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198)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198화
배부른 위선(僞善)과 배고픈 선(善) (2)
-헤헤, 카시아 언니! 이것 봐!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빛바랜 앨범의 한 페이지.
정원에서 자란 들꽃으로 작은 왕관을 만들어 언니에게 선물해 줬던 기억.
-어머, 예뻐라.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언니는 휠체어에 앉아 들꽃으로 만든 작은 왕관을 받았다.
사랑스럽게 왕관을 쓰다듬던 언니는 내 머리 위에 왕관을 살포시 올렸다.
-이건 언니 주려고 만든 건데!
-아냐. 우리 벨라가 쓰는 게 더 잘 어울려.
-구래?
언니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왕관을 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마 언니는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자신의 머리 위에 왕관이 쓰일 날은 오지 않을 거란 걸.
-헤헤. 난 언니가 젤루 좋아!
언니의 가녀린 무릎 위에 올라타며 환하게 웃었다.
-저런, 우리 공주님. 언니 괴롭히면 못써요.
-괴롭힌 거 아닌데!
정원으로 다가오는 아빠.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봄날 햇볕처럼 따스했다.
-괜찮아요, 아버지.
-카시아?
-벨라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요.
언니는 유리처럼 가녀린 팔로 날 끌어안았다.
-지금이 아니면…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도 많이 없을 테니까.
-언니 어디 가는고야?
-후후. 아니란다.
어렸던 난 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자상하게 끌어안아 주는 언니가 좋아, 앙탈을 부리듯 뺨을 비볐을 뿐.
빛바랜 앨범의 페이지가 끝나고.
다음 장이 펼쳐진다.
‘안 돼.’
애타게 손을 뻗었지만, 넘어가는 페이지를 붙잡을 순 없었다.
‘그만….’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귀를 닫는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들려온다. 밀려온다.
-왜, 왜! 왜 언니가 가문에서 추방당해야 하는 건데요!
-…가문의 규율이다.
-그깟 규율이 뭔데요!
와장창!
값비싼 도자기를 집어 던지며 발악하듯 외쳤다.
아버지는 입술을 깨물며 다그치듯 외쳤다.
-그깟 규율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콜그란데의 이름을 지켜준 전통이란 말이다!
-필요 없어요! 빨리 언니를 데려와요!
-안 된다니깐!!
아버지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나라고 좋아서 카시아를 내보낸 게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규, 규율을 지키지 못하면 콜그란데의 이름을 이을 전통성이 사라진다! 방계 놈들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서 우릴 갈기갈기 뜯어먹을 거란 말이다!
몸을 끌어안은 채 벌벌 떨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그러면 이깟 가문 나오면 되잖아요! 전 엄마 아빠랑 언니만 있으면 된다고요!
-…….
울부짖는 자신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짜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뺨이 돌아갔다.
찢어진 입술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피 맛.
-가문을 나오면 된다고?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은 누구 돈으로 산 거라 생각하느냐? 매일 먹는 호화로운 만찬들은? 아니, 지금 네가 서 있는 이 저택은!!!
-그건….
-다! 다 콜그란데 가문이 수백 년에 걸쳐 쌓아 올린 부(富)에서 나온 거란 말이다!
절규하듯 외치는 아버지.
자상하고 카리스마 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곳에는 권력을 잃을까 두려움에 떠는 추레한 중년이 서 있을 뿐이었다.
‘…….’
입안에 퍼지는 입안에 퍼지는 비릿한 피 맛과 함께.
또다시 빛바랜 앨범의 페이지가 넘어간다.
북극에 열린 마경의 문을 시작으로 괴수에 뒤덮인 세계.
언니를 찾으러 떠난 길에 만나게 된 검은 별의 성좌.
거머리자리의 성흔을 얻고 흡혈 충동에 휘말려 게걸스럽게 피를 탐했던 나날들.
‘그만, 그만… 해.’
목을 태우는 갈증 속에서 가까스로 흡혈 충동을 다스리는 법을 익혔다.
검은 별의 축복이었을까, 아니면 저주였을까.
