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85)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85화
로마의 휴일 (1)
“후으음.”
귓가에 흘러드는 달콤한 숨소리.
창문 틈으로 새어 드는 햇살에 눈을 뜬 오진은 자신의 팔을 꼬옥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는 하은을 돌아봤다.
긴 속눈썹과 오뚝한 콧날, 손을 가져다 대면 미끄러져 버릴 듯 잡티 하나 없는 피부.
오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하은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우응…?”
하은이 간지럽다는 듯 머리를 흔들더니 이내 천천히 눈을 떴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잘 잤어?”
“누구 씨 때문에 잘 못 잤는데.”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오진의 옆구리를 가볍게 꼬집는 하은.
달콤하다 못해 이가 썩어버릴 듯한 달달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
“…….”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가까워진 순간.
[본녀이니라!]뾰로롱!
요상한 효과음과 함께 허공에 나타난 베가가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리며 양팔을 활짝 펼쳤다.
“꺄아아아악!”
하은이 비명을 지르며 오진을 걷어찼다.
오진의 몸이 거칠게 튕겨 나가며 방 천장에 부딪히더니, 화려한 공중회전을 펼치며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뭘 하고 있던 게냐?]“…아무것도.”
오진은 욱신거리는 배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어째 베가가 올 때마다 이런 해프닝이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흐음.]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찌푸린 베가가 오진의 머리 위로 날아와 착 앉았다.
[수호성 일은 잘 해결되었느냐?]“뭐… 나름?”
두 명이 죽고 한 명이 중환자가 되긴 했지만.
일단 사건의 주범이었던 리빙 아머를 해치우긴 했으니 해결됐다 할 수 있으리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녀에게도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물론. 아, 그보다 데네브의 신격을 흡수하는 건 어떻게 됐어?”
[후훗. 본녀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철없는 꼬맹이의 신격을 본녀의 것으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니라.]베가가 작은 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진은 피식 웃으며 그녀가 없던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설명했다.
수호성과 리빙 아머, 뱀과 두꺼비에 대한 이야기를 쭉 늘어놓자 베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같은 흑성회를 숙청하다니… 뱀자리의 아해는 실로 끔찍한 존재로구나.]“뭐, 괜히 파벌이 있는 게 아니니까.”
“고럼! 내가 딱! 기막힌 타이밍에 나타나서 마무리했지!”
걱정스럽게 묻는 베가의 질문에 하은이 우쭐대듯 콧대를 세우며 답했다.
[흥. 그대와 같은 자를 인간들이 뭐라 부르는지 본녀도 알고 있느니라.]“엉? 뭐라 부르는데?”
[어디 보자… 그래! 막타충! 막타충이라 부르느니라!]“이 쪼만한 게 진짜!”
막타충이라는 모욕에 하은이 인상을 팍 구기며 오진의 머리 위에 앉은 베가에게 손을 뻗었다.
베가는 하은의 손을 피해 날아올랐다.
[여전히 그대는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엘타닌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슬퍼할지 생각해 보았느냐?]“알 게 뭐람. 만난 적도 없는데.”
참고로 엘타닌은 용자리 성좌의 이름이다.
“뭐야, 성좌를 한 번도 만난 적 없어?”
옆에서 가만히 두 여인의 투덕거림을 지켜보던 오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용자리 성좌에 대해 말을 하는 걸 들은 기억이 없긴 하지만 설마 한 번도 본 적 없을 줄이야.
“뭐… 사실 한 번 만나러 가본 적은 있어. 근데….”
하은이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고 있더라고.”
“자고 있다고?”
“응. 쿨쿨. 아주 기냥 세상모르고 자고 있더라.”
“그럼 다음에 찾아가면.”
“계속 잠만 자더라도. 몇 년 동안 쭉.”
하은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뭐… 엘타닌은 별자리에 맞게 용의 습성을 따르니 말이다. 수면기에 접어들면 쉽게 깨어나지 않느니라.]“그럼 성흔은 어떻게 준 거야?”
[아마 처음에 자신의 적합자를 찾아 성흔을 부여한 후 그대로 잠든 것 같더구나.]용자리 성흔을 지닌 각성자가 적은 이유가 그거였나.
[대신 그만큼 짙은 성흔을 내려줬을 것이다. 하은만 보더라도 황도 12궁에 전혀 꿀리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지 않더냐?]“아. 그게 그래서 그랬던 거구만.”
어쩐지 용자리 성흔의 인지도에 비해 하은이 과할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이번에만 해도 같은 9성이었던 최유미는 쪽도 못 쓰던 리빙 아머를 하은이 쓰러뜨렸으니까.
