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16)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16화
뱀의 머리 (9)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쿵! 쿵! 쿵!
바닥이 파일 정도로 거칠게 이마를 박으며 사죄를 반복하고 있는 여인.
오진은 살짝 눈을 찌푸린 정도로 이마를 바닥에 처박으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카시아를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뱀자리 여왕이 천마를 광적으로 따르고 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그녀는 진짜 자신을 천마라 착각하고 있단 말인가.
‘왜?’
전생의 자신이라면 몰라도.
지금 자신은 천마라는 거창한 칭호로 불릴만한 힘을 쌓은 것도,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사벨라에 따르면 천마는 검은 별의 성좌를 탄생시킨 초월적인 존재.
방금 전까지 검은 별의 영혼 일부를 이어받은 성령한테 뒤지기 직전까지 몰린 걸 그녀도 봤을 텐데 왜 그런 터무니없는 착각을 한단 말인가.
‘설마.’
오진은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얇은 피륙 안에 잠들어 있는 검은 하늘.
흑천을 보고 자신을 천마라고 착각한 걸까.
‘아니 말이 안 되는데 그건.’
만약 흑천 때문에 자신을 천마라고 착각했다면.
검은 별을 탄생시켰던 ‘천마’라는 존재가 자신과 같이 흑천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럼… 흑천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오진은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을 이어가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자신이 지닌 흑천이 사실 반쪽짜리였고, 나머지 반이 천마에게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자신이 천마의 화신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혹시 전생에서 세계를 멸망시킨 게 자신이 아닌, 진짜 천마였던 게 아닐까.
‘아니야.’
오진은 고개를 저었다.
어떤 추측을 하더라도 지금 단계에서는 아무런 근거조차 없은 막무가내 추론에 불과했다.
‘생각하지 마.’
오히려 이런 경우, 근거 없는 추론을 늘어놓다 보면 가장 ‘그럴싸한’ 추론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믿어버리게 되는 법이다.
제대로 된 논리조차 없는 추론이 어느새 확신으로 변하고, 그 안에 스스로 갇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살면서 이제까지 숱하게 봐온 일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오진의 시선이 머리를 조아린 채 납작 엎드린 카시아에게 향했다.
그녀는 오진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바닥에 쉼 없이 머리를 찧고 있었다.
‘어쨌든 날 천마라고 착각하고 있단 말이지.’
오진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예전에 처음 베가를 만났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머리를 들어라.”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리는 뱀자리 여왕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천마 님.”
망치로 못을 내려치듯 이마를 땅에 내려찍고 있던 카시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거칠게 머리를 박았음에도, 새하얀 이마에는 조금의 생채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아, 천마 니임….”
오진과 눈을 마주친 카시아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애정도, 충성도 아닌.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광적인 신앙.
그래.
그녀는 마치 ‘신’을 바라보는 듯한 경외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날 찾았지?”
“처음에 흔적을 발견한 건 부둣가였습니다.”
부둣가.
오진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리빙 아머.’
그녀가 만든 마수를 처치하는 과정에 흑천의 기운이 흘러나간 건가.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젠, 이젠 알았습니다.”
카시아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오진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 왔다.
“당신이야말로… 애타게 찾아 헤매던 천마 님이라는 걸.”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오진의 신발 등에 입을 맞췄다.
신발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오진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이런 씨버럴.’
베가 때와 상황 자체는 같았지만.
난이도가 좀 달랐다.
‘얘 정신이 좀 이상한 것 같아.’
정신 나간 년이라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어쨌든 이대로 가만히 있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색하고 불편했다.
오진은 신발 등에 입을 맞추고 있는 카시아를 내려다보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내 명령도 없이 함부로 입을 맞추는 거지?”
“아, 죄, 죄송합니다!”
카시아가 퍼뜩 머리를 들어 올리며 무릎 꿇은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극도로 불안한 표정으로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었다.
마치 군용 비밀서류를 실수로 세절기에 갈아버린 행정병과 같은 모습.
‘너, 너무 싸가지 없게 대했나?’
오진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불안 증세를 보이는 카시아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에야 천마 님, 천마 님 하면서 따르고 있지만.
실제 그녀보다 자신이 몇 배는 더 약하다는 걸 카시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뭐라도 해야 해.’
오진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해제하는 듯한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예, 예!”
카시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녀린 체형에 비해 키는 그리 작지 않았다.
오진은 카시아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흐읏!”
뺨이라도 때리려는 줄 알았던 건가. 카시아가 질끈 눈을 감았다.
오진은 그런 그녀의 이마에 붙은 흙먼지들을 손으로 털어냈다.
“…아.”
“가만히.”
이마에 붙은 흙먼지를 털어낸 오진이 그녀의 무릎에 묻은 흙까지 모두 털어냈다.
“아아… 처, 천마 님께서 이 미천한 종의 몸을….”
감격한 표정으로 부르르 몸을 떠는 카시아.
그녀는 곧장 무릎을 꿇더니 다시 이마를 쿵! 땅에 내려찍었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아니.
방금 털었는데 뭐 하는 거야 얘는.
“…일어나라.”
“예!”