흡혈 충동을 다스리는 데 성공한 나는 남들보다 곱절의 곱절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가문.
-이, 이사벨라? 사, 살아있었니?
-후훗. 네, 아버지.
거머리자리의 성흔과 흑성회라는 강력한 힘을 양손에 쥐게 된 난 빠르게 가문을 장악했다.
건방을 떨던 방계를 굴복시키고, 아버지의 권력을 짓밟았다.
내가 콜그란데 가문의 모든 것을 손에 넣으면.
실종된 언니를 되찾고, 아버지를 잘 설득할 수만 있으면.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그때로, 빛바랜 앨범의 첫 페이지로━
“후아!!”
거친 숨을 토하며 몸을 일으켰다.
밤새 흘린 식은땀이 가슴골 사이에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든 게 보였다.
“…최근 무리하긴 한 모양이네요.”
이사벨라는 땀에 젖어 들러붙은 하얀 네글리제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산 프루투오소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로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눈을 붙인 거라 그런지 괜한 꿈을 꿔버리고 말았다.
“읏…!”
욱신.
왼쪽 가슴을 날카로운 조각칼로 후벼 파는 듯한 고통에 이사벨라는 눈을 찌푸렸다.
침대 옆 선반 아래 서랍을 열어 혈액 팩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학처럼 고운 목을 타고 흘러내린 핏물이 하얀 네글리제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후우.”
통증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이사벨라는 손을 뻗어 왼쪽 가슴을 더듬었다.
군데군데 사라진 거머리자리의 성흔.
일주일 전과 비교해 사라진 부분이 더 넓어졌다.
‘이제 더 이상 혈액 팩만으로는….’
피가 필요했다.
그것도 그냥 피가 아닌, 최소 고위 각성자급의 마력량과 순도를 지닌 각성자의 생혈(生血)이 필요했다.
“하아.”
고위 각성자의 생혈이라니.
사냥을 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구할 방법이 없었다.
이사벨라는 고민에 잠긴 채 하얀 네글리제 자락을 움켜쥐었다.
만약 사냥을 시작한다면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흡혈 충동이 폭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버티고만 있을 수도 없다.
저주가 강해질수록, 피에 대한 갈증 또한 강해졌으니까.
“…일어나죠.”
오늘도 바쁜 일정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이사벨라는 피에 젖은 하얀 네글리제를 벗고 즐겨 입는 흰색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문뜩 그녀의 시선이 혈액 팩이 들어있던 선반 아래 서랍으로 향했다.
그 안에는 어렸을 적 자신과, 언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찍힌 사진이 있었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
“…….”
낡은 사진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수건으로 닦았다.
언니는 실종됐고, 어머니는 게이트 사태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는 허울뿐인 권력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으며 몇 년째 자신과 대립 중이고.
“하하. 이렇게 보니 정말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네요.”
이사벨라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가볍게 몸단장을 마치고 오늘 일정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드넓은 저택의 복도를 거닐던 도중, 그녀의 발걸음이 한 방 앞에서 멈췄다.
오진이 묵고 있는 방이다.
“…오진 씨.”
달빛이 내리쬐는 밤.
그와 함께 와인을 기울였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를 떠올리자 묘하게 가슴이 들뜨며 축 처져 있던 몸에 활기가 돌았다.
이사벨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두근두근 맥동하는 가슴을 쓸었다.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말이죠.’
처음엔 황홀한 피 맛과 냄새에 취해 그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그와 가까워질수록, 권오진이란 남자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뭔지 모르게 그에게 이끌리는 자신이 있었다.
‘쓸데없는 감정이죠.’
방문을 두드리려던 이사벨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단순히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쓸쓸히 몸을 돌린 이사벨라는 아침도 채 먹지 못하고 서류 작업에 돌입했다.
유족에 대한 보상안이 적힌 서류와 운영 중인 수십여 개에 달하는 보호 센터의 결재 서류, 은밀한 암호문으로 숨겨져 있는 흑성회 용 서류들까지.
“하아.”
로베르토라도 있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이사벨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류 작업을 이어나갔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절반 정도 처리했을 때.