[그나저나 그렇게 심한 내상을 입은 채로 또 무리를 하다니… 본녀의 속을 얼마나 썩여야 만족하는 게냐?]베가가 엄한 표정을 지으며 오진의 이마를 찰싹 때렸다.
“안 그래도 이젠 내상 다 나을 때까진 푹 쉬려고.”
[당연하니라.]육체의 상처가 아닌, 성흔의 마력이 흐르는 마력 회로에 직접적인 상처가 생기는 내상은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뼛조각이 부러진 채 억지로 몸을 움직이다 보면 나중에 뼈가 붙은 이후에도 영구적인 장애가 생기듯, 내상을 입은 상황에서 계속해서 무리하게 마력을 사용하면 마력 회로가 망가지게 된다.
‘이것도 포션 같은 걸로 금방 치료되면 좋겠지만.’
엘릭서가 아닌 이상에야 아무리 비싼 포션을 사용하더라도 내상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오진의 육체를 거의 반 불사신으로 만드는 ‘수력친화’ 또한 마찬가지.
내상의 회복에는 시간 이상으로 좋은 건 찾기 힘들었다.
“아무튼. 오진이도 한동안은 쉴 거고 베가 너도 쉴 테니까 우리 같이 어디 놀러 갈래? 그 똥강아지도 같이 데리고 말이야.”
[똥강아지?]“리아크 고놈 말이야.”
[본녀의 성령에게 똥강아지라니….]베가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성좌들 사이에서 ‘천랑(天狼)’이라 불리며 그 힘을 인정 받고 있는 리아크에게 똥강아지라니.
[정말… 그대답구나.]베가가 하은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진과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좀 불편하긴 했지만.
어째서인지 미워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놀러 갈 거야, 말 거야?”
[어디로 갈 생각이느냐?]“글쎄? 그건 아직 안 정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매만지던 하은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손가락을 튕겼다.
“해외 함 가는 거 어때? 전에 나랑 오지니랑 둘이서 일본 갔다고 대차게 삐졌었잖아.”
[삐, 삐진 적 없느니라!]“헹. 그러셨셰요~?”
하은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히죽 웃었다.
베가의 이마에 불끈 힘줄이 솟았다.
[이, 이, 이 무례한 것!]“아악!”
파지직!
베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작은 뇌전 줄기에 맞은 하은이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두 여인이 2차전을 시작하려고 할 때.
띵동.
초인종 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응?”
“누구 올 사람 있나?”
오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진 씨.”
현관 앞에는 기다란 상자를 든 이사벨라가 방긋 미소 짓고 있었다.
“전에는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셔서 너무 놀랐지 뭐예요?”
“…….”
듣기만 해도 입꼬리가 풀어질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였지만.
어째서인지 서늘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쫙 퍼졌다.
“내, 내상이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었다 했잖아.”
“어머머. 그러셨죠? 제가 깜빡했네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이젠 많이 좋아졌어.”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이사벨라와 이우혁에게 뒤처리를 짬 때리고 며칠 하은과 쉬는 동안 내상이 많이 낫긴 했다.
“호호.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내상이 그렇게 심하신데도 직접 오토바이까지 운전하시면서 돌아가셨잖아요?”
오.
X발.
“어, 그게.”
“사고라도 나셨으면 어쩌셨을 뻔했어요?”
이사벨라가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오진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마치 횟감이 싱싱한지 살피는 요리사처럼 보여 흠칫 어깨가 떨렸다.
“천상길 씨는 뭐라고 하셨어?”
오진은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탐랑성 님은 자리를 비우고 계셔서 직접 보고를 드리진 못했어요.”
“자리를 비웠다고?”
“예. 아직 ‘뱀’의 추격이 한창이신가 봐요.”
“그래?”
뭔가 ‘뱀’에 대한 단서라도 손에 넣은 걸까.
“그래도 천혜 길드 쪽에는 잘 말해둬서 그쪽 주변을 감시하도록 해뒀어요.”
“다른 일은 없고?”
“음… 엊그제 경계를 서시던 분 몇 명이 도중에 졸아버려서 징계를 받긴 했는데. 특별히 사라진 물건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몇 명이 졸았다고?”
오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경계를 서는 도중 깜빡 잠드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한 명도 아니라 여러 명이?’
그것도 한국 최고의 길드라는 천혜 길드원이?
“뭔가 이상한데.”
“예. 저도 의심스러워서 조사를 해봤는데… 단서가 잡히는 게 없어요. CCTV나 감시용 성유물에도 아무것도 안 찍혀 있었고요.”
“흐음.”
뭔가 이상하긴 하지만 인명 피해도 없고, 사라진 물건도 없는 상황에서 단서도 발견되지 않은 사건을 계속 조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우혁 씨는?”
