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1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14화
뱀의 머리 (7)
“…….”
오진은 표정을 굳힌 채 반으로 줄어든 균열을 지그시 바라봤다.
자신과 이사벨라.
둘 중 하나만이 이곳에 탈출할 수 있다면.
‘남은 한 사람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빠르게 날아드는 촉수 다발을 창으로 잘랐다.
촤악!
촉수의 단면에서 노란 고름이 뿜어져 나오며 바닥에 뿌려졌다.
메케한 연기를 내뿜으며 녹아내리는 대지.
“케르르르륵! 케레렉!”
오진은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어미 마수를 바라보며 창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죽일 수 있을까?’
자신과 이사벨라가 힘을 합친다면.
어쩌면 저 터무니 없는 마수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안 돼.”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지금 이사벨라와 자신이 최상의 컨디션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진 전투를 마친 직후였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쉽지 않았을 놈이야.’
베가의 말로는 성령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던가.
리아크가 지닌 터무니없는 힘을 생각하면 성좌의 영혼 일부를 이어받은 마수를 상대한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오진은 이사벨라 쪽을 돌아봤다.
이사벨라는 핏빛 낫을 사납게 휘두르며 오진 쪽으로 다가오는 촉수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만약 한 사람이 남아야 한다면.’
자신과 이사벨라, 둘 중 누가 남아야 할까.
“…….”
고민은 길지 않았다.
북극성의 성좌니, 뭐니 아무리 떠들어도 아직 8성에 불과한 자신과 이미 10성 중에서도 상위권의 힘을 지닌 이사벨라.
둘 중 누가 더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뻔하지 않은가?
“하아, 하아. 오진 씨! 빨리 균열로 안 들어가시고 뭐 하시는 거예요?”
쉼 없이 밀려들던 촉수가 그녀의 공격으로 잠시 주춤한 사이.
이사벨라가 다가와 오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음?”
이사벨라는 처음 봤을 때보다 절반 크기로 줄어든 검은 균열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조금 전에 베가에게 들었던 ‘균열의 기운이 위태롭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진 씨 설마… 이거.”
이사벨라는 왜 갑자기 균열의 크기가 반으로 줄어들었는지, 오진이 냉큼 균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는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
“…….”
오진과 이사벨라의 눈이 허공에 교차했다.
“미안, 이사벨라.”
오진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 말만큼은 죽어도 하기 싫었지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여기━ 남아 있어 줘.”
둘 중 누군가 하나가 반드시 남아야 한다면.
그건.
“아.”
이사벨라는 조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낮은 탄성을 흘렸다.
오진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구하러 돌아올 테니까.”
마경으로 통하는 균열은 이곳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사벨라 정도의 초월적인 힘을 지닌 각성자라면, 저 마수를 피해 도망쳐 몸을 숨기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으리라.
그녀가 시간만 벌어준다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해 이곳에 돌아오면 된다.
“데네브의 사도들과 전에 만났던 적이 있어.”
좋은 인연은 아니었지만.
베가가 직접 데네브에게 머리를 숙인다면 데네브의 성격상 낄낄 비웃으면서도 그녀를 도와주리라.
오진은 알렌 오스칼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숨 막히는 기운을 떠올렸다.
칠성 내에서도 강자에 꼽히는 그라면 저 검은 별의 성령도 상대할 수 있으리라.
“…그렇군요.”
이사벨라는 슬픈 눈으로 오진을 바라보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맞아요, 남는다면 제가 남는 게 맞죠.”
그 사실은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애초에 지금 당장만 해도 오진보다 그녀가 훨씬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쪽이 남는 게 합당하지 않은가.
“…미안.”
오진은 주먹을 움켜쥔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이사벨라는 그런 그를 달래듯 가볍게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다 이해하고 있는걸요?”
상냥하게 등을 쓰다듬는 손길.
“오진 씨에겐… 하은 언니가 있으니까요.”
“…….”
오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사벨라는 굳어 있는 그의 표정이 퍽 우습다는 듯 꺄르르 웃었다.
“홀로 남겨질 언니를 생각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잖아요?”
“…그건.”
“후훗. 오진 씨가 가장 소중히 생각하시는 게 언니란 건 알고 있답니다?”
아직은요, 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이사벨라.
“꼭… 구하러 올게.”
오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약 없는 약속만을 입에 담았다.
이사벨라는 애틋한 표정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의 모습을 보니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졌다.
적어도 이사벨라 콜그란데라는 존재가, 그에게 저 정도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는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는 의미일 테니까.
‘다행이야.’
이사벨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쿠구구구구구!
딛고 있는 땅이 흔들리는 감각과 함께 어미 마수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사벨라는 흉측하기 짝이 없게 생긴 어미 마수를 올려다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도망칠 수 있을까?’
오진의 바람대로.
홀로 남겨진 채 저 마수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쉽진 않을 것 같네.’
이미 앞선 전투에서 꽤 힘을 사용해 버렸다.
만전의 상태였다면 모르지만, 지금으로는 쉽게 마수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뭐, 저 혼자 도망치는 것 정도라면 어렵지 않아요.”
“…그래?”
“네. 오히려 오진 씨가 있으면 도망치는 데 방해가 될 거예요.”
