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40)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40화
별의 세례 (2)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고 했던가.
세례를 기다리는 동안 집에서 하은과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일주일이 흘러가 버렸다.
“끄응.”
오진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옆에 누워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하은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지난 일주일은 이사벨라도 없고, 베가도 세례 준비로 바빴던 터라 하은과 둘만의 시간을 느긋이 보낼 수 있었다.
같이 영화도 보고, 쇼핑도 즐기며 알콩달콩 보냈던 시간.
고작 1, 2년 전만 하더라도 감히 꿈에도 꿔볼 수 없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
오진은 가라앉은 눈으로 하은을 내려다봤다.
언젠가.
이렇게 행복했던 기억도 다 잊어버리게 되는 걸까.
‘괜찮아.’
기억을 잃는 것보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게 몇 배는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지금처럼 추억은 새로 쌓아갈 수 있는 거니까.’
오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은의 뺨을 쓰다듬었다.
흐응.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린 그녀가 손에 뺨을 부비적거렸다.
“뭐, 그래도 개천은 안 쓰는 게 최고지.”
오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을 갈아입었다.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고 쓰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개천을 쓰는 건 지양할 생각이었다.
‘동정을 3번 떼긴 싫으니까 말이지.’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현관을 나섰다.
“봄인가.”
어느덧 겨울이 지나고 포근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이신혁과 함께 게이트에 들어가 흑천을 각성하는지 1년하고도 6개월 정도가 흐른 셈.
그 사이 그의 삶은 몰라볼 정도로 뒤바뀌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좋은 방향으로.
‘이젠 지켜야지.’
손에 쥔 것이 너무 많아졌다.
움켜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힘이 필요하리라.
“가볼까.”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 사이를 거닐며 오진은 성소로 향했다.
* * *
[왔구나.]성소에 들어가자마자 그를 마중 나와 있는 베가의 모습이 보였다.
“신전에 안 있고 왜?”
[후훗. 그대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느니라.]베가가 봄바람처럼 포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오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이런 어린아이 취급도 익숙해질만 하건만.
오진은 괜히 쑥스러운 느낌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부끄러운 게냐?]그런 오진의 모습에 베가는 배시시 웃으며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후후. 이리 오거라. 오랜만에 그대를 안아보고 싶구나.]양팔을 벌려 그를 품 안 가득 끌어안으려고 했을 때.
“아앗! 베가 언니 혼자 치사하게!”
명랑한 목소리가 들리며 분홍색 단발머리를 한 여인이 이쪽으로 도도도 달려왔다.
처녀자리의 성좌, 스피카.
베가가 봄바람처럼 포근한 분위기라면, 스피카는 한여름 태양처럼 밝고 쾌활한 분위기의 여신이었다.
“오랜만이야! 대리전 이후로 처음이네?”
스피카가 눈을 반짝이며 오진에게 다가왔다.
“헤헤. 그때 나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갑자기 팔을 확! 잡아 뜯어버리기까지 하고!”
재잘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응? 어, 언니? 표정이 왜 그래?”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스피카가 흠칫 몸을 떨었다.
베가가 뒤돌아선 터라 오진의 시선에선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벌벌 떨고 있는 스피카의 반응만 봐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전히 말이 많구나. 지나칠 정도로.]“아… 그, 미, 미안.”
순식간에 쭈그리가 된 스피카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베가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오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본녀를 따라오거라 세례에 참여하는 성좌들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느니라.]“응? 베가랑 데네브만 오는 게 아니었어?”
[으음. 세례에 참가해 그대를 보고 싶다고 한 성좌들이 너무 많아 조금 추려냈느니라.]“몇 명이나 세례에 참여하는데?”
[여섯 명이니라.]여섯이라.
많다고 하면 많고, 적다고 하면 적은 애매한 숫자였다.
“무슨 이유가 있는 거야?”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니라. 칠성이 일곱 개의 별을 뜻하는 게 아니더냐? 그래서 여섯 명의 성좌가 모여 축복을 내려줌으로써 그대를 일곱 번째 별로 인정한다, 뭐 이런 의미가 담긴 의식이니라.]“아하.”
오진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고로 이 여섯 명의 성좌가 누구냐에 따라서 축복의 효과도 강해진다구!”
옆에서 스피카가 촐싹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넌 베가 언니랑 데네브 그 꼬맹이까지 의식에 참여하니까 기대해도 좋을걸?”
“다른 분들은 누가 참여하십니까?”
“우선 나!”
스피카가 손가락을 자신을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
“나 이래 봬도 황도 12궁이거든? 축복의 효과는 꽤 달달~ 하게 들어갈 거야!”
성좌가 누구냐에 따라서 축복의 효과가 강해진다는 게 성좌의 격을 말하는 거였나.
그렇다면 북극성 중에서 두 명이나 참가하는 이번 의식은 확실히 기대할만 하리라.
“다른 분들은 누가 참가해주시는 겁니까?”
“히히. 그건 직접 만나서 설명해 줄게!”
스피카가 명랑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베가와 스피카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에는 세 명의 성좌들이 모여 있었다.
‘데네브는 아직인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오진은 모여 있는 세 명의 성좌를 향해 다가갔다.
“흐하하! 네놈이 그 유명한 뇌랑이군! 전에 대리전은 잘 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지닌 중년 사내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다가왔다.
붉은빛이 도는 피부에 머리 양쪽에 돋아난 뿔.
성좌라는 것을 모르고 봤다면 성좌보다는 악마에 가까운 외모를 지닌 사내였다.