“흐으읏!”
이사벨라는 허리를 곧게 펴며 기지개를 켰다.
흉악한 위력을 지닌 미드가 원피스를 밀어 올리며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벌써 이런 시간이 됐네요.’
시간을 확인하니 정오가 가까워져 있었다.
슬슬 다음 일정을 처리할 시간이다.
“어디 보자… 다음 일정이 기자 회견이랑… 인터뷰.”
평소라면 로베르토가 스케줄을 정리해 알려줬을 테지만, ‘정의의 검’을 감시하라고 보낸 탓에 따로 스케줄을 정리해 줄 사람이 없었다.
이사벨라는 가볍게 혀를 차며 다음 일정을 체크했다.
‘그나저나 오늘 로베르토한테 보고가 없었네.’
뒤숭숭하기 짝이 없는 꿈 때문에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매일 아침 데미안 살바토르의 이동 경로와 근황을 보고해줬는데.
오늘 아침에는 이상하게 아무 연락도 없었다.
“…뭐지?”
이사벨라는 눈을 찌푸리며 로베르토에게 연락을 걸었다.
뚜, 뚜, 뚜.
전화가 꺼져 있었다.
통신용 성유물이나 성흔을 이용해 거문고자리의 각성자만 감지할 수 있는 마력 파동을 퍼트려도 결과는 마찬가지.
“…….”
등골을 타고 흐르는 질척한 불길함.
이사벨라는 가늘게 눈을 뜨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저택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을 때.
차르르르르르륵!!
테러 대비용으로 만들어진 차폐막이 내려와 입구를 차단했다.
“무슨….”
이사벨라가 당황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을 때.
쿠르르르릉!
저택 천장이 무너지며 콘크리트 조각이 비처럼 쏟아졌다.
“읏!”
이사벨라는 눈을 찌푸리며 쏟아지는 잔해물을 피했다.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뿌연 회색 먼지와 메케한 냄새만으로 충분히 불쾌했지만.
“아, 으.”
다른 무엇보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무너진 천상 사이로 쏟아지는 따가운 햇볕이었다.
욱신.
햇빛을 직접적으로 쬐니 성흔을 좀 먹고 있던 자미원의 저주가 활개 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
목을 태우는 갈증이 그녀의 이성을 갉아먹었다.
‘피, 피, 피!’
달콤한 핏물을 혈관을 타고 흐르는 생혈이 필요했다.
아무나 상관없이 붙잡아 목을 움켜쥐고, 경동맥에 송곳니를 쑤셔 박아 핏물을 쭈욱쭈욱 들이켜기만 한다면.
‘얼마나.’
혀가 녹아내릴 정도로 달콤할까.
뇌가 녹아내릴 정도로 행복할까.
“하악, 악, 아으.”
가슴을 부여잡으며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눌렀다.
그때 무너진 잔해 너머에서 그녀의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녀에겐 익숙한 혈액 팩 안에 담긴 피의 냄새.
“어디….”
본능적으로 혈액 팩을 찾으려 발걸음을 움직였을 때.
“이걸 찾고 있는 거냐?”
잔해 위에서 파울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혈액 팩을 기울여 안에 담긴 피를 바닥에 콸콸 쏟아버렸다.
“아버지…?”
이사벨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파울로를 바라봤다.
“아버지? 지금 아버지라고 했나?”
파울로는 팍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사벨라를 차갑게 노려봤다.
“어디서 그 더러운 혓바닥으로 날 아버지라 부르는 거냐?”
“예? 그게 무슨.”
“이미 네 정체는 탄로 났단다, 이 더러운 마녀야.”
“…….”
더러운 마녀.
파울로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말이 그녀의 가슴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이사벨라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파울로를 올려다봤다.
‘언제부터.’
자신의 정체가 들켜버린 걸까.
“이사벨라 콜그란데.”
저벅, 저벅.
아버지의 뒤편에서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당신을 처단하겠습니다.”
갈색 더벅머리에 순박한 인상을 지닌 청년은, 그 시골 청년과 같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살기 어린 눈동자로 이사벨라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