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0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09화
뱀의 머리 (2)
“정확히 어떤 흔적을 찾으신 겁니까?”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뜨며 물었다.
-그건 직접 와서 보는 게 빠를 걸세.
“…하지만.”
-아아, 뱀자리 여왕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이 늙은이 혼자 일주일 정도 숨어지내며 주위를 살폈네만 다행히 이미 자리를 떠난 것 같더군.
“흐음.”
오진은 짧은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상길이 이 정도로 자신하는 걸 보니 일단 안심해도 되리라.
-예전에 마수 사태가 일어났을 때 직접 해결한 게 자네 아닌가. 이번에도 도움을 좀 받고 싶네.
“그건 그렇습니다만.”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뜬 채 고민에 잠겼다.
다른 곳도 아니고 도심지 한복판에 마경으로 통하는 균열이 생겼다는 데 가만히 손 빨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산 프루투오소에서처럼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손을 써야 하는 게 맞지만.
‘뭐지?’
뭔가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는 듯한 불쾌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할부지 몸은 좀 어때?”
-으음? 주변에 자네 말고 다른 사람도 있었나?
“아, 예. 누나랑 이사벨라랑 같이 있었습니다.”
-그거 잘 됐구만. 안 그래도 하은 양과 이사벨라 양에게도 연락할 생각이었네.
확실히 오진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쯤 가면 되겠습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네. 아직 균열 밖으로 마수들이 나오진 않은 모양이네만… 일단 균열이 있는 이상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 않나?
“그건 그렇죠.”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준비가 끝나면 바로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이 늙은이는 길드 쪽에 연락해야 하니 이만 끊겠네.
뚝.
통화가 끊겼다.
“마경으로 통하는 균열이라니… 그게 뜬금없이 한국에 왜 나타난 걸까요?”
이사벨라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뱀이 연관됐을 가능성이 크겠지.”
“…그럼 지금 거기로 가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위험하다고 덮어둘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까.”
도심지 아래 마경으로 통하는 균열이 생겼다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깔고 앉아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뭐, 그 폭탄이 터진다고 해도 오진이 직접 피해를 볼 가능성은 적었지만.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겠지.’
여기서 자신이 몸을 사리기 위해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퍼져나가기라도 했다가는 기껏 쌓은 명성이 한 번에 나락으로 처박힐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되지.’
‘뇌랑’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유용한지는 이번에 이사벨라와 입을 맞춰 데미안 사건을 덮을 때도 절실히 느낀 사실.
만약 이사벨라와 오진이 평소 착실히 쌓아둔 명성이 없었다면 무려 칠성이 죽은 대사건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피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뱀을 쫓아야 할 이유가 생기기도 했고.”
“천마… 때문이신가요?”
“응.”
천마의 정체.
그 정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존재는 아마 ‘뱀자리 여왕’ 말고는 없을 것이다.
“할부지 목소리 들으니까 진짜 심각한 상황인 것 같긴 하네.”
“왜? 평소랑 좀 달라?”
“엉. 평소엔 아무리 바빠도 저렇게 필요한 말만 툭툭 하시지는 않거던.”
하긴.
생각해 보면 천상길은 좋게 말하면 유연하고, 나쁘게 말하면 약간 능글맞은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천상길 밑에서 집중 지도를 받았던 하은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일단 준비할 것부터 준비하자.”
“오키. 나 그럼 집 돌아가서 먼저 씻을게.”
“필요하신 게 있으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오진 씨. 로베르토한테 구해오라고 할게요.”
“응. 도시락은 나중에 먹어야 할 것 같네.”
“후훗. 언제든 다시 만들어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오진과 하은, 이사벨라는 속초로 떠나기 전에 각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고 장비를 점검했다.
와이어 슈터를 점검한 후 폴딩 나이프 형태로 변해 있는 창을 꺼내 기름칠을 한 도검용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았다(자아가 있기 때문인지 닦을 때마다 창대가 부르르 떨렸다).