“현빈 군의 간병을 하고 있어요. 몸은 다 나았는데… 정신적인 충격이 좀 큰 것 같더라고요.”
“하긴.”
제2의 칠성이 될 거라느니 뭐니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가 시작하자마자 개털이 됐으니 그럴 만하지.
‘그나저나 수호성 이거 어쩌냐.’
오현빈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아웃.
두 명이 죽었으니 일곱 명 중 반 가까이가 공석이 돼버린 것이다.
‘나중에 천상길이랑 얘기 좀 해봐야겠구만.’
오진은 혀를 차며 이사벨라가 들고 있는 기다란 상자를 바라봤다.
“이건 뭐야?”
“아. 오진 씨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혹시 또 터무니없는 고가의 선물이라도 준비한 걸까.
“이번에 오진 씨 창이 망가졌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기다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리빙 아머가 사용하던 칠흑의 창이었다.
“이건.”
“오진 씨가 쓰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요.”
오진은 이사벨라에게 건네받은 창을 천천히 살폈다.
2미터 정도 되는 길이에 기다란 날을 지닌 창.
‘좋은데?’
창을 쥐어본 오진은 손에 착 감기는 듯한 감각에 눈을 크게 떴다.
“이 창, 보통 창이 아니에요.”
“보통 창이 아니라면?”
“자아(自我)를 지닌 에고 웨폰이에요.”
“허.”
무기가 스스로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에고 웨폰.
성유물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치는 값진 물건이었다.
“이런 걸 내가 그냥 가져도 되는 거야?”
“후훗. 이번에 가장 활약하신 건 오진 씨잖아요.”
이사벨라가 방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칠흑의 창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제 마력을 흘려 넣어봤는데, 아무래도 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이사벨라 널?”
“예. 아무래도 전 창을 들고 싸우기 적합한 성흔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아요.”
“…….”
글쎄.
양자리 성흔은 그렇다 쳐도 거머리자리의 성흔까지 거부할 정도인가?
‘아니. 이 경우는 인정받았다고 해도 인정받지 않았다고 하겠지.’
그녀는 어디까지나 ‘양자리의 각성자’를 연기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사용할 수 있는지 내가 한 번 테스트해 볼게.”
“조심하세요. 성질이 상당히 난폭한 것 같더라고요.”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칠흑의 창에 천천히 마력을 흘려 넣었다.
파지지직!
창끝에 타오르는 푸른 뇌전.
‘뭐야?’
오진은 놀란 눈으로 창을 살폈다.
분명 얼마 되지 않은 마력을 흘려 넣은 것 같은데, 창끝에 타오르는 뇌전의 크기가 생각 이상으로 컸다.
‘마력 증폭.’
오진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과연 에고 웨폰 아니랄까 봐.
엄청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으응?”
너무나 간단하게 뇌전을 일으킨 오진을 보며 오히려 당황한 것은 이사벨라였다.
“왜?”
“아, 아뇨.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얌전해서요.”
설마 이 정도로 아무런 저항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근데 에고 웨폰치곤 뭐 목소리가 들린다거나 그런 건 없네.”
오진은 칠흑의 창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아마 그 정도 자아는 형성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가?”
잠시 눈을 감고 창에 집중을 해봤으나, 뭔가 ‘자아’가 느껴지는 듯한 움직임은 없었다.
“고마워 잘 쓸게.”
“제 것도 아닌데요 뭘.”
오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칠흑의 창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그나저나 크기가 안 줄어드는 건 좀 아깝네.’
휴대가 불편하다는 건 창의 큰 단점━
차르르륵, 착!
오진이 불편하다고 생각하자마자 칠흑의 창이 자그마한 폴딩 나이프의 형태로 변했다.
“…진짜 자아가 있긴 한가 보네.”
오진은 짧은 탄성을 흘리며 15㎝ 정도 되는 나이프로 변한 창을 바라봤다.
이 정도 크기면 어디든 간단하게 휴대할 수 있다.
“그나저나 오진 씨. 이번에 내상을 치료하시면서 잠깐 쉬신다고 하셨죠?”
“응. 그럴 생각이야.”
이사벨라는 눈을 반짝이며 오진의 손을 잡았다.
“그럼 저희 가문의 별장에 초대할게요! 내상 치료에 효과가 좋은 장소가 있어요!”
“어딘데 거기가?”
“산 프루투오소(San Fruttuoso)란 곳이에요. 바닷가가 정말 예쁜 곳이라 쉬시기도 좋을 거예요.”
바닷가?
“아, 물론.”
이사벨라가 오진의 뒤편에 선 하은의 가슴 부근을 슬쩍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은 씨도 같이 초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