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88)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88화
로마의 휴일 (4)
이사벨라가 건네준 오일 통을 든 채, 오진은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아니.’
비키니의 끈을 풀고, 썬베드에 농염한 자세로 엎드려 있는 이사벨라의 모습.
설원을 연상시키는 새하얀 피부. 등부터 시작되어 골반까지 이어지는 매끄러운 허리 라인.
짓눌린 가슴이 양옆으로 빠져나와 엎드린 자세에서도 그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일을… 발라달라고?”
내가?
직접?
“후훗. 네.”
“…….”
사고가 정지하는 듯한 감각.
바짝 타들어 간 목구멍 사이로 마른침이 넘어간다.
보기만 해도 숨 막히는 매력을 지닌 저 등을 양손에 오일을 바른 채 치덕치덕 문질러야 한다니.
‘이게 뭐 철 지난 러브 코미디 만화도 아니고.’
이런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온갖 머저리 짓을 일삼는 주인공들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는데.
이제야 왜 그들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사벨라 정도로 터무니없는 매력을 지닌 여성의 등을 맨손으로 만진다는 것 자체가 참기 힘든 인내력 테스트였다.
‘누나.’
이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리아크, 베가와 신나게 웃고 떠들며 놀고 있는 하은을 돌아봤다.
그녀를 생각해서라도 이 제안을 받아들여선 안 되겠지만.
‘괜히 빼다가 이사벨라가 회까닥 돌아버린다면.’
이사벨라의 심리 상태는 오진 자신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규칙했다.
지금이야 순한 양처럼 상냥하기 그지없지만.
그녀의 정체는 흑성회 3위 집행관, 거머리 여왕이었다.
이제까지 만났던 흑성회 집행관 놈들이 다들 어딘가 나사 한, 두 개 빠진 정신 상태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녀 혼자서 멀쩡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옳다.
언제, 어디서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폭주할 위험성이 있다는 의미.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폭주한 이사벨라를 막을 수 있는 건 베가가 직접 현신하는 것 정도 외에는 없었다.
‘빌어먹을.’
오진은 꿀꺽 침을 삼키며 갈등에 찬 눈으로 새하얀 등을 내려다봤다.
“오진 씨?”
“아, 응. 알았어.”
“후훗. 구석구석까지 꼼꼼하게 발라주세요?”
이사벨라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엎드린 자세로 새하얀 다리를 물장구치듯 흔들었다.
흔들리는 다리의 움직임에 따라 탐스러운 엉덩이가 씰룩이는 게 보였다.
‘돌겠네.’
오진은 질끈 눈을 감으며 쥐어짜듯 오일을 왕창 짜내어 양손에 발랐다.
찰박.
오일 바른 손이 새하얀 설원에 그 자국을 남겼다.
“하읏.”
새하얀 설원 너머로 메아리치듯 들어오는 야릇한 신음.
오진은 입술을 짓씹으며 기계적인 동작으로 이사벨라의 등에 오일을 펴 발랐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
마약과도 같은 그 감촉이 이성을 모조리 갉아먹기 전에, 끝내야 한다.
“오진 씨… 조금만 천천히.”
이사벨라가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지금 상태에서 속도를 늦췄다가는 진짜 이성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오진은 마력까지 살며시 끌어올리며 속도를 높였다.
“하읏…! 오, 오진 씨!”
“다 끝났어.”
이사벨라의 등에 오일을 다 펴 바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초.
새하얀 설원에 이성의 끈이 모조리 파묻혀버리기 전에 오진은 재빠르게 할 일을 마쳤다.
“흐응… 벌써요?”
이사벨라는 못내 아쉽다는 표정으로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오진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이사벨라는 풀었던 비키니 끈을 다시 묶고, 몸을 돌려 누운 자세로 오진을 향해 늘씬한 다리를 쭉 내밀었다.
“다리 쪽도…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꿀이 떨어지듯 달콤한 유혹.
여기서 다리는 혼자서 발라도 되지 않냐는 정론을 펼칠 남자는 많지 않으리라.
“…다리까지?”
힘겹게 보스를 잡았더니 갑자기 풀피로 부활하면서 2페이즈가 시작되면 딱 이런 기분일까.
오진은 아연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이사벨라는 먹잇감을 포착한 포식자처럼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네. 다리도 부탁드….”
늘씬하게 빠진 다리를 자랑이라도 하듯 내밀려 했을 때.
“읏…!”
이사벨라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눈을 찌푸렸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거칠게 숨을 내쉬며,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이사벨라?”
“아… 죄, 죄송해요.”
이사벨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썬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좀 안 좋은 것 같네요.”
“괜찮아?”
“예. 그냥 가벼운 빈혈기인 걸요? 이젠 괜찮아졌어요.”
그녀는 방긋 미소 지으며 이젠 괜찮다는 듯 깡총 뛰어올랐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전 밴에 들어가서 먼저 쉬고 있을게요. 오진 씨는 조금 더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오세요.”
“…하지만.”
“바닷물에 몸을 담그지 않으면 여기 성유지의 내상 치료 효과도 없다고 했으니 푹 몸을 담그고 오세요.”
“으음. 알았어.”
“그럼 전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
이사벨라가 다소 초조한 발걸음으로 몸을 돌려 멀리 세워둔 밴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오진이 가늘게 눈을 떴다.
‘뭔가 이상한데.’
흑성회 3위의 집행관, 그것도 ‘피’와 관련된 능력을 지닌 그녀가 빈혈기를 겪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앞뒤가 맞지 않았다.
