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93)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93화
성유지의 괴물들 (4)
전쟁과도 같았던 괴수의 습격이 끝났다.
아름다웠던 휴양지는 질척한 피로 뒤덮였고, 폭풍에 휩쓸리기라도 한 듯 곳곳이 망가져 있었다.
“아오! 이 지긋지긋한 새끼들!!!”
짜증이 가득 섞인 사나운 목소리와 함께 뜨거운 불길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을 유영했다.
비틀거리며 도망치던 괴수 두 마리가 불길에 휩쓸려 잿더미로 변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은은 건물 벽에 등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몇 시간이고 이어진 교전.
아니, 정확히는 교전이라고 하기보다 일방적인 학살극에 가까웠지만.
“뒤지게 힘드네, 시벌 거….”
아무리 수백, 수천 마리씩 쓸어버릴 수 있다고 해도 원체 마을을 습격했던 괴수의 숫자가 많았던 탓에 모두 정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것도 중간에 괴수들이 갑자기 약해지지 않았으면 힘들었을 거고.’
오진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간에 갑자기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괴수들이 내뿜던 뜨거운 열기가 차게 식어버렸다.
덕분에 그녀는 그나마 괴수와의 교전이 아닌,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개미 무리를 짓밟는 느낌으로 남은 괴수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 해도 숫자가 워낙 많은 탓에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 끝이다. 썩을 거.”
건물에 숨어든 놈까진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놈들은 모두 처리가 끝았다.
하은이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담뱃갑을 열었다.
텅 비어 있는 담뱃갑.
아쉽다는 듯 뒤집어 탈탈 털어보지만, 담뱃잎 부스러기 말고는 나오는 게 없었다.
“제길.”
하은은 빈 담뱃갑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폭풍이 휩쓸기라도 한 듯 난장판이 된 거리를 홀로 걸었다.
베가와 리아크는 이미 괴수들과 치열하게 싸우다 힘을 다 소진하고 역 소환되어 버렸다.
그렇게 쓸쓸히 거리를 나아가고 있었을 때.
“응?”
저 멀리 바닷가에서 오진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도 한바탕 괴수들과 싸웠는지 물에 빠진 생쥐 꼴처럼 온몸이 젖어 있었다.
“오지나아아아!”
하은이 눈을 빛내며 두두두두두 오진을 향해 달려갔다.
폴짝 뛰어오른 하은이 오진에게 안겨들었다.
“베가랑 리아크는?”
“힘을 너무 많이 썼다고 성소로 돌아갔어.”
“그랬구만. 누난 어디 다친 데 없어?”
“헤헹. 이 누나가 요런 똥개들한테 다치겠니?”
하은이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어디 갔던 거야?”
“바닷속에 잠깐.”
“뭐?”
놀란 토끼 눈이 된 하은이 쩍 입을 벌렸다.
“저, 저기로 들어갔다고?”
바다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괴수들이 모여 있었는데 저 안으로 혼자 들어가다니.
하은이 걱정에 가득 찬 표정으로 오진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고… 흠. 일단 이쪽도 멀쩡하네.”
주물주물.
“아니 이 누나가 어딜 만지는 거야.”
“으흐흐! 건방진 입과 달리 몸은 솔직하군그래!”
뭔 소리 하는 거야 이 여자.
“다행히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네… 음?”
오진의 몸을 구석구석 더듬던 하은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오진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거문고자리의 성흔.
정확히는 그 성흔 옆에 새겨진 여덟 개의 획(劃)이었다.
“여, 여덟 개? 오지니 너 8성 된 거야?”
“엉.”
“와, 와와! 미친! 벌써 8성이라고?! 7성 된 지도 얼마 안 지났잖아!”
마치 자기 일인 양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기뻐하는 하은.
그녀는 별처럼 눈을 빛내며 오진의 두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이제 그럼 9성까지 한 걸음 남은 거네!”
각성자들에게 있어서 ‘9성’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육체의 재구성이 이뤄지며, 그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힘을 거머쥐게 되기 때문.
‘7성이었을 때도 9성도 막 때려잡고 그랬는데… 오지니가 9성이 된다면.’
꿀꺽.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마른침.
상상하는 것만으로 전율이 일 정도였다.
“이제 막 8성 됐는데 9성은 아직 멀었지.”
“맨날 그러면서 눈 감았다 뜨면 올라가고 그러잖아.”
“그건.”
뭐.
자신의 성장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른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마을 쪽은 어때?”
“일단 여기 주변은 다 정리했어. 저쪽은… 모르지만.”
하은이 가리킨 곳은 그녀와 베가, 리아크가 방어했던 장소의 반대편.
다른 마을로 통하는 도로가 있는 곳이었다.
‘저곳이 뚫렸다면 보통 난리로 안 끝날 텐데.’
오진은 마을 반대편 쪽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만약 이쪽의 지리가 익숙했다면 하은을 데리고 저길 먼저 갔겠지만, 처음 와보는 장소다 보니 일단 사람이 많이 보여 있는 곳부터 먼저 방어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지.’
괴수의 습격에서 완벽하게 마을을 지켰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애초에 이곳의 책임자도, 관리자도 아닌 마당에 이 정도면 할 일은 다 한 게 아닌가.
“그럼 반대편 쪽으로 가면서 남은 놈들을 처리하자.”
“응.”
그렇게 오진과 하은이 마을 반대편 쪽으로 향하려 했을 때.
“저쪽은… 괜찮아요.”
마을 반대편 쪽에서 이사벨라가 걸어왔다.
검붉은 핏물에 젖은 하얀 원피스.
거친 숨을 내쉬며 비틀비틀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이사벨라!”
