪽으로 쪼르르 걸어갔다.
문을 열고 밖에 있는 봉투를 대롱대롱 흔들며 들어왔다.
“사실 한 마리 더 시켰지롱~”
하은이 으스대듯 콧대를 세우며 치킨 한 상자를 더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번엔 달콤한 양념이 잔뜩 발라진 양념치킨이었다.
“자, 아~”
하은이 양념치킨 다리를 한 조각 집더니 오진에게 쓱 내밀었다.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가 내민 닭 다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소스와 바삭한 튀김옷, 야들야들한 살코기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며 입안을 유린했다.
‘개맛있네 진짜.’
칼로리 바 하나로 몇 년을 어떻게 버텼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맛있지?”
하은이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며 방긋 웃었다.
오진은 티슈를 꺼내 침 묻은 그녀의 손가락을 닦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이걸 못 먹고 산 게 억울해질 정도네.”
몇 년까지 갈 것도 있나.
고작 1년 하고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치킨은 감히 꿈도 꿔볼 수 없는 음식이었다.
하은이 배시시 미소 지으며 오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앞으로 잔뜩 먹으면 되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간지러운 숨결과 함께 귓가에 속삭였다.
“나 처럼.”
“…….”
귓가에 흘러드는 달콤한 목소리에 오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느끼는 강렬한 충동이 불처럼 끓어올랐다.
‘아니, 이 누나가 진짜.’
평소에도 가끔 그녀와 이런 장난을 치기는 했지만.
어째 몸을 섞고 난 이후 그녀의 장난 수위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간 느낌이었다.
오진은 치킨이고 나발이고 뜨겁게 치솟은 충동에 이끌려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히히. 슬슬 드라마 켜자.”
하은이 그를 놀리듯 날렵한 동작으로 리모컨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티비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드라마.
오진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윽…… 뭔가 내용이 PTSD 오는데?”
오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드라마를 보던 하은이 눈을 찌푸렸다.
드라마의 내용은 빚더미에 짓눌린 참가자들이 요상한 살인 게임에 참가해 처절하게 발버둥 친다는 내용이었다.
드라마에서 생생하게 표현된 ‘가난’의 고통과 절망이 과거의 기억을 들춰냈다.
“재밌긴 하네.”
“그르게.”
처음엔 괴수가 길거리에 돌아다니고 각성자가 판을 치는 세계에 저런 밋밋한 내용이 뭐가 재밌을까 생각했었지만.
과연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드라마답게 뛰어난 몰입도와 재미를 지니고 있었다.
“저기 세계관은 괴수 같은 거 없다는 설정이지?”
“그렇겠지.”
“이렇게 보니까 진짜 픽션보다 더 픽션 같은 세상이 된 게 체감이 되네.”
하은은 오진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리며 소파에 늘어졌다.
부드러운 뺨의 감촉을 느끼며 그녀의 머리칼을 가볍게 손으로 쓰다듬었다.
“하아…… 좋다. 이런 거.”
오진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느긋하게 맥주 한 캔을 기울이며 드라마를 보는 시간.
진짜 이런 행복을 누려도 되는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행복했다.
“오지나.”
“응?”
“사랑해.”
“…….”
뜬금없다 느껴질 정도로 갑작스럽게 나온 그 말에.
하은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오진의 손이 흠칫 떨렸다.
오진의 허벅지에 밍기적밍기적 뺨을 비비던 하은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뭔가 딱딱한 게 뒤통수에 닿는데?”
“시끄러.”
하은이 낄낄 웃음을 터뜨리며 빙글 몸을 돌려 누웠다.
허벅지 위에 드러누운 채 오진을 올려다보는 하은.
“드라마 안 봐?”
“드라마보다 우리 오지니 보는 게 더 재밌거든.”
“내 얼굴이 보는 맛이 좀 있긴 하지.”
안 그래도 샤워를 마치고 거울을 볼 때마다 ‘이 정도면 잘생긴 편 아닌가?’라고 생각하곤 했다.
“아니, 생긴 게 존나 웃기게 생겼다고.”
“X발?”
“농담이야 새끼야.”
하은이 낄낄 웃음을 터뜨리더니 팔을 뻗어 오진의 목에 둘렀다.
살며시 힘을 주며 오진의 머리를 끌어내린 후, 가볍게 입술을 겹쳤다.
“…….”
“…….”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정적.
기분 나쁘고, 어색한 정적은 아니었다.
오진은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하은의 이마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직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었다.
아니, 해결된 것보다 해결되지 않은 게 더 많았다.
그녀의 눈과 다리를 고쳐줬다 하더라도.
평안한 삶을 위협하는 무리는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흑천, 베가, 회귀자, 흑성회, 뱀.
일일이 헤아릴 수조차 없는 무수한 문제들이 머릿속을 가득 맴돌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 시간을 맘껏 즐기고 싶었다.
과거의, 아니, 미래의 또 다른 자신이 그토록 누리고 싶었을 소중한 시간을.
사라지지 않기를.
지워지지 않기를.
어제처럼, 오늘처럼.
내일 눈을 떴을 때도, 그녀가 옆에 잠들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갈래?”
하은이 침실 쪽을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텅 빈 거실에는 먹다 남은 치킨과,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빛만이 밤하늘에 뜬 별처럼 빛났다.
* * *
끈적한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
우그러진 컨테이너가 나뒹굴고 있는 부둣가를 한 여인이 거닐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백금발.
소녀처럼 가녀린 몸을 칠흑의 드레스로 감싸고 있는 여인은 느긋한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락, 사락.
바닥까지 닿는 기다란 드레스 자락이 쓸리며 우거진 수풀을 뱀이 가로지르는 듯한 소리가 흘렀다.
“여긴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부둣가 근처에 서서 경계를 서고 있던 천혜 길드의 각성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앞을 막아선 천혜 길드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지금 뭐 하시는…….”
풀썩.
눈을 찌푸리며 다가오는 여인을 막으려고 했던 천혜 길드원의 눈이 몽롱하게 풀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여인은 쓰러진 천혜 길드원들을 지나쳐 부둣가 안으로 들어갔다.
“흐응. 망가져 버렸네?”
여인은 관능적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반쯤 녹아내린 검은 갑주를 내려다봤다.
“음?”
드레스 사이로 빠져나온 검은 구두로 녹아내린 갑주를 뒤적이던 여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머, 어머, 어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검은 갑주를 뒤적이는 여인.
“하. 하하.”
이내 여인의 입가에서 흘러나온 건 광기에 가득 찬 웃음소리였다.
“꺄하하하하하하하핫!!!”
어둠이 내려앉은 부둣가에 울려 퍼지는 광적인 웃음소리.
여인은 환희에 한 미소를 지으며, 쾌락에 몸부림치듯 몸을 떨었다.
“찾았어, 찾았어, 찾았어. 찾았어. 찾았어. 찾았어. 찾았어!”
가슴께까지 길게 내려온 붉은 혓바닥이 춤을 추듯 흔들렸다.
“아아━ 여기 계셨군요. 나의 신이시여.”
그녀는 기다란 혀로 입술을 핥으며, 검은 하늘을 끌어안듯 양팔을 넓게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