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21)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21화
막간-재회 (3)
“이, 이런 미친! 뭐야 저게?”
하은이 새하얀 설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밀려드는 마수들을 바라보며 거친 욕지기를 흘렸다.
전에 마경에 갇혔을 때 상대했던 마수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건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설마 최초의 균열 주위에 있는 마수들이 모조리 몰려온 거야?”
아무리 마경에 진입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놈들에게 걸렸다고 해도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군대로 비유하면 GOP 철책 하나가 떨어졌다고 40만 육군이 모조리 떨어진 철책 하나에 몰려드는 꼴이었다.
“저,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봐요.”
샤오린이 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마수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 넘기며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최초의 균열을 통해 마경을 오고 가는 게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고는 해도 절대 이 정도는 아니었다.
천권성을 비롯한 극소수의 각성자들처럼 아예 마경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매번 오갈 때마다 이런 마수 대군단을 마주한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만약 진입하려는 게 들킨다고 해도 주변 1~2백 미터 반경에 있는 마수 무리만 몰려든다고 했었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1, 2백 미터 정도가 아닌데?”
검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마수 무리는 1, 2백 미터는커녕 주변 수 킬로미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하은이 가늘게 눈을 뜨며 설원을 가득 채운 마수들을 바라봤다.
“우리한테 오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주변에 있는 마수들이야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고 있었지만.
저 멀리 균열 가까이에 있는 마수들은 이쪽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균열 앞에 줄지어 도열하기 시작했다.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마수 무리의 행렬.
왕의 행차를 기다리는 신하처럼 마수들은 머리를 낮게 조아린 채 바닥에 엎드렸다.
“…뭐 하는 거야 쟤네?”
하은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도열한 마수 무리를 바라봤다.
“설마, 뱀이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다고?”
그때, 옆에서 알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 뱀이 넘어오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은이 몰려오는 마수 무리를 향해 불덩어리를 던지며 알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전에 천권성 어르신에게 들은 적 있습니다. 최초의 균열 근처에 있는 마수들이 이렇게 한 곳에 모이는 경우는 ‘뱀’이 직접 마경 밖으로 나갈 때 말고는 없다고.”
“그럼 저기에 뱀자리 여왕이 있다고?”
“아뇨 그게….”
알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뱀자리 여왕은 지금 남미에 있다는 소식을 오늘 아침에 보고 들었습니다.”
“…남미에?”
“예. 파리자리 파벌이 꽉 쥐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러면 저건 뭐야 대체?”
뱀자리 여왕이 지금 남미 쪽에 있다면.
저 마수들은 누굴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모르겠습니다. 뱀자리 파벌에 대한 건 거의 정보가 없거든요.”
흑성회의 존재 자체가 세계적인 위협으로 인식된 지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쨌든 이대로 돌파하는 건 위험합니다. 나중에 다시….”
“안 돼요.”
이사벨라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에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상처 입은 오진이 가는 숨을 내뱉으며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 그러시다면 저 혼자서라도 갈게요.”
“…….”
알렌은 낫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앞으로 걸어가는 이사벨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타협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듯.
마수 무리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거침없었다.
“하아.”
짧은 한숨을 내쉰 알렌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굳이 따라오실 필요는 없어요.”
“데네브의 부탁까지 받은 입장에서 두 분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소중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알렌은 씁쓸한 표정으로 검을 쥐었다.
과거를 회상하듯 허공을 헤매는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후회의 빛이 서려 있었다.
“…고마워요.”
이사벨라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알렌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드는 마수 두 마리를 가볍게 베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마수 숫자가 많다고 해도 균열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설원을 가득 채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마수들이 모여 있었지만.
지금 오진을 구출하기 위해 모인 파티는 마음만 먹으면 나라 한두 개 정도는 가볍게 지워버릴 수 있는 초인들이었다.
물이 아무리 가득 차 있다고 해서 바늘이 물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면 몰라도 뚫고 들어가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포위망이 좁혀지기 전에 빠르게 돌파해야 한다는 건데.”
“그거라면 나한테 맡겨.”
하은이 담뱃값에서 연초를 하나 꺼냈다.
“그러니까 저 새끼들한테 죽창 한 방 꽂고 시작해야 한다는 거잖아?”
“…의미는 비슷할 겁니다.”
“그럼 잠깐 시간 좀 벌어줘. 준비에 시간이 들거든.”
치이이익.
연초 끝이 붉게 타올랐다.
하은은 왼쪽 눈가에 찬 안대를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쓰으읍.”
천천히 호흡을 들이켜며 손가락 사이에 낀 연초를 응시했다.
떠올리는 것은 불의 이미지.
사납게 타오르며, 주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뜨거운 용의 숨결.
“읏…!”
왼쪽 눈알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아찔한 통증이 느껴졌다.
왼쪽 눈가를 뒤덮고 있던 흉측한 힘줄이 목덜미까지 번졌다.
‘할 수 있어.’
두근, 두근.
거칠게 맥동하는 왼쪽 심장 안.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용의 심장을 불러일으킨다.
사춘기 소년처럼 단단하게 몸을 웅크린 채 주변과의 소통을 차단하고 있던 용의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화르륵! 화륵!
하은의 몸 주변으로 거대한 불길이 치솟고 다시 그녀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용자리의 성좌, 엘타닌이여.”
성좌의 이름을 입에 담자 왼쪽 가슴에 새겨진 성흔이 밝게 타오르며 반응했다.
“뭐 어차피 처자고 있어서 들리지도 않겠지만.”
화르르르르륵!
성흔에서 빠져나온 아홉 마리의 화룡이 서로의 몸을 휘감더니 연초 끝에 뭉쳤다.