카시아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쪽을 바라봤다.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
오진은 이번에는 흙먼지를 털어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우리의 목적이 뭔지 잊지 않았겠지?”
“아아, 물론입니다 천마 님.”
그러세요?
전 모르는데.
“말해보거라.”
“저 밤하늘 위에 오만하게 떠 있는 모든 별을 집어삼키고 검은 하늘로 만드는 것. 그게… 천마 님의 원대한 계획이십니다.”
그랬구나.
처음 알았네.
‘아니, 처음 안 건 아니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대체 뭔 개소리를 그렇게 장황하게 말하나 싶었는데.
이제야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성좌를 모조리 잡아먹겠다는 뜻이었구만.’
천마가 진짜 자신과 같은 흑천을 지니고 있다면 저런 목표를 세운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성좌의 영혼 일부를 흡수했을 때 느꼈던 쾌락과 전율은 이제까지 오진이 겪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격렬했으니까.
‘즉, 천마의 목표는 흑성회를 이용해 성좌를 모조리 먹어 치우겠다는 건가.’
오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거창한 목표를 가진 것 치고 이제까지 상대했던 흑성회 파벌 중에서 성좌와 싸우겠다고 나서는 놈들을 본 적이 없었다.
‘성좌와 싸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흑성회를 만든 천마의 목표가 성좌와 싸우는 거라면 지금처럼 파벌마다 제각각 찢어져 서로 다른 목적과 행동을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오진은 카시아를 돌아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목적을 잘 알고 있는 것 치고는 정작 행동은 보이지 않더군.”
“그, 그건…!”
“말뿐인 충성이었나?”
“아, 아닙니다!”
카시아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천마 님께서 자리를 비우시는 동안… 감히 천마 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어떤 자는 불경하게도 자신을 천마라 칭하고 다니기까지 했죠.”
후안 수코타이를 말하는 건가.
“분열된 파벌을 다시 올바른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천마 님의 뜻을 거스르려는 자들을 제 손으로 처단했습니다.”
카시아는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눈을 빛냈다.
“물론 아직 전부 끝난 것은 아닙니다. 고양이랑 파리도 그렇고… 아, 거머리도 아직이었네요.”
섬뜩하게 미소 지으며 짙은 살기를 피어올렸다.
“걱정 마세요, 나의 신이시여. 조만간 천마 님의 뜻을 잊은 불경한 자들의 목을 천마 님에게 바치겠나이다.”
“잠깐.”
멈춰 이 정신 나간 여자야.
“거머리는 빼라.”
“…예?”
“그 아이는 지금 내 곁에서 날 보좌하고 있다.”
“아.”
카시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랬습니까?”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어쨌든 이제 상황을 좀 알 것 같네.’
그러니까 천마라는 놈이 일단 흑성회를 만들긴 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홀연히 사라져 지금의 흑성회가 되었단 뜻이리라.
‘결국 뱀자리 여왕도 천마의 행방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얘기군.’
알았다면 자신을 천마로 착각할 일도 없었겠지.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이사벨라처럼 카시아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천마 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카시아는 오진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영 마음에 들어 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일단 천마의 명령이라면 구구절절 따지지 않고 따르는 모양.
‘잘만하면 진짜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겠어.’
물론 자신을 천마라고 부르는 것과 흑천의 존재에 대해서는 숨겨야겠지만.
이 정도로 광적인 충성을 보낼 정도라면 잘 이용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자리 여왕을 끌어들이기만 한다면.’
오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성좌의 영혼 일부를 이어받은 성령을 짧은 말 한마디로 죽음으로 몰고 갔던 카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를 손에 넣게 된다면.
흑성회는 물론 진짜 ‘천마’의 위협에서조차 큰 힘이 될 것이다.
‘지금이야 나사 한두 개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사실 그런 걸로 치면 이사벨라와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알고 보면 카시아도 이사벨라처럼 착한 성정을 지녔을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할 수 있다면.
늦기 전에 바꿀 수만 있다면.
카시아도 이사벨라처럼━
“아 참, 그러고 보니 천마 님을 위한 선물이 하나 있사옵니다!”
“선물이라고?”
“예!”
시무룩해져 있던 카시아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옆으로 손을 뻗자 길게 늘어진 그림자 안에서 녹색 뱀이 기어 나왔다.
그림자 밖으로 빠져나온 뱀은 무언가를 입에 문 채 그녀가 옆으로 내민 손 위에 ‘선물’을 내려놨다.
“후훗. 미천한 종이 준비한 선물이옵니다.”
카시아는 오진을 향해 두 손으로 공손히 들어 올린 선물을 내밀었다.
“…….”
‘선물’을 확인한 오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서 드셔보세요 천마 님.”
카시아는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뱀처럼 기다란 혀를 낼름 내밀었다.
뚝, 뚝.
가녀린 손가락 사이로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탐랑성의 심장이옵니다.”
두근, 두근.
손 위에서 맥동하고 있는 심장을 오진을 향해 내밀며 그녀는 꺄르륵 웃었다.
오진은 카시아의 손 위에 올려진 심장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잘하면 이사벨라처럼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고?’
자기 자신을 향한 차가운 조소.
‘이건 늦었어.’
이사벨라와는 다르다.
뱀자리 여왕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