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97)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97화
배부른 위선(僞善)과 배고픈 선(善) (1)
“그럼, 이 아이는 제가 잘 처벌 받을 수 있도록 데려갈 테니 두 분은 가보셔도 됩니다.”
데미안은 오진과 하은을 돌아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도와주진 않으시는 겁니까?”
오진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천선성이라면 도와주실 능력은 충분히 있으실 텐데요.”
“…제가 누군지 알고 계셨군요.”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유명한 분이시니까요.”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오진 옆에 하은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데미안을 바라봤다.
“처, 천선성? 그, 그럼 칠성 아냐?”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당황한 표정을 짓는 하은.
하긴, 칠성이라는 거창한 칭호와 달리 데미안의 외모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연예인도 실제로 보면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데미안처럼 흔해 빠진 얼굴이라면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예, 맞습니다. 이 아이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는 건 제게 어려운 일이 아니죠.”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지은 자를 단순한 동정심으로 도움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죄를 짓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은 뭐가 되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지나칠 정도로.
“세상에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를 도와주는 건, 그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렇군요.”
오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론으로 가득 찬 말이다.
‘이게 정의의 검.’
티끌 하나 없이 올곧다.
흠집 하나 없이 올바르다.
인정(人情)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한다.
약자의 고통보다, 절망보다, 절규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선(善)’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였다.
“잘 알았습니다.”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그럼 그 아이는 잘 부탁드립니다.”
“예.”
데미안을 뒤로하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 잠깐 오지나!”
하은이 당황한 표정으로 오진을 뒤따라왔다.
“저대로 가만둘 거야?! 쟤 경찰에 끌려가면 어떻게 될지는 뻔하잖아!”
이름조차 모르는 소년의 인생 따위 오진의 입장에선 어떻게 돼도 상관없지만.
마음씨 착한 하은에겐 처음 보는 소년의 인생이 꽤나 중요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중요한 일이라면 오진에게도 중요한 일이다.
“나중에 이사벨라에게 부탁해서 경찰 쪽에 연락하라고 해둘게. 따로 알아봐서 약값도 챙겨주고.”
“아… 고, 고마워.”
머리에 열이 올라 그런 방법은 생각 못 했는지 하은이 뻘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소년을 끌고 멀어지는 데미안을 힐끔 돌아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저놈이 천선성이라 했지?”
“응. 맞을 거야.”
“정의의 검이니 뭐니 말 많던데 되게 꽉 막힌 새끼였네, 저거.”
“뭐… 사실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니까.”
지나치게 올 바랐을 뿐.
데미안의 행동 자체는 비난할 게 없었다.
어머니가 아프다고 해서 남의 지갑을 훔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으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하은이 뭔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오히려 남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 위선적이라 보일 수도 있겠지.”
값싼 동정심으로 범죄자를 감싸주는 건 위선이라 불러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난 배고픈 선보다는 배부른 위선이 낫다고 생각해.”
배고픈 선은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지만.
배부른 위선은 누구 하나쯤은 구원할 수 있다.
설사 그것이 ‘정의롭지’ 않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까.
“…너다운 말이네.”
하은은 피식 웃으며 오진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였다.
“이래서 내가 우리 오지니를 좋아한다니깐?”
“알았으니까 술집이나 빨리 찾아 들어가자.”
“그랭.”
오진은 하은을 데리고 술집으로 향했다.
* * *
그렇게 하은과 신나게 술을 퍼마신 후 저택에 돌아온 오진.
하은이 먼저 씻겠다며 들어간 사이 오진은 술기운이라도 날릴 겸 가볍게 저택 밖을 산책했다.
“음?”
산책하던 오진의 눈에 들어온 익숙한 인영.
“이사벨라?”
며칠 동안 얼굴조차 보지 못했던 이사벨라였다.
“아… 오진 씨?”
정원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던 이사벨라가 오진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한밤중에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그녀의 얼굴은 짙은 피로에 절어 있었다.
“괜찮아?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이사벨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슬쩍 엉덩이를 움직여 오진이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며 이사벨라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다는 말과 달리, 그녀의 상태는 영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저주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건가.’
심지어 지금은 해가 떠 있는 낮이 아닌 한밤중인데도 이런 상태라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오늘 하은 씨랑 같이 시내 구경을 하셨다면서요?”
“응? 누구한테 들었어?”
“후훗. 아무리 바빠도 오진 씨의 일거수일투족은 다 보고 받고 있답니다?”
이사벨라가 방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럴 땐 제가 안내해 드려야 했을 텐데… 죄송스럽네요.”
“아니 괜찮아. 그보다 일은 좀 어때?”
그만한 대사건이 일어났으니 수습하기 쉽지 않았으리라.
“길포드 외숙부를 해임하고… 유족분들을 모아 사죄하고… 정신이 없네요.”
“네가 모두 책임질 일은 아니잖아.”
산 프루투오소에서 일어난 사건은 지진이나 태풍과 같은 재난이었다.
적어도 사람들에겐 그렇게 알려졌다.
관리 소홀을 명목으로 길포드가 처벌받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냥 놀러 왔을 뿐인 이사벨라가 홀로 책임을 지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전 콜그란데 가문의 차기 가주니까요.”
“귀족 가문이 마냥 좋은 건 아니네.”
“권력에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죠.”
이사벨라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기껏 오진 씨를 초대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서.”
“괜찮아. 나름 잘 쉬고 있으니까.”
