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46)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46화
축하 파티 (2)
부우우웅.
거미줄처럼 빽빽하게 도로가 이어져 있는 서울 거리.
잿빛으로 가득한 도로 위에 할리우드에서나 볼 법한 고급스러운 리무진 한 대가 달리고 있었다.
“흐흐흐흥~♬”
절로 새어 나오는 콧노래.
수백억 원대를 호가하는 리무진의 고급 가죽 시트보다도 더한 포근함과 만족감이 그녀의 어깨를 들뜨게 했다.
“앗, 죄송합니다 아가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몸을 들썩인 탓일까.
옆에 앉아 화장을 도와주고 있던 시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엇나간 아이라인을 고쳤다.
“아니에요. 갑자기 움직여서 미안해요.”
방금 전까지 소풍 전날 초등학생처럼 들떠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이사벨라는 시녀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웬일로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요 몇 주간은 계속 컨디션이 나쁘셨는데.”
리무진을 운전하고 있는 노인, 로베르토가 슬쩍 뒷좌석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그야 미뤄뒀던 일들을 이제야 어느 정도 처리했으니까요.”
오진이 마경에서 가까스로 탈출했을 때.
이사벨라는 이제까지 잠시 손 놓고 있던 콜그란데 가문의 세력을 다시 키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위급 상황에서 오진 씨를 도와줄 세력이 필요해.’
오진은 뛰어난 실력을 지닌 것에 비해 따로 세력이라고 부를만한 게 없었다.
몸을 담고 있는 세력이 없으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위급 상황에서 든든하게 뒤를 받쳐줄 기반이 부족하다는 의미.
물론 협회가 있긴 했지만, 결국 협회도 국가 소속의 단체지 오진만을 위한 집단은 아니었다.
이사벨라는 자신이 직접 그의 팔다리가 되어 줄 세력을 만들기 위해 한동안 등한시했던 콜그란데 가문으로 돌아갔다.
* * *
천선성 데미안 살바토르에게 당해 뿔뿔이 흩어졌던 가문의 세력을 한곳에 모으는데 걸린 시간은 단 몇 주.
오진이 칠성 의회에 참가한다는 비보를 듣고도 연락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일에 집중한 성과였다.
“흐음. 과연 기분 좋으신 이유가 그것뿐이십니까?”
점잖은 노신사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지어졌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하하, 아닙니다. 문득 제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서요.”
“운전이나 집중해요, 로베르토.”
그때는 참 풋풋했죠, 로 시작하려는 로베르토의 기나긴 연애사를 단칼에 끊어낸 이사벨라.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들떠 있던 마음을 조금 진정시켰다.
“그나저나 아가씨.”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화장을 도와주고 있던 시녀, 멜리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이사벨라를 바라봤다.
연일 이어지는 격무 속에서도 이사벨라의 외모는 같은 여자가 바라봐도 순간 숨이 멈출 정도로 아름답고 고귀하기 그지없었지만.
“…정말 그런 복장으로 괜찮으시겠어요?”
고귀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옷.
요즘 시대에는 가문에 고용된 시녀들조차 잘 입지 않는 클래식한 타입의 메이드복이었다.
“후후. 전에 이 옷이 반응이 좋았거든요.”
이사벨라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느긋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여유에 가득 찬 표정으로 살짝 보이는 깊은 가슴골을 쓰다듬었다.
“오진 씨는 제게 아주 홀딱 빠져 있는 상태거든요. 충성스러운 애완동물에게 일종의 서비스? 비슷한 걸 해주는 거죠.”
“아하! 포상을 주시는 거였군요!”
“그렇죠. 복장은 이렇지만, 주종관계로 따지면 제가 주인에 더 가까운 입장이랄까요?”
으스대듯 콧대를 세우는 이사벨라.
사실 홀딱 빠져 있는 건 오진이 아닌 이사벨라 쪽이었지만.
부하들 앞에서 ‘여왕’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약간의 과장(?)을 섞어 말했다.
“역시 이사벨라 님이에요!”
멜리사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경외에 가득 찬 시선을 받으며 이사벨라의 콧대가 더욱 올라갔다.
“후훗. 알겠나요, 멜리사? 사랑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주도권이에요.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욱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나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도록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사랑에 있어서 주도권이라 부르는 거죠.”
“그럼 이사벨라 님이 입으신 메이드복도….”
“남자란 동물은 자신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착각’하는 걸 좋아하기 마련이죠. 실제로는 제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을 뿐이지만요.”
“와아.”
멜리사는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상대방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착각’하도록 만들 수 있는 복장 중에 메이드복만큼 적절한 복장이 없으리라.
“그럼 뇌랑은….”
“파군성.”
“예?”
“이제 뇌랑이 아니라 파군성이에요. 오진 씨가 칠성의 일원이 된 건 멜리사도 들었죠?”
이사벨라는 아파트 부녀회에서 몇 시간 동안 남편의 승진을 자랑하는 팔불출 아내처럼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오진 씨는 이번에 중국 최고의 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남궁가 출신의 풍신 남궁휘와 미국의 제이슨 하디, 신궁이라고 불리는 영국의 올란도 베일과 같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고 당당하게 칠성에 뽑혔다고요. 그것도 아직 고위 각성자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멜리사도 알고 있죠?”
“아… 예. 그, 그렇죠.”
“그리고 파군성이라는 칭호는 칠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각성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라는 소문도 있어요. 그만큼 오진 씨의 능력과 재능을 인정하는 성좌들이 많다는 의미죠.”