최근에는 쓸 기회가 없어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삼색 팔찌와 건틀릿도 꼼꼼하게 준비한 후, 잠깐 명상을 하면서 트레이닝을 하면서 빠져나갔던 마력을 충전했다.
“다들 준비 끝났어?”
완전 무장을 마친 오진이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는 스키니진과 라이더 재킷을 입은 하은과 커다란 금빛 보색이 박힌 지팡이를 든 이사벨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 준비 다 끝났어요.”
“아까 뒤지게 얻어터져서 좀 피곤하긴 한데. 어쩔 수 없지 뭐.”
“앗. 언니 그건….”
“이런 일 있을 줄 모르고 한 거 알고 있으니까 그 얌체 같은 표정 좀 고만 지어.”
하은이 피식 웃으며 이사벨라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아.”
다른 사람에게 뺨이 꼬집힌 게 처음인 듯, 이사벨라는 한 손으로 뺨을 쓰다듬으며 동그랗게 눈을 떴다.
당황한 표정으로 하은을 바라보고 있던 이사벨라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슬슬 출발하자.”
“베가는 안 불러도 괜찮겠어?”
“가서 부르려고.”
베가의 경우 지구에 현신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도착한 후에 소환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오키! 그럼 후딱 가서 그 뱀인지 구렁인지 꼬리를 착! 잡아채고 오자고!”
하은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 * *
“으음. 여기가 속초인가요?”
차에서 내린 이사벨라는 속초를 쭉 훑어보며 가볍게 눈을 찌푸렸다.
반년 전 마수 사태 때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속초 시내는 아직 그때의 상처를 다 복구하지 못했는지 이곳저곳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 도중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 맞죠?”
“아까 할부지가 말했던 마수 습격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하은이 재킷에서 연초를 한 대 꺼내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입에 물었다.
속초에서 일어난 마수 토벌 작전 때 미리 사람들을 대피시켜 뒀기에 인명 피해는 따로 없었지만.
그들이 살아가던 삶의 터전이 망가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무너진 건물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니 원래 속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재건되는 데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하리라.
“누나 전에 검은 기둥이 치솟아 오른 데가 어디였지?”
“아, 저쪽이야.”
연초를 태우며 힘없이 길가를 거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던 하은이 휴대용 재떨이에 연초를 비벼 껐다.
한창 공사 중인 엑스포타워 옆에 직경 300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흙구덩이가 보였다.
싱크홀이 일어난 것처럼 도심지 중앙에 만들어진 흙구덩이.
접근 금지 펜스가 설치된 구덩이 주변에는 한복을 입은 한 노인이 오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와줘서 고맙네.”
천상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오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천혜 길드는 아직입니까?”
“지금 거의 다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네.”
천상길이 몸을 빙글 돌려 접근 금지 펜스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뚫린 흙구덩이 아래에서는 질척거리는 듯한 불쾌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그렇다네.”
천상길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진은 한숨을 내쉬며 천혜 길드원들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 수호성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으음? 어떻게 하다니?”
“일곱 중에 세 명이나 죽지 않았습니까?”
“아아, 그랬지.”
천상길은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작전 중 인명 피해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그건… 그렇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담백한 반응이었다.
“일단 이 일이 끝나면 충원을 해보겠네. 새로 뽑을 인원에 대해선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겠지.”
천상길은 검은 구덩이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이우혁 씨는 안 왔습니까?”
“연락은 해봤네만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고 하더군.”
“폐관 수련이요?”
“우혁 군도 9성이 눈앞에 있지 않나.”
하긴.
이우혁도 슬슬 고위 각성자 반열에 올라설 때가 되긴 했지.
부우우우웅!
그렇게 구덩이 주변을 살피며 간단한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대형 밴 몇 대가 구덩이 주변에 도착했다.
개량 한복을 입은 천혜 길드원들이 우르르 내렸다.
“다들 왔는가.”
“예!”