이사벨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슈우우우욱!
그때, 한동안 잠잠했던 촉수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크읏!”
파지지지직!
오진이 다급히 창을 들어 사납게 달려드는 촉수들을 막았다.
죽은 새끼의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
마수는 집요할 정도로 오진만을 노리고 촉수를 쏘아 보내고 있었다.
‘이거라면 아까 오진 씨처럼 미끼를 자처할 수도 없겠어.’
이사벨라는 손에 쥔 핏빛 낫의 날에 손목을 가져다 댔다.
촤아아악!
동맥이 잘리며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하아.”
낮은 숨을 토해낸 이사벨라 주위로 핏빛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이사벨라?”
“균열 앞까지 제가 오진 씨를 보호할게요.”
촤아아악! 촤악!
이사벨라의 주위에 휘몰아치는 핏빛 폭풍들이 오진을 노리고 쏘아지는 촉수들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진의 팔을 잡아끌며 절반 크기로 줄어든 균열이 있는 곳으로 뛰었다.
“이사벨라 역시 내가….”
이사벨라에게 붙잡혀 뛰어가고 있던 오진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후훗. 그거 알아요, 오진 씨?”
이사벨라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아까 만약 오진 씨가 남겠다고 하셨다면, 제가 ‘명령’을 사용해서 억지로라도 보냈을 거란 거.”
“…….”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저라도 성령을 상대하는 건 무리지만, 도망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아요.”
이사벨라는 오진을 타이르듯 말하며 절반 크기로 줄어든 균열 앞에 도착했다.
균열이 가까워질수록 애써 잊고 있던 공포도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무거운 족쇄가 되어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괜찮아.’
다시 보지 못한다고 해도.
다시 만날 수 없다고 해도.
자신의 목숨으로 그를 살릴 수 있다면.
마음속에 새로이 품은, 아름답고 소중한 희망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 정도 공포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케르르륵! 케륵!”
쿠웅! 그그그긍! 쾅!
다시 한 번 지진이 일어난 듯 대지가 뒤흔들렸다.
처음엔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었던 어미 마수는 어느새 바퀴벌레처럼 기다란 다리를 움직여 바로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이사벨라는 균열 앞을 가로막듯 등 돌려 섰다.
“빨리 가세요, 오진 씨. 시간이 없어요.”
그녀의 몸 주위를 뒤덮고 있던 핏빛 폭풍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뜬 채 50cm 크기로 줄어든 검은 균열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검은 균열과 등 돌린 이사벨라를 번갈아 보던 오진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좋아, 이 정도 거리면 충분하겠네.”
“오진 씨! 빨리 안 가시고 뭐 해요?”
촉수들을 막고 있던 이사벨라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을 때.
“으읍?!”
오진은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입술을 겹쳤다.
생각지도 못했던 키스에 이사벨라는 두 눈을 부릅뜨며 몸을 굳혔다.
그렇게 그녀의 몸에서 힘이 풀린 걸 확인한 오진은.
“흣차.”
끌어안은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잡아당겨 절반만 남은 균열 안으로 집어 던졌다.
“오, 오진 씨! 이게 무슨…!”
이사벨라의 몸이 검은 균열 속으로 사라지며 반쯤 남아 있던 균열이 완전히 닫혔다.
“거 참, 사람 피곤하게 하는 아가씨일세.”
오진은 피식 웃으며 완전히 닫힌 균열에서 등을 돌렸다.
‘누나한텐 좀 미안하게 됐네.’
아직 입술에 남은 부드러운 감촉을 손으로 매만졌다.
하은이라는 연인을 두고 이사벨라에게 입을 맞춘 건 분명 잘못이었지만, 이사벨라에게 ‘명령’할 틈을 주지 않고 균열 속으로 억지로 집어넣으려면 이 방법 말고는 없었다.
‘돌아가면 또 잔소리 듣겠구만.’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케르르륵!”
“아따 새끼 진짜 생긴 거 적응 안 되네.”
어미 마수가 기괴한 괴성을 흘리며 관자놀이까지 찢어진 입을 크게 벌렸다.
입 안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진 노란 고름이 오진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아니 씹 진짜.”
오진은 욕지기를 흘리며 뇌흔 밟기를 통해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워낙 범위가 넓었던 탓일까.
쏟아지는 노란 고름 줄기 하나가 정통으로 오진을 덮쳤다.
“크읏!”
치이이익!
오진의 앞에 만들어진 세 개의 방패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손목에 찬 오랜지색 팔찌가 빛을 잃더니 툭 끊어졌다.
“제길.”
아끼던 건데.
오진은 바닥에 떨어진 팔찌를 내려다보며 눈을 찌푸렸다.
“케륵! 케르르륵!”
어미 마수는 사냥감을 완전히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지 찢어진 입가로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오진은 어미 마수를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과 이사벨라, 둘 중 누가 남아야 할까.
둘 중 누가 더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걸 뭘 고민까지 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자신이 남는 게 더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케르르륵! 케르륵!”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천천히 손을 들어 왼쪽 가슴 위에 얹는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문을 읊었다.
“나를 지나는 자━ 탄식의 정원으로.”
검은 먹구름이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