멀어지는 이사벨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오진은 그녀가 사라진 곳으로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흑막.’
검은 먹구름이 그의 기척을 지웠다.
* * *
“하아, 하아!”
도로에 세워진 밴을 지나쳐 좁고 어두운 골목길로 들어온 이사벨라는 가쁜 숨을 내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 으.”
고통을 호소하며, 활처럼 몸을 굽혔다.
“…괜찮으십니까 여왕님?”
골목길 저편에서 말끔한 집사 복을 갖춰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로베르토.
거머리 파벌의 이인자이자, 이사벨라의 가장 충직한 수하였다.
“하아, 하아. 괜찮아요.”
“여기 피입니다.”
로베르토가 미리 준비해 준 혈액 팩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사벨라는 혈액 팩을 뜯어 그 안에 든 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후우.”
상태가 좀 진정됐는지 짧은 숨을 토해내는 이사벨라.
하지만 상태가 완전히 나은 건 아닌지 이마에 흐른 식은땀에 머리칼이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성유지 근처라 ‘저주’의 영향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알고 있어요.”
이사벨라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우웅.
그녀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모양의 목걸이가 빛을 뿜자 왼쪽 가슴에 새겨진 양자리의 성흔이 사라지며 거머리자리의 성흔이 나타났다.
드러난 거머리자리의 성흔은 지우개로 문지른 듯 군데군데가 흐릿해져 있었다.
“…….”
이전에 걸렸던 ‘자미원의 저주’.
사라진 줄 알았던 저주는 몰래 그녀의 성흔에 달라붙어 기생충처럼 그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여왕님.”
로베르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껍데기만 남은 혈액 팩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역시 좀 더 순도 높은 마력을 지닌 피가 필요합니다. 각성자들의 사냥을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직접….”
“분명 안 된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사벨라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가 말씀드렸죠? 피는 사냥이 아닌 헌혈을 통해 얻은 피만 사용하라고.”
“하, 하지만.”
“정신 차리세요, 로베르토.”
이사벨라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사냥을 통해 피를 구하기 시작하면 거머리자리의 흡혈 충동이 폭주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괴수나 다름없는 존재로 떨어지게 된다.
“피는 어디까지나 헌혈을 통해 얻은 거로만. 뭐를 위해서 집시들을 돌봐주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지금 그녀가 마신 피는 콜그란데 가문에서 먹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해 준 집시들의 자발적인 헌혈을 통해 얻은 피였다.
물론 그들이 헌혈한 이유는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우한 집시들을 돕기 위해서였지만.
이사벨라는 그중 일부를 빼돌려 거머리자리 각성자들의 흡혈 욕구를 해결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집시들을 피를 공급하기 위한 일종의 ‘양식장’으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
그게 그녀가 콜그란데 가문을 움직여 수십 개에 달하는 자선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진짜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로베르토는 걱정에 가득 찬 표정으로 이사벨라를 바라봤다.
헌혈을 통해 얻은 피로 흡혈 충동을 줄이는 건 가능했지만, 지금 그녀를 좀 먹고 있는 ‘자미원의 저주’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순도 높은 마력을 지닌 각성자의 피가 필요했다.
그것도 최소 고위 각성자 이상급이 되는 각성자의 피가.
하지만 그런 피를 ‘사냥’이 아닌 ‘헌혈’을 통해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괜찮아요 로베르토. 절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이사벨라는 이마에 달라붙은 백금발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넘기며 피식 웃었다.
자신에 가득 찬 그녀의 모습에 로베르토의 표정이 좀 풀어졌다.
“그 누구보다 아름다우며, 현명하신 저희의 여왕님입니다.”
“후훗. 알았으면 됐어요.”
상태가 많이 호전됐는지 이사벨라는 짙은 미소를 머금으며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그보다 보셨죠? 오진 씨가 완전히 제 유혹에 넘어온 모습!”
이사벨라는 오일을 발라주기 전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오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우쭐대는 표정으로 콧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이게 다~ 제 치밀한 계산과 준비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라고요!”
이번 휴가 플랜은 모두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들뜬 표정으로 자랑하듯 작전을 늘어놓았다.
“우선 제 능력을 오진 씨에게 각인시키는 것!”
절벽 위에 지어진 으리으리한 대저택.
수십 명의 사용인과 호화로운 식사.
보육원에서 자라 궁핍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오진에게 있어서 이 진짜 ‘부자’들의 세계는 마치 별세계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사벨라 자신.
오진의 눈에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로 비췄을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하은 씨와의 격차를 알려줬죠.”
우선 수영복을 통해 드러나는 신체적인 격차.
그리고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벌떼처럼 달라붙는 남자들을 통해 하은과 자신의 인지도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 오진에게 각인시켰다.
외모, 재력, 권력.
그 어디 한 군데도 하은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걸 증명한 셈!
“마지막으로 신체 접촉을 통해 심리적인 거리감을 줄이는 것까지!”
그녀가 생각해도 ‘완벽’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어때요? 로베르토가 생각해도 완벽한 작전이라 생각하죠?”
“…….”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묻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 로베르토.
노년의 집사는 주름진 뺨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저… 그러지 마시고 그냥 고백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뭐, 뭐라고요?”
이사벨라가 토끼 눈을 뜨며 무슨 헛소릴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오진에게 직접 고백을 하라니?
“그, 그러다 차이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이사벨라는 사과처럼 뺨을 붉힌 채 로베르토의 정강이를 거칠게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