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03)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03화
배부른 위선(僞善)과 배고픈 선(善) (7)
언제부터였을까.
자상했던 아버지가 돌변하게 된 건.
언니를 강제로 떠나보내야 했을 때?
아니면 자신이 각성자가 되어 돌아왔을 때?
아니면.
처음부터 뒤틀린 본심을 자상함이라는 가면으로 숨기고 있었던 걸까.
자신이 거머리 여왕이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로마의 성녀를 연기했던 것처럼.
“…왜.”
이사벨라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입을 열었다.
쥐어짜듯.
묻는다.
“왜… 그러셨어요?”
그녀가 가문의 실권을 쥐게 된 이후 아버지의 권한을 많이 줄여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각성자’가 아니었던 파울로는 이사벨라가 오기 전부터 방계 가문들의 권력에 짓눌려 사실상 이름뿐인 가주 직책을 달고 살아오고 있었다.
오히려 이사벨라가 돌아와서 방계 가문들을 싸그리 짓밟아 주면서 그나마 전보다는 더 많은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제가 그렇게 눈엣가시였나요? 칠성까지 끌어들여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
“뭐라 말씀 좀 해보세요 아버지. 말하는 거 하나만큼은 잘하셨잖아요?”
이사벨라는 지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파울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없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왜… 그랬냐고?”
움켜쥔 그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게냐?”
“예.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너 때문에… 너 하나 때문에! 내가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고?!”
파울로는 울부짖듯 외쳤다.
“가주의 권한? 차라리 네가 오기 전이 나았다! 차라리 방계 가문들의 꼭두각시인 채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게 나았어!”
그때는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성좌의 선택을 받지 못했으니까, 운이 없어 각성자가 되지 못했을 뿐이라고 자위할 수 있었다.
허울뿐인 가주 직책이었지만.
적어도 비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가… 네가 돌아온 이후에… 모든 게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이사벨라는 유능했다.
지나칠 정도로 유능했다.
각성자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녀는 사람을 다룰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거머리자리의 각성자’라는 사실 숨기고 있던 그녀는 각성자로서의 힘을 사용해서 방계 가문의 가주들을 짓밟은 게 아니었다.
우선 콜그란데 가문의 직계만이 가질 수 있는 토지와 사업체를 미끼로 방계 가문 사이에 분쟁을 일으켰다.
늑대 무리 사이에 양 한 마리를 던져 넣은 셈.
욕망에 눈이 먼 방계 가문들은 눈에 불을 켜며 미끼에 달려들었고, 그들 사이를 이간질하며 분쟁을 더 격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이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각성자들에게 접근해 콜 그란데 가문 직속의 경호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뒤는 일사천리.
서로 치고받고 싸우느라 힘이 빠진 방계 가문들의 사업체를 은밀하게 흡수하며 몸집을 키운 후, 그들 모두를 힘으로 굴복시켰다.
그래.
그 모든 것이.
‘파울로 콜그란데’에게도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내가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었는지 너는 절대 모를 거다!”
자신은 안 된다고 포기하고 있던 일을 이사벨라가 해낸 것이다.
담담하게, 덤덤하게.
마치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너무도 손쉽게.
그때 느꼈던 비참함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를 난자했다.
“네가 방계 가주들을 굴복시킨 다음 뭘 시켰는지 기억하니? 응?”
“…아버지에게 사죄하라고 했죠.”
“그래! 나에게 사죄하라고 시켰었지!”
아아.
그날의 악몽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억지로 허리를 숙이며 머리를 조아리는 그들의 모습을!
유능한 딸을 둔 덕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승리를 가져간 자신을 바라보는 그 경멸과 조롱에 가득 찬 눈빛을!
“만약… 내가 너처럼 유능했다면, 너와 같은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그랬다면.
“카시아도… 그 불쌍한 아이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파울로는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절규했다.
‘전통성’을 빌미로 카시아를 추방하라는 압박이 사방에서 쏟아졌을 때.
만약 자신이 아닌 이사벨라가 가주였다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았다고.”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높게 솟은 거악처럼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행복한 미래가.
사실은 충분히 두 다리로 올라설 수 있었던 미래였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았다면.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처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너를 증오한단다. 내게 현실을 깨닫게 해준 널, 그 누구보다 증오해.”
파울로는 이사벨라를 노려보며 흐느꼈다.
“…….”
이사벨라는 굳게 입을 다문 채 흐느끼는 파울로를 내려다봤다.
아팠다.
가슴이, 마음이.
날카로운 칼로 후벼 파는 것처럼, 뜨거운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너무나 아프고 아팠다.
“…아, 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어린 시절 파울로를 불렀을 때의 호칭.
피에 젖은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난.”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 그런 비참함을 느끼게 만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온 가족이 함께 웃고 있던.
빛바랜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아, 으.”
