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2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22화
막간-재회 (4)
“흐아아아암.”
뽀삐의 등 위에 드러누워 있던 오진이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는 하품을 내뱉었다.
“슬슬 다 와 가나?”
오진은 뽀삐의 갈기를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마경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울창하게 자란 숲.
원래라면 햇빛이 없어 어두컴컴해야 했을 숲 내부는 주변을 떠다니는 반딧불처럼 빛을 뿜어내는 벌레들 덕분에 하나도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몽환적인 분위기 덕분에 꽤 풍경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해야 할까.
‘마경이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삭막한 곳은 아니네.’
며칠간 뽀삐의 등 위에 올라타며 봤던 마경의 내부는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원래 상상했던 건 무슨 구천지옥처럼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에 피와 살육만이 가득할 것 같은 세계였지만.
“…나름 마을이나 도시 같은 것도 있고 말이야.”
제대로 들어가 보지 못하고 멀찍이서 본 것뿐이지만.
놀랍게도 마경 내부에는 ‘문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돈된 마을과 도시가 존재했다.
‘그러고 보니 왕이라 불리는 존재들도 있다고 했던가.’
왕이 있다는 건 마수들 사이에 계급과 사회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 정도 지성이 있는 마수는 많이 못 봤는데.’
이제까지 만난 대부분의 마수는 원초적인 본능에 이끌려 움직이는 짐승에 가까웠다.
그런 마수들이 마을과 도시를 만들고 왕을 섬기며 국가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하긴… 지성이 있는 괴수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대표적으로 ‘네임드’라 불리며 종족 전체가 아닌, 괴수 하나에게 고유의 이름이 붙여진 괴수의 경우 대부분이 인간 이상의 지성을 지니고 있었다.
최근엔 움직임이 좀 뜸하긴 했지만, 흑성회가 나타나기 전 인류의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수많은 괴수 무리를 이끌고 다니는 네임드들이었다.
“…네임드라.”
오진의 목소리에 슬며시 노기가 섞였다.
천주룡 바르바토스.
하은의 눈을 앗아간 괴수도 네임드 중에 하나였다.
“크르르릉?”
뽀삐가 살기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오진을 바라봤다.
오진은 언제 살기를 뿜었냐는 듯 웃는 얼굴로 뽀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아, 저긴가?”
그렇게 뽀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숲을 가로지르던 도중.
저 멀리 거대한 검은 균열이 보였다.
직경 50k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균열.
‘최초의 균열과 이어진 곳이 여기였군.’
워낙 균열이 큰 탓에 균열이라기보단 검은 장막이 넓게 펼쳐진 것처럼 보였다.
“이제 집 돌아갈 시간이구만.”
오진은 뽀삐의 등에 벌러덩 드러누운 채 카시아가 준 감자칩 봉지를 뜯었다.
처음 마경에 홀로 남겨질 때까지만 치열한 생존 서바이벌 끝에야 탈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카시아 덕분에 비즈니스석을 타고 온 것처럼 편하게 올 수 있었다.
“…빨리 보고 싶네.”
하은과 이사벨라, 베가랑 리아크까지.
홀로 남고 나서야 그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크르르릉!”
오진의 중얼거림을 들은 걸까.
뽀삐가 낮은 울음을 흘리며 한층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덜컹덜컹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지만 초인적인 균형 감각을 지닌 오진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우우웅!
그렇게 검은 균열을 넘어 지구로 귀환한 오진의 눈앞에 보인 것은.
“키에에에에엑!”
“크르르륵!”
수천, 수만 마리에 달하는 마수들과 뒤엉켜 싸우고 있는 알렌과 이사벨라, 샤오린, 샤오란 자매의 모습.
그리고.
“오, 오지나! 오지… 어?”
다급히 자신을 부르고 있다가 흠칫 멈춰서는 하은의 모습까지.
“…어?”
뽀삐의 등 뒤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고 있던 오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야 이거.’
느긋하게 상황 파악을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X됐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
“크흑! 컥!”
오진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바로 뽀삐의 등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변형으로 상처를 만들고, 뇌전을 일으켜 내부 장기를 터트렸다.
“쿨럭!”
입 안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핏물.
“오, 오진 씨?!”
자신의 피 냄새를 맡은 건지 오른편에서 마수들과 싸우고 있던 이사벨라가 다급히 이쪽을 바라봤다.
“다, 다들 여기 어떻게…?”
오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이사벨라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아, 안 돼!”
바닥을 엉금엉금 기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뽀삐를 돌아봤다.
“다들 도망쳐!”
“오진 씨…?”
다가오던 이사벨라의 발걸음이 멈췄다.
[뽀삐야! 날 공격해!]이사벨라의 발걸음이 멈춘 짧은 틈을 타 오진은 염소자리의 성흔을 활성화했다.
‘소리’를 다루는 성흔의 힘으로 뽀삐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크르릉?”
갑자기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오진의 목소리에 뽀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빨리 날 공격하라고! 지금 당장!]“크르르르.”
뽀삐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굴러떨어진 오진을 커다란 앞발로 후려쳤다.
뻐억!
수십 미터 덩치에 달하는 마수의 앞발에 맞은 오진의 몸이 포탄처럼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오, 오진 씨!”
이사벨라가 경악한 표정으로 오진을 향해 달려왔다.
오진은 전신이 욱신거리는 와중에도 뽀삐를 향해 다음 명령을 지시했다.
[좋아, 거기서 더 움직이지 말고 멈춰. 이쪽을 노려보면서 머리를 들어 올려.]“크르르르르!”
뽀삐는 착실하게 오진의 지시를 따르며 머리를 들어 올린 자세로 바닥에 쓰러진 오진을 노려봤다.