오진이 빠르게 다가가 이사벨라를 부축했다.
이사벨라는 지친 미소를 지으며 오진을 올려다봤다.
“다른 마을로 가지 못하도록 저희 가문 고용인들이 통로를 봉쇄했어요.”
“…….”
그렇게 말하는 이사벨라의 목소리는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늘었다.
‘저주의 영향인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진은 눈을 찌푸리며 부축한 이사벨라를 근처 벤치 위에 앉혔다.
“이 괴수들은 대체 뭐야?”
“…모르겠어요.”
이사벨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게이트는 저희 가문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었을 텐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붉게 물든 원피스 옷자락을 움켜쥐는 이사벨라.
오진은 그녀에게 누군가 의도적으로 용맥을 폭주시켰다는 사실을 전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아냐.’
일단 폭주한 용맥을 어떻게 잠재웠냐고 되물으면 대답이 궁해질뿐더러 개인적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남아 있었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 볼게요. 길포드 외숙부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저택을 바라보는 이사벨라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산 프루투오소를 관리하고 있던 건 길포드니 그에게 이 사태를 추궁할 모양.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은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오, 오진 씨?”
“데려다줄게.”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저주의 영향이 커진 모양이니 혼자 그녀를 보낼 순 없었다.
“아… 고, 고마워요.”
이사벨라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뺨을 붉혔다.
“끄응.”
하은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마음 같아선 둘 사이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고 싶었지만,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던 이사벨라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럴 수가 없었다.
“가자.”
오진은 이사벨라를 안아 든 채 저택으로 향했다.
길가 곳곳에 널브러진 괴수들의 시체를 가로 지으며 저택에 도착하자.
“차, 차기 가주님! 무사하셨습니까?!”
길포드가 두툼한 뱃살을 흔들며 이사벨라를 향해 다급히 뛰어왔다.
오진에게서 내려온 이사벨라는 자신을 부축하려는 길포드의 손을 차갑게 쳐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그,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신다고요? 이곳의 총책임자는 외숙부님 아니었나요?”
“그, 그렇긴 하지만….”
잔뜩 위축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는 길포드.
그의 눈동자에는 공포와 초조함이 가득했다.
“하아.”
이사벨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정리가 끝나는 대로 징계위원회를 조직하겠어요. 어물쩍 넘어갈 생각 따윈 하지 마세요.”
“자, 잠깐! 차기 가주님?!”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길포드를 지나쳐 이사벨라가 저택 안으로 걸어갔다.
오진은 허둥지둥 이사벨라의 뒤를 따르는 길포드를 살피며 가늘게 눈을 떴다.
‘저놈이 한 짓인가?’
일단 산 프루투오소의 총책임자이니만큼 용맥에 간섭하는 건 쉬웠을 테지만.
이사벨라와 제대로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 벌벌 떨고 있는 길포드에게 용맥을 폭주시킬 만한 깜냥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있다고 해도 길포드 입장에서 용맥을 폭주시킬 이유가 없어.’
용맥이 폭주해서 괴수들이 미쳐 날뛰게 되는 순간 방계고 나발이고 가문에서 쫓겨날 게 뻔한데 미쳤다고 용맥을 폭주시키겠는가?
‘용맥에 간섭할 수 있을 만큼의 권한과 권력이 있으면서도, 의심을 피해 갈 수 있는 인물.’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한 명.
오진의 시선이 이사벨라에게 향했다.
만약 그녀라면 용맥에 자유롭게 간섭할 수 있지 않을까?
용맥이 폭주해서 큰 피해가 생긴다고 해도, 길포드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생각을 이어가던 오진은 고개를 저었다.
이사벨라 역시 길포드와 마찬가지로 용맥을 폭주시킬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용맥을 폭주시킨 걸까.
그렇게 오진이 고민을 이어가고 있을 때.
투두두두두두두!!
옷이 뒤집힐 듯한 강풍과 함께 헬기 한 대가 저택 쪽으로 날아왔다.
“무슨….”
이사벨라가 눈을 찌푸리며 넓은 정원 옆에 만들어진 헬기 착륙장에 내려앉은 헬기를 바라봤다.
헬기의 문이 열리고 백금발을 올백으로 넘긴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느와르 영화에 나올 법한 주인공처럼 잘생긴 외모에 탄탄한 체형을 지닌 사내.
파울로 콜그란데.
현 콜그란데 가문의 가주이자 이사벨라의 아버지였다.
파울로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힐 듯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이사벨라를 향해 다가갔다.
그것도 잠시.
“아아! 사랑하는 내 아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언제 숨이 막힐 듯한 카리스마를 내뿜었냐는 듯 촐싹대는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파울로.
와락!
파울로가 이사벨라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얘기는 들었단다…!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나!”
파울로는 피에 젖은 이사벨라의 원피스를 바라보며 눈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벌벌 떨고 있는 길포드를 차갑게 노려봤다.
“감히 우리 공주님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자네는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걸세.”
“제,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이 사달이 난 건 자네의 관리 소홀 때문이 아닌가?”
“그, 그건…….”
길포드는 쭈글쭈글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이건 제 피가 아니니까요.”
이사벨라가 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파울로는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며 이사벨라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아버지라.’
오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얼굴이 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저 남자가 이사벨라의 아버지였던 건가.
‘이사벨라 말만 들어보면 사이가 나쁜 줄 알았는데.’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헬기를 타고 날아와 이사벨라를 챙기는 모습이 듣던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옷에 묻은 피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미소 짓는 이사벨라의 모습도 아주 효녀가 따로 없었고.
“땀내 나니까 적당히 하고 좀 꺼져 주시면 안 될까요 아버지?”
그런데 이제 불속성을 곁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