“난 황소자리의 성좌, 알데바란이다! 칠성에 꼽힌 걸 축하한다 인간!”
“권오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알데바란의 솥뚜껑만 한 손을 마주 잡으며 오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네가 우리 사도들이랑 좀 친분이 있는 것 같더군!”
“아, 한 부장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일본에도 한 명 더 있지 않나?”
사카키 료를 말한 건가.
“예. 그렇습니다.”
“흐흐. 그 두 놈은 나도 눈여겨보고 있는 사도들이니 앞으로도 잘 지내다오!”
“물론이죠.”
사카키 료하고는 요즘 연락이 뜸하지만, 한 부장과는 오늘 아침만 해도 세례를 잘 받고 오라고 짧게 통화를 나눈 참이었다.
“인사는 끝났나?”
알데바란의 뒤를 이어 다가온 건 무뚝뚝한 표정의 사내였다.
잘 벼린 칼날을 바라보는 듯 날카로운 분위기를 지닌 사내. 오른쪽 눈가를 가로 짓고 있는 기다란 검상이 묘한 카리스마를 만들어냈다.
“사자자리의 성좌, 레굴루스라 한다.”
사자자리의 성좌.
자연스럽게 얼마 전 봤던 남궁휘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최근 내 사도 중 하나와 마찰이 있었다고 들었다.”
“살짝 의견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오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이어가던 레굴루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성흔이란 것은 씨앗이다. 나무를 떠나 멀리 날아간 씨앗은 스스로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기 시작하지.”
“……?”
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레굴루스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자기 사도가 똥을 싼 건 자기도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야!”
“크윽! 다, 닥쳐라 스피카!”
레굴루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스피카를 돌아봤다.
스피카가 베에, 혀를 내밀며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남궁휘에 대한 일이라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성좌가 성흔을 내려준 각성자의 인성까지 챙겨줄 수 없다는 건 오진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도 자식의 실책에는 부모의 책임 또한 존재하는 법. 미안하구나.”
크흠. 레굴루스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사자자리의 각성자와 안 좋은 인연만 있었던 것도 아니거든요.”
“아아.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네 얘기를 하는 걸 몇 번 들은 적 있다.”
여기서 그 아이란 이우혁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이우혁… 그 아이는 더욱 높은 경지에 올라설 것이다.”
이우혁을 떠올리는 레굴루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사고만 치는 장남에 골머리를 썩이다가 서울대에 합격한 차남을 떠올리는 아버지의 모습이랄까.
‘사도를 자식처럼 여기는 건 성좌들 공통인가 보네.’
뭐, 그중에는 용자리의 성좌처럼 자기 사도들을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 성좌도 있긴 하지만.
“마지막은 난가?”
뒤편에 서 있던 여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발끝까지 오는 풍성한 금발을 지닌 여신.
베가보다는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남자라면 무심코 시선이 끌릴만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반가워. 난 양자리의 성좌, 아리스라고 해.”
아리스가 포근한 미소를 지은 채 오진에게 다가왔다.
고대 로마에서나 입었을 법한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 과감한 드레스 차림에 오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후훗. 어딜 보는 거니?”
아리스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훤히 드러난 가슴골을 슬며시 손으로 감췄다.
오진이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고 할 때.
“농담이야. 마음껏 봐도 좋단다? 아니면….”
아리스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오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만져 보고 싶니?”
탁!
아리스의 손등을 후려치는 베가.
[손 떼거라.]“어머, 가벼운 장난이에요. 그리 신경 쓰실 필요….”
[손, 떼라고 했느니라.]파지지지직!
베가의 몸 주변에 푸른 뇌전이 타올랐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눈동자에 섬뜩한 살기가 피어오르며 주변 대지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뒤흔들렸다.
“베, 베가 님?”
당황한 표정의 아리스가 재빠르게 오진에게서 떨어졌다.
베가가 오진을 팔을 잡아끌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스피카와 아리스를 노려봤다.
마치 암고양이 사이에서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캥거루와도 같은 모습.
“정말… 누가 누굴 보고 애라는 건지.”
그때.
한숨 섞인 목소리와 함께 온몸에 주렁주렁 값비싼 보화를 걸친 소년이 다가왔다.
[크흠. 데, 데네브 왔느냐.]“아니 뭐 평생 옆에 끼고 살게?”
[시끄럽구나.]베가가 새초롬한 눈으로 오진의 팔을 끌어안았다.
데네브는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품속에서 푸른 보석을 하나 꺼냈다.
“슬슬 갈 준비 하자고.”
[알겠느니라.]데네브가 중앙에 푸른 보석을 놓았다.
“이제 은하수의 샘이란 곳으로 가는 거야?”
[그렇느니라.]여섯 명의 성좌들이 중앙에 놓인 푸른 보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우웅!
강렬한 성흔의 마력이 보석에 집중되며 바람이 휘몰아쳤다.
형형색색의 오로라가 하늘을 뒤덮으며 균열이 만들어졌다.
오진은 은하수가 펼쳐진 밤하늘을 담은 듯한 아름다운 균열을 바라보며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여섯 명의 성좌가 힘을 합쳐야 열 수 있는 균열이라니.
“은하수의 샘이란 곳이 어디길래 이렇게 힘들게 가는 거야?”
[은하수의 샘이란 아득한 과거 최초의 성좌가 탄생한 장소이니라.]“최초의 성좌?”
최초의 성좌라면.
[그래.]베가는 균열 안에 무수하게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곰자리의 성좌, 폴라리스가 탄생한 곳이 바로 은하수의 샘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