“여기까지 도망치다니… 끈질긴 놈이구나.”
뽀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
당연하지만, 뽀삐가 직접 말하는 게 아닌 오진이 염소자리의 성흔을 사용해 만든 가짜 목소리였다.
[주변 사람들을 쭉 훑어보면서 콧방귀를 껴.]뽀삐는 마수 무리와 접전 중인 알렌과 샤오 자매, 이사벨라를 쭉 훑어보더니 거센 콧바람을 내뿜었다.
“크흥!”
[아니 시바 콧물까지 쏟을 정도로는 말고!]뽀삐가 앞발을 들어 흘러내린 콧물을 쓰윽 닦았다.
“…운이 좋은 놈이로군.”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네놈들이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기다란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이 세계는 검은 별의 이름 아래 새로운 질서를 찾을 것이니.”
우우우웅!
검은빛이 뽀삐의 몸을 휘감으며 불길하게 타올랐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탁하고 불길한 마력이 주변을 뒤덮었다.
“뱀의 하수인인가?”
이제 막 바실리스크의 목을 베어낸 알렌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뽀삐를 노려봤다.
뽀삐는 거칠게 눈을 찌푸리며 알렌을 노려보더니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인간.”
“…역시.”
알렌이 검자루를 움켜쥐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뱀이 마경 안의 마수들까지 현혹시켰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천권성에게 그 정보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리 그래도 마경 안에 서식하는 마수들에게까지 손을 댔을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그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네가… 오진 씨를 이렇게 만들었어?”
피를 토하며 쓰러진 오진을 감싸 안고 있던 이사벨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붉은 기운이 그녀의 몸을 휘감으며 주변을 뒤흔들었다.
“감히, 감히, 감히 오진 씨를…!”
이사벨라가 붉은 낫을 움켜쥐며 뽀삐를 향해 달려들려고 할 때.
“쿨럭! 쿨럭!”
오진이 다시금 피를 토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아…!”
이사벨라가 다급히 오진을 끌어안으며 품속에서 포션을 꺼냈다.
오진이 위급 상태일 것을 생각해 챙겨온 최상급 포션의 뚜껑을 딴 그녀가 오진의 입가에 포션을 흘려 넣었다.
“이사…벨, 라.”
“괘, 괜찮아요 오진 씨. 제가 왔으니까… 제가 오진 씨를 구하러 왔으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이사벨라의 뺨을 타고 뚝뚝 눈물이 흘러내렸다.
“흥.”
그 모습을 지켜보던 뽀삐가 싱겁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렸다.
[그대로 돌아가면 돼.]“크르릉….”
균열 속으로 들어가기 전.
뽀삐가 못내 서운하다는 듯 고개를 슬쩍 돌려 그르렁거렸다.
[괜찮아 뽀삐야.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크르르!”
뱀 꼬리를 살랑살랑 휘두른 뽀삐가 균열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죠.”
멀어지는 뽀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알렌이 혀를 차며 주변 마수들을 칼로 베어냈다.
뱀의 하수인이 돌아갔기 때문일까.
난폭하게 몰려들던 주변 마수들의 기세가 확 꺾이며 그 움직임이 굼떠졌다.
“제 등에 업히세요 오진 씨.”
“고마, 워.”
“…고맙긴요.”
이사벨라는 지난 며칠 사이 고생이 많았는지 몰라볼 정도로 핼쑥해진 오진의 뺨을 사냥하게 쓰다듬었다.
“저… 너무 무서웠어요.”
오진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시는 오진 씨를 보지 못하게 될까 봐, 만나지 못하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새하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턱 끝에 방울져 떨어졌다.
“살아 있어 주셔서… 고마워요 오진 씨.”
새벽 잎사귀에 맺힌 이슬처럼 떨어져 내리는 눈물이 오진의 이마를 적셨다.
“이제는… 놓지 않을 거예요.”
이사벨라는 오진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하며 나지막한 각오를 새겼다.
“…….”
그리고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하은은.
“저 새끼 또 지랄하네 저거.”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
오진이 지구로 무사 귀환한 후.
오진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콜그란데 가문에서 운영하는 병실에 맡겨졌다.
애초에 상처 자체도 별로 없었지만, 최고급 의료진에게 대대적인 케어를 받은 그는 금방 멀쩡하게 일어설 수 있었다.
“하암.”
무슨 호텔 방처럼 꾸며진 VIP 병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10시간을 내리잔 오진은 늘어진 하품과 함께 눈을 떴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병실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그래도 어떻게 잘 넘어갔네.’
처음에 하은과 눈이 마주쳤을 때까지만 해도 인생 망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하은을 제외하고는 그가 뽀삐의 등 위에 올라타 편하게 감자칩을 처먹고 있던 모습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간만에 쉬기도 푹 쉬었고.’
개천을 사용한 후유증 때문인가.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여 있던 터라 이사벨라가 준비해준 최고급 의료진의 케어가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이제 슬슬 할 일 해야지.”
병원 침실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철그럭.
“…어? 뭐야 이거.”
그제야 오진은 자신의 손목과 발목에 붉은 쇠사슬이 묶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힘을 줘 풀어내려고 해도 쉽사리 풀리지 않는 사슬.
“일어나셨나요?”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이사벨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전에 트렁크에서 꺼내 보여줬던 메이드복을 입은 채 침대에 묶인 오진을 향해 다가왔다.
“이사벨라. 이게 뭔….”
“제가 말씀드렸죠?”
이사벨라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상냥하게 오진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제는, 놓치지 않을 거라고.”
오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새빨간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