천혜 길드원들은 군대 제식 훈련을 받은 것처럼 정갈하게 도열해서 천상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럼 바로 들어가세나.”
천혜 길드원들을 쭉 둘러보던 천상길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파인 거대한 흙구덩이 겉면에는 폭 1미터 정도의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오진 일행은 천상길의 뒤를 따라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백여 미터 정도를 내려갔을 때쯤.
“느껴지는가?”
천상길이 오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딱히 주어는 없었지만, 오진은 그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과거 검은 기둥이 치솟아 올랐던 구덩이의 아래.
그 아래에서 불길한 마력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예.”
굳이 사냥개자리의 성흔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 아래에 극도로 불길한 뭔가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기가 바로 이 늙은이가 발견한 균열이라네.”
30미터 정도를 더 내려가자 1미터 정도 되는 작은 크기의 균열이 보였다.
일반적인 게이트와 달리, 칙칙한 검은 빛으로 일렁이고 있는 균열.
“뱀의 흔적이라는 게 뭐였습니까?”
“여기로 와보게.”
천상길이 검은 균열 주변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기괴한 문양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 중앙에 뱀의 문양을 한 손바닥만 한 크기의 패가 놓여 있었다.
‘이건.’
오진은 마법진 중앙에 놓인 뱀 문양의 패를 내려다보며 가늘게 눈을 떴다.
확실히.
천도윤과 소스케가 지니고 있던 패와 똑같은 패였다.
‘슬슬 베가를 불러볼까.’
이런 쪽으로는 베가의 기감이 더 뛰어나니까.
오진은 목에 건 은색 펜던트를 만졌다.
찬란한 은빛과 함께 베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여긴 어디느냐?]주변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마력들을 느낀 건지 베가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진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마경으로 통하는 균열이라….]베가는 불길한 마력이 피어오르는 검은 균열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이곳을 어떻게 찾았다고?]“뱀의 꼬리를 쫓다가 찾게 되었습니다. 아마 꽤나 오래전부터 이곳 아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니라.]베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균열이니라.]“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됐다고?”
[그러하느니라.]“어느 정도 된 건데?”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10일? 그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 같구나.]그럼 천상길 어르신은 이 균열이 만들어진 지 3일 만에 이걸 발견했다는 건가.
“…….”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뜨며 검은 균열 살폈다.
“상태는 어때?”
[으음. 굉장히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구나.]“마수나 다른 게 튀어나올 가능성도 없고?”
[절대, 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가능성은 낮겠구나. 보통 불안정한 상태의 균열에서 괴수들이 뛰쳐나오지 않더냐?]“그건 그렇지.”
산 프루투오소에서도 그랬지만.
기본적으로 괴수가 균열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균열의 상태가 불안정하거나 폭주하고 있을 때였다.
‘그럼 일단은 안전하다는 건가.’
오진은 검은 균열에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끝이 검은 균열에 닿은 순간.
그그그그긍!!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흙구덩이 안이 진동했다.
“뭐, 뭐야?”
“오진 씨!”
[나의 아이야!]경악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 하은과 다급히 오진을 부르는 베가와 이사벨라.
오진은 균열에서 빠르게 손을 떼며 다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카가가가가각!!!!
금이 간 유리창이 깨지듯, 고작 1미터 크기에 불과했던 검은 균열이 갑작스럽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5미터, 10미터, 30미터.
급속도로 팽창한 검은 균열이 흙구덩이 안에 들어온 사람들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빌어먹을!”
타앙!
검은 균열이 몸을 집어삼키는 와중에 오진은 재빠르게 와이어 슈터를 발사해 하은과 이사벨라의 몸을 와이어로 휘감았다.
어딘가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의식이 점멸했다.
흐려지는 의식 속.
-왔구나.
누군가.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전율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속삭이는 게 들렸다.
-기다리고 있었어.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챌 틈도 없이.
오진은 의식을 잃었다.
“으….”
그리고 눈을 뜬 그곳은.
마경(魔境)의 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