“일단 존나게 세고 강한 불꽃을 내려주소서.”
탁!
손가락 끝을 튕겨 연초를 날려 보냈다.
휘발유를 들이부은 땅에 꽁초를 던진 것처럼 순식간에 주변 전체가 화염 폭풍에 휩쓸렸다.
“뒤져 새끼들아.”
콰과과과과과과!!!
뒤엉킨 아홉 마리의 화룡이 입을 벌렸다.
용의 숨결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며 마수들을 휩쓸었다.
“…성흔의 주문이 저래도 되는 거야?”
샤오란은 벙진 표정으로 일직선으로 뻥 뚫린 마수들의 포위망을 바라봤다.
성흔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성좌의 이름을 주문처럼 사용하는 건 각성자들에게 있어서 흔한 일이지만, 저런 황당한 내용의 주문은 처음이었다.
“돌파하겠습니다!”
알렌이 발을 박차며 쏘아지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 으.”
강력한 브레스를 쏟아낸 하은이 용안을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한 번에 너무 많은 마력을 사용한 탓에 의식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업히세요 언니.”
이사벨라가 하은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등을 보였다.
“괘, 괜찮아 움직일 수 있….”
“뒤처지면 마수들에게 포위당할 거예요. 빨리!”
“으, 응.”
용안을 부여잡은 채 비틀거리던 하은이 이사벨라의 등에 업혔다.
이사벨라는 하은을 등에 업은 채 빠르게 달려 나가는 알렌의 뒤를 쫓았다.
‘오진 씨,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사벨라는 입술을 짓씹으며 발을 박찼다.
마경에서 있었던 격전 이후 다시 끔찍한 흡혈 충동에 시달리게 됐지만.
정신을 갉아먹는 흡혈 충동보다도.
목을 태우는 갈증보다도.
지금은 그의 따스한 온기가 사무칠 정도로 그리웠다.
‘제가… 제가 꼭.’
촤아악!
붉은 핏줄기가 달려드는 마수들의 몸을 갈랐다.
“이쪽으로!”
알렌은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수 무리 사이에서도 정확히 방향을 찾으며 검을 휘둘렀다.
콰드드드득!
새하얀 서리가 맺힌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달려드는 마수들의 몸이 얼음 조각이 되어 산산이 부서졌다.
“왼쪽에서 커다란 놈이 오고 있어요!”
샤오린의 외침을 들은 알렌이 고개를 돌렸다.
“쿠오오오오오!”
엄청난 기운을 내뿜는 마수 한 마리가 흉포한 괴성을 흘리며 빠르게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저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마수가 뿜어내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알렌은 검을 든 채 달려드는 마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기는 50여 미터 정도 될까.
뱀처럼 기다란 몸체를 뒤덮은 녹색 비늘, 불길하게 타오르는 네 쌍의 붉은 눈동자를 지닌 마수.
“…바실리스크.”
한 마리만 나타나도 웬만한 도시 하나를 무너트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괴수였다.
“흐읍!”
새하얀 서리가 맺힌 검을 쥔 알렌이 바실리스크를 향해 돌진했다.
“윽! 여기 마수 놈들이 너무 많아!”
오른편에서 밀려드는 마수를 막아내고 있던 샤오란이 눈을 찌푸리며 외쳤다.
바실리스크 정도는 아니지만 하나 같이 강력하기로 악명 높은 괴수들이 물 밀릴 듯 밀려들고 있었다.
“내려줘.”
이사벨라의 뒤에 업혀 있던 하은이 그녀의 등을 툭툭 쳤다.
“…하지만.”
“내가 업혀 있으면 제대로 못 싸우잖아?”
“…….”
이사벨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업고 있던 하은을 바닥에 내려줬다.
“오른쪽에서 오는 놈들은 제가 막을게요. 언니는 정면 쪽을 뚫어주세요.”
“알았어.”
왼쪽은 알렌과 샤오린.
오른쪽은 이사벨라와 샤오란이 막고 있는 상황.
마수 무리가 양쪽으로 나뉘어 도열해 있었기 때문에 균열이 있는 정면 쪽은 상대적으로 그 숫자가 적었다.
“케르르륵!”
“키에에에에에엑!”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마수들.
“저리 비켜 짜식들아!”
하은이 달려드는 마수의 머리통을 불로 지져버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오지나.’
점점 가까워지는 균열을 바라보며.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누나가 구하러 갈 테니까.’
제발, 제발, 제발.
“살아 있어 줘… 오지나.”
마경에 오진을 남겨두고 돌아온 후.
계속해서 참고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남들에겐 오진이라면 무사할 거라 자신 있게 말했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다시는 그와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어쩌면 다시는 못 만나는 게 아닐까.
어쩌면 다시는 그의 품에 안길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오지나, 오지나, 오지나아아아!”
하은은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검은 균열을 향해 달려갔다.
균열까지 남은 거리는 20여 미터.
두세 걸음만 걸으면, 그가 갇혀 있는 마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누나가 꼭! 너 구해줄 테니까!”
이제까지 참아왔던 감정이 폭발하며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제발, 살아만 있어 줘 오지나….”
그녀의 애달픈 목소리가 닿기라도 한 걸까.
검은 균열 속으로 뛰어들기 직전.
균열이 출렁이며 그 안에서 거대한 마수 한 마리가 걸어 나왔다.
독수리 머리에 사자의 몸, 뱀의 꼬리를 지닌 흉악한 괴수.
그리고.
“오, 오지나! 오지… 어?”
마수 등에 드러누운 채 직장 잃은 중년 백수처럼 느긋하게 감자칩을 처먹고 있는 오진의 모습을 발견한 하은의 표정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뭔데 씨발.”
저 새끼 왜 저렇게 있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