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3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34화
작은 것들을 위한 영웅 (4)
날카롭게 서린 칼날이 살점을 파고드는 듯한 냉기.
새하얀 입김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와 담배 연기처럼 흩어진다.
두근, 두근.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은 얼음 동굴 안에 심장 소리만이 사납게 귓가를 울렸다.
오진은 기절한 남궁휘를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남궁휘가 이런 꼴이 됐다는 건.’
이 동굴 안에 있는 ‘괴물’이 적어도 10성급의 괴수라는 의미.
물론 이제 막 10성 초입인 남궁휘는 이사벨라와 같은 진짜 10성 각성자와 비교하면 같은 10성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약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쉽게 당할 놈은 아냐.’
인성은 둘째 치더라도, 남궁휘는 칠성의 후보로 꼽힐 만한 실력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남궁휘가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압도됐다는 건, 그만큼 안에 있는 검은 등급의 괴수가 강력하다는 증거이리라.
“괜히 그런 말을 했던 게 아니라는 건가.”
담담한 표정으로 경고를 날리던 올리비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실소를 흘렸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
오진은 창을 움켜쥔 채 동굴 안쪽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얼음으로 이뤄진 기다란 통로가 끝나자 탁 트인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새어 나온 새하얀 빛줄기가 공동 내부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찬란히 쏟아지는 새하얀 빛줄기 아래.
검은색 목걸이를 찬 괴수가 우뚝 서 있었다.
전신을 뒤덮은 푸른 갑주.
투구 사이로 불길하게 타오르는 검붉은 눈동자와 허리춤에 찬 녹슨 검 한 자루.
덩치가 집채만 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 전신 갑주를 입고 서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인간과 흡사한 크기의 괴수.
아니, 괴수라기보다 ‘기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괴수였다.
‘리빙 아머?’
푸른 갑주를 보니 자연스럽게 그 이름이 떠올랐지만.
‘아냐.’
이내 오진은 고개를 저었다.
리빙 아머에게서 느껴졌던 유령 특유의 섬뜩하고 사이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뭔 괴수….’
오진이 눈을 찌푸리며 푸른 갑주의 기사를 엿보고 있을 때.
“…….”
천장에서 내리쬐는 빛줄기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던 푸른 갑주의 기사가 고개를 내렸다.
불길하게 타오르는 검붉은 눈동자가 얼음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오진을 응시했다.
그리고.
“……!”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고작해야 눈을 마주친 것에 불과했지만, 모조리 깨달을 수 있었다.
‘미, 친.’
딱딱딱. 이가 부딪힌다.
날카로운 칼날로 살점을 후벼 파는 듯한 한기가 몸을 엄습한다.
차갑다, 차갑다, 차갑다.
얼어붙을 정도로 시리다.
“뭐야…?”
오진은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
빤히 오진을 바라보던 푸른 기사는 허리춤에 찬 녹슨 검을 뽑아 들었다.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고, 살며시 자세를 낮춘 후.
카아아앙!
뒤편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튕겨냈다.
“크윽! 마, 말도 안 돼!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는데!”
반대편 얼음 기둥 뒤에서 녹색 잎사귀로 만들어진 독특한 활을 찬 한 금발의 청년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올란도 베일.
이번 칠성 의회에 참가한 궁수자리의 고위 각성자였다.
“흥! 이 멍청한 활쟁이 놈! 기습까지 하고도 못 맞춘 거냐?”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기둥 뒤에서 뛰쳐나오는 대머리 사내.
철권이라 불리는 황소자리의 고위 각성자, 제이슨 하디였다.
“닥치십쇼!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쐈는데 쳐 내는 거 보셨지 않습니까?”
“에잇! 이래서 처음부터 기습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했는데!”
제이슨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푸른 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철권이라는 칭호답게, 움켜쥔 주먹이 쇳덩이처럼 은색으로 변했다.
“죽엇!”
음속을 돌파한 주먹이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내며 휘둘러졌다.
녹슨 검을 쥔 채 무심하게 제이슨을 바라보고 있던 푸른 기사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쉬익.
요란한 굉음도, 거대한 힘의 충돌도 없었다.
풍선에 바람이 빠지는 듯한 희미한 소리.
“…어?”
제이슨의 눈이 부릅뜨였다.
손목부터 반듯이 잘려 나간 오른팔에서 콸콸 핏물이 쏟아졌다.
“뭐, 뭐야.”
믿을 수 없다는 듯 잘려 나간 손목의 단면을 내려다보는 제이슨.
철권이라 불리며 셀 수 없는 괴수들의 머리통을 박살 냈던 그의 주먹은 마치 썩은 쓰레기처럼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뭐, 뭐냐고 대체!”
팔이 잘려 나간 고통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공포가 더 크게 밀려왔다.
“이, 이딴 걸로….”
덜덜덜. 애처롭게 떨리는 두 다리를 진정시키며.
제이슨은 굳게 움켜쥔 왼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 철권을 꺾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괴물!”
황소자리 성흔이 찬란하게 빛을 뿜었다.
주먹에 맺힌 강력한 파동이 푸른 기사를 향해 해일처럼 쏟아졌다.
-쿠르르르릉! 콰앙!
파동이 덮치기 직전, 푸른 기사의 몸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던 푸른 기사가 제이슨의 코앞에 나타났다.
“허업!”
다급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는 제이슨의 배를 푸른 건틀릿이 후려쳤다.
뻐억!
물에 젖은 가죽을 몽둥이로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제이슨의 몸이 포탄처럼 뒤로 날아갔다.
“커헉!”