“…고마워요.”
이사벨라는 오진의 손등 위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늦었으니까 그만 들어가서 쉬어. 요즘 거의 잠도 못 잤을 거잖아?”
오진은 데친 숙주처럼 지쳐 있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사벨라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오진 씨는 조금 더 있으실 건가요?”
“응.”
“그럼 먼저 들어가 쉴게요.”
이사벨라가 멀어졌다.
홀로 남은 오진은 벤치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띠리리링.
그때, 오진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그러고 보니 슬슬 연락 올 때 됐나.’
당연한 일이지만.
오진이라고 해서 지난 일주일 동안 가만히 놀고 있던 건 아니었다.
무너진 해저 동굴 틈에서 찾아낸 성유물 조각의 출저를 조사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정보원에게 맡겨둔 상태.
“여보세요.”
-란초니입니다.
파올로 란초니.
예전 이사벨라를 찾아 로마에 왔을 때 한 번 도움을 받은 적 있었던 정보원이었다.
“조사 맡긴 건 어떻게 됐습니까?”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알아냈습니다.
오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디서 구한 성유물이죠?”
-콜그란데 가문입니다.
“…예?”
용맥을 폭주시킨 성유물이 콜그란데 가문 거라고?
-확실합니다. 기록이 거의 지워져 있긴 한데… 과거 콜그란데 가문에서 직접 구해간 폭발형 성유물이 맞습니다.
“…….”
그렇다면 용맥을 폭주시켜 수천, 수만 마리의 괴수들이 게이트 밖으로 뛰쳐나오게 된 건 모두 콜그란데 가문의 짓이었단 말인가.
‘왜?’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그곳이 경쟁 가문이 관리하고 있는 곳이라면 모를까.
자기 앞마당에 폭탄을 심어 터뜨리는 미친놈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오진 씨?
“아, 예. 감사합니다. 보수는 나중에 그쪽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뚝.
통화가 끊겼다.
오진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용맥의 폭주가 콜그란데 가문에서 벌인 자작극이라면.
‘일단 이사벨라의 짓은 아니야.’
저렇게 한밤중에도 저주의 영향이 남아있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져 가면서 용맥을 폭주시킬 이유가 없다.
“…잠깐.”
생각을 이어가던 오진의 눈이 찌푸려졌다.
‘이사벨라의 상태가 저렇게 심해진 게 언제부터지?’
분명 첫날 그녀와 로베르토와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만 해도 ‘밤이 되면 괜찮아진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는 어떤가.
해가 진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녀의 상태는 오히려 첫날 해변에서 봤을 때보다 심각해 보였다.
‘힘을 사용한 거야.’
밀려드는 괴수들을 막기 위해 그녀는 거머리자리의 성흔을 사용했다.
그것도 저주에 가장 취약해지는 대낮에.
“하.”
오진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군.”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언젠가… 기적처럼 모든 앙금과 오해가 풀리고,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요.
달이 높게 떠오른 밤.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내뱉던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됐네.”
오진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알고 있던 일인데도.
예상했던 일인데도.
입안이 쓰다.
“쯧.”
짧게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누가 용맥을 폭주시켰는지 알았으니, 이제 움직일 때였다.
‘흑막.’
기척을 감춘 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내부 구조는 지난 일주일 동안 미리 파악해 둔 상태.
오진은 망설임 없이 이사벨라의 아버지이자 현 콜그란데 가문의 가주, 파울로 콜그란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문 앞에 선 채 사냥개자리의 성흔을 활성화했다.
‘음?’
분명 이 시간이면 파울로가 방 안에 있을 시간인데, 들려오는 소리가 수상쩍을 정도로 없었다.
‘결계 같은 걸로 막아둔 건가.’
오진은 가볍게 손을 뻗어 문을 만졌다.
생각했던 대로, 규칙적인 마력의 흐름이 파울로의 방문을 뒤덮고 있었다.
‘결계를 먼저 뚫어야겠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오진은 변형을 사용해 신체 일부를 액체로 만들었다.
방문 아래 작은 틈으로 흘러드는 액체.
방문에 쳐진 결계가 내부의 소리를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만드는 거라면,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도 결계를 파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늦은 밤 부르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뇨. 악을 처단하는 일에 밤낮은 중요하지 않죠. 저야말로 붙은 꼬리를 떼어내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하하. 다행이군요.”
방 안에는 파울로 말고도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오진에겐 아주 익숙한 목소리를 지닌 사람이.
“마녀에 대한 자료들은 이게 전부입니까?”
“예. 마녀는 저희 가문의 센터를 이용해 집시들을 보호해주는 척을 하며 뒤로는 잔혹하게 그들의 피를 뽑아내고 있습니다.”
“…더럽기 짝이 없는 위선자로군요.”
데미안은 짙은 분노가 느껴지는 눈으로 허리춤에 찬 검을 움켜쥐었다.
“바로 처단하겠습니다.”
“아뇨. 내일까지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파울로는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눈을 빛냈다.
“내일 해가 가장 높게 떴을 때. 그 마녀가 가장 약해질 시간에… 처단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찾아뵙죠.”
문 앞에 기댄 채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오진은 데미안이 밖으로 나오기 전에 몸을 돌려 멀어졌다.
저벅, 저벅.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걸으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더럽기 짝이 없는 위선자라.’
이사벨라의 더러운 위선은 수천, 수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네 깨끗한 선은 누구를 구원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