이사벨라는 가슴을 움켜쥔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어쩌다 이렇게 망가진 걸까.
“하아, 하아!”
거친 숨이 헐떡였다.
오진의 피를 빤 후 사라졌던 흡혈 충동이 다시금 끓어올랐다.
이사벨라는 거칠게 입술을 짓씹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차르르르륵.
검붉은 핏물이 그녀의 손끝에 맺혔다.
“…그래.”
파울로는 허망한 표정으로 이사벨라를 올려다봤다.
“네 손으로 직접 이 비참한 삶을 끝내주려무나.”
더 이상 아무 미련도 남아있지 않다는 듯.
파울로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사벨라는 핏물이 맺힌 손을 들어 올린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파울로를 죽이는 건 길가에 지나가는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저 들어 올린 손을 가볍게 내려치기만 한다면.
파울로는.
죽는다.
“하아, 하아, 하아.”
하지만 어째서일까.
들어 올린 손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스르륵.
그때, 그녀의 발치로 사진 한 장이 바람에 날려왔다.
‘이건.’
서랍장 안에 남몰래 보관하고 있던 사진.
그녀가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찍었던 사진이었다.
“…아.”
저택이 무너지며 서랍장 안에 있던 게 빠져나오기라도 한 걸까.
신의 농간과도 같은 우연에 이사벨라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죽여야 해.’
발치에 날아온 사진을 짓밟으며 그녀는 파울로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파울로는 자신이 거머리 여왕이라는 사실을 알아채 버렸다.
‘오진 씨에게도 피해가 갈 거야.’
오진이 흑성회 집행관의 편을 들어줬다는 사실이 밖에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지금 뇌랑이라 불리며 영웅으로 칭송받는 그에게 큰 누가 되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사실.
이곳에서 파울로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그래.
이제 그녀의 마음속 고이 간직하고 있던 희망은, 영영 이뤄질 수 없는 꿈이 되어버린 것이다.
“흐윽, 흑.”
이사벨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왜, 왜, 왜, 왜.”
산산이 부서진 희망의 조각들은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리 공주님.”
“부르지 마요!”
이사벨라는 파울로를 노려보며 외쳤다.
“그렇게 절… 부르지 말라고요.”
흐느껴 울며 들어 올린 팔에 마력을 집중했다.
손끝에 맺힌 검붉은 핏물이 거대한 낫의 형태로 변했다.
마치 흡혈귀의 송곳니처럼 생긴 낫이 파울로의 정수리에 닿았다.
파울로는 눈물을 흘리는 이사벨라를 올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다.”
“…….”
“못난 아빠라 미안해.”
“닥쳐요 제발. 그런다고 살려줄 생각 없으니까.”
파울로는 그녀가 거머리자리의 성흔을 사용하도록 만들기 위해 강제로 용맥을 폭주시켰다.
오진과 하은의 도움으로 어떻게 피해를 최소화할 순 있었지만.
적어도 수백 명의 사람이 그날 그 괴수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아무 죄 없는, 그저 휴양을 즐기기 위해 바다에 놀러 온 사람들이.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있어요?”
울부짖는 유족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희생자 중에는 이제 막 아이를 가진 임산부도, 신혼여행을 온 새내기 부부도, 효도 여행이랍시고 부모와 함께 여행을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떳떳한 일만 하며 살아온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울로가 벌인 일을 아버지라는 이유로 감싸줄 수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
파울로는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하아, 하아, 하아!”
이사벨라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거친 숨을 내쉬며 핏빛 낫을 들어 올렸다.
‘이대로 내려치는 거야.’
그래.
이걸로 끝이다.
손을 가볍게 30cm만 밑으로 내리면.
이제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빛바랜 시절을 쫓아 아등바등 발버둥 칠 일도 없어지는 것이다.
‘어려운 일 아니야.’
길가에 기어 다니는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나는, 나는, 나는…!’
이사벨라는 질끈 눈을 감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턱에 방울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촤악!
툭, 투두두둑.
잘려 나간 파울로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어?”
이사벨라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뜬 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핏빛 낫은 아직 높게 들어 올려진 채 가만히 멈춰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그녀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돌린 자리엔.
피 붙은 창을 손에 쥔 채 무뚝뚝하게 서 있는 오진의 모습이 보였다.
바닥에 굴러떨어진 파울로의 머리를 내려다보던 오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가 죽인 거야.”
오진은 떨고 있는 이사벨라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오진, 씨…?”
“네가 아니라, 내가 죽인 거라고.”
“왜… 왜 오진 씨가?”
이사벨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진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래.
그녀는 마음속에 고이 간직해 왔던 희망을, 간절히 바라왔던 행복을.
자신의 손으로 부수지 않았다.
“내가.”
그녀의 희망을 부순 것은.
송두리째 짓밟은 것은.
“내 손으로 죽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