얼음벽에 처박힌 제이슨이 배를 움켜쥐며 바닥을 굴렀다.
“…….”
푸른 기사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크읏!”
저 멀리서 활을 조준하고 있던 올란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궁수자리의 성좌, 케이론이여! 그대의 사도에게 하늘을 꿰뚫을 화살을 내려주소서!”
잎사귀로 이뤄진 화살촉에서 찬란한 빛이 타올랐다.
신화 속, 별을 쏴서 떨어뜨렸다는 궁수처럼 올란도는 활시위를 놓았다.
콰과과과과과!
아찔한 굉음과 쏘아지는 화살.
화살의 궤적을 따라 빙하가 갈라지며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다.
“…….”
푸른 기사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번 공격은 막기 쉽지 않다는 걸 느낀 건지 검붉게 타오르는 두 눈이 한층 사납게 타올랐다.
녹슨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채 허리를 낮추는 푸른 기사.
앞발을 거칠게 내디디며 검을 발도했다.
촤아아아악!
새하얀 검기가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며 올란도의 화살을 반으로 갈랐다.
두 쪽으로 쪼개진 화살이 V자로 바닥을 파괴하며 지나갔다.
“허억, 허억, 허억! 미친….”
올란도는 가쁜 숨을 내쉬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의, 의회 자식들 대체 무슨 괴물을 풀어둔 거야?”
도망치려는 올란도를 향해 푸른 기사가 가볍게 발을 박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올란도의 앞에 나타난 푸른 기사가 올란도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헉! 컥!”
한 손으로 올란도를 들어 올린 푸른 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공동 입구 쪽에 있는 얼음 기둥.
오진이 숨어 있는 장소였다.
“…돌겠네.”
오진은 실소를 흘리며 푸른 기사를 바라봤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
올란도의 절규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었다.
‘의회 자식들 대체 무슨 괴물을 가져다 놓은 거야?’
검은 등급 괴수가 강력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건 그런 예상조차 아득히 뛰어넘는 강함이었다.
‘튀자.’
판단은 빨랐다.
만약 개천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정상적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괴수였다.
오진이 몸을 돌려 나가려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고 한 순간.
“여기에 검은 등급이 있다는 거지?”
“확실하다니깐!”
“공평하게 막타 친 사람이 포인트를 가져가는 거다?”
다섯 명의 후보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등급 괴수를 혼자 상대하긴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서로 파티를 짠 모양.
“어…?”
안의 상황을 본 그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팔이 잘린 채 쓰러져 있는 제이슨과 목이 붙잡힌 채 바동거리고 있는 올란도.
“뭐, 뭐야 이거?”
“저, 저거 제이슨이랑 올란도 아냐?”
“미친! 그 둘이 당했다고?!”
심지어 제이슨과 올란도를 제압한 것처럼 보인 푸른 기사에겐 조금의 상처조차 보이지 않았다.
“…….”
“…….”
공동 안에 내려앉은 싸늘한 침묵.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다섯 명의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몸을 돌렸다.
“튀, 튀어!!”
“절대 못 이겨 저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다섯 명의 후보들.
오진은 또한 그들을 따라 동굴 밖으로 도망쳤다.
‘따라온다.’
힐끔 고개를 돌려 뒤를 살핀 오진이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세상 무심한 듯 가만히 있던 푸른 기사가 뒤를 쫓고 있는 게 보였다.
“빌어먹을.”
오진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앞서 도망치고 있는 다섯 명의 후보들.
푸른 기사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잠깐 시간 좀 끌어달라고.’
앞서 도망치는 다섯 명의 후보들을 향해 와이어를 발사하려고 했을 때.
“허억, 허억! 마, 말도 안 돼! 왜, 왜 이런….”
언제 기절했다가 일어난 건지 동굴 입구 앞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남궁휘의 모습이 보였다.
“남궁휘? 저, 저거 남궁휘 맞지?”
“나, 남궁휘 각성자님! 저기 검은 등급 괴수가 있습니다!”
뒤늦게 동굴에 들어온 다섯 명의 후보들은 남궁휘가 이미 푸른 기사에게 얻어터지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환한 목소리로 외쳤다.
남궁휘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다섯 명의 후보들을 바라봤다.
“서, 설마 저 안의 괴물도…? 아, 아니, 그러면.”
“남궁휘 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남궁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후보자들.
남궁휘는 후보자들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 괴물은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 뒤에서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요!”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괴물의 목걸이는! 목걸이는 아직 있습니까?”
울부짖듯 외친다.
“예?”
“당연히 목걸이는 차고 있었죠.”
“여기 안에 있는 괴수들은 다 목걸이를 차고 있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남궁휘를 바라보는 후보자들.
남궁휘는 말없이 바닥에서 뭔가를 들어 올렸다.
고릴라처럼 생긴 괴수.
그 괴수의 목에는 있어야 할 게 존재하지 않았다.
“…목걸이가 왜.”
후보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벅, 저벅.
낮게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
동굴 안에서 걸어 나온 푸른 기사는 검붉은 눈동자로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쓰으으으으.”
깊게 숨을 들이쉬는 푸른 기사.
녹슨 검을 높게 들어 올린 푸른 기사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흐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섬뜩하게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
그 울음에 호응이라도 하듯, 설원 이곳저곳에서 괴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니, 아마 설원만이 아닐 것이다.
칠성 의회가 치러지는 던전.
던전 안에 있는 괴수들이 일제히 괴성을 내질렀다.
“쓰으으으.”
푸른 기사의 검붉은 눈동자가 사납게 타올랐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목에 걸린 검은색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콰직!
푸른 기사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산산이 박살 난 채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