폭격기처럼 우다다 쏟아지는 남편 자랑(?)에 멜리사는 질린 표정으로 거리를 벌렸다.
“그나저나 파군성이….”
“멜리사?”
“예?”
“님, 자를 붙여야죠?”
예쁜 눈웃음 속에 숨겨진 섬뜩한 푸른 눈동자.
멜리사는 흠칫 몸을 떨며 둥지를 짓는 딱따구리처럼 머리를 끄덕였다.
이사벨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멜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 하려던 말은 뭐죠?”
“파군성 님은 그럼 이미 이사벨라 님과 연인 사이인 거죠?”
“…….”
순간 경직되는 이사벨라의 얼굴.
그녀는 머리를 쓸어내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무, 물론이죠. 서로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할까요? 뭐, 그것도 오진 씨 쪽에서 일방적으로 제게 애원하듯 부탁한 약속이지만요.”
최대한 여유를 가장한 채 말을 잇는다.
“얼마나 제게 빠졌는지 오진 씨 쪽에서 먼저 자신의 피를 빨아달라고 부탁해 왔을 정도라니까요?”
뭐, 오진 쪽에서 먼저 그녀에게 흡혈을 부탁한 건 사실이다.
“어머, 어머! 머, 먼저 피를 빨아 달라고까지 했다고요?”
거머리자리 각성자에게 있어서 흡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이사벨라와 같은 거머리자리의 성흔을 지닌 멜리사도 잘 알고 있었다.
“예. 심지어 영혼이 예속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요.”
후훗.
느긋하게 다리를 꼰 채 어깨를 으쓱이는 이사벨라.
멜리사는 그런 이사벨라를 선망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바라봤다.
“저도… 이사벨라 님처럼 남자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멋진 여자가 될 수 있을까요?”
“어머, 물론이죠. 멜리사는 아주 귀여운걸요?”
이사벨라는 방긋 미소 지으며 멜리사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어깨까지 기른 밤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순박한 시골 소녀 같은 외모를 지닌 멜리사는 그녀의 시녀들 중에서도 꽤나 예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귀여운 걸로는 이사벨라 님처럼 될 수 없는걸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토라진 표정을 짓는 멜리사.
이사벨라는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오진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보였다.
두근, 두근.
거칠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흡혈 충동과는 다른 충동이 머리를 뜨겁게 달궜다.
“하아.”
시속 80km로 달리고 있는 리무진이 느린 거북이처럼 답답하게 느껴질 무렵.
“도착했습니다.”
“수고했어요, 로베르토.”
달칵.
로베르토가 열어준 문을 열고 나온 이사벨라.
메이드복을 입은 눈부신 미녀가 고급스러운 리무진에서 내리자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됐다.
이사벨라는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곧바로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
“현관 앞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저 혼자 올라갈 테니 먼저 돌아가세요.”
“예, 아가씨. 근처 호텔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로베르토가 깊이 허리를 숙이며 다시 차로 돌아갔다.
이사벨라는 들뜬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현관 앞에선 이사벨라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깊게 심호흡했다.
“흠흠.”
잠시 목을 가다듬은 그녀는 손거울을 꺼내 화장을 체크했다.
‘완벽해.’
멜리사의 솜씨는 여전했다.
화장을 모두 체크한 이사벨라는 거울을 바라보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오진 씨.”
“왜 메이드복이냐고요? 후훗, 그야 당연히 제가 오진 씨의 전속 메이드니까요.”
“아니면… 주종관계만으로는 부족한가요?”
오진의 반응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복도 한복판에서 홀로 대사 연습을 하는 이사벨라.
멜리사가 본다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할 모습이었다.
‘좋아. 이대로만 가는 거야!’
이사벨라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투지를 불태웠다.
달칵.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연 그녀의 앞에 보인 것은.
“아니 왜에! 닳는 것도 아니잖아!”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이른 아침부터 서로 찰싹 달라붙은 채 애정을 과시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
물론 오진의 입장에서야 이게 어딜 봐서 애정을 과시하고 있는 거냐며 억울해할 수 있었지만, 어쨌건 이사벨라의 눈에는 헐벗은 차림의 두 사람이 염장을 지르고 있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
차갑게 식어가는 눈동자.
공기조차 얼어붙을 듯한 싸늘한 살기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지금 두 분… 뭐 하시는 거죠?”
“어….”
“그, 그게 말이지.”
굳어버린 두 사람.
이사벨라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누구는 오진과 만나고 싶은 것도 꾹 참고 그를 받쳐줄 세력을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는데.
하은은 그사이 오진과 알콩달콩 행복한 나날을 보냈단 말인가!
“치사해요, 언니…!”
이사벨라는 현관 앞에서 연습했던 대사도 까맣게 잊은 채 오진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하은을 붙잡아 끌었다.
“저도 오진 씨랑 같이 있고 싶었다고요!”
장난감을 뺏긴 어린아이처럼 빼액 소리치는 이사벨라.
거기엔 더 이상 남자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쥐락펴락하는 여왕님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 * *
“좀 진정됐어?”
잠깐의 실랑이가 끝난 후.
거실 소파에 쪼그려 앉은 채 토라진 표정을 짓고 있는 이사벨라에게 오진이 따듯한 커피를 내밀었다.
“…흥.”
이사벨라는 오진이 건네준 커피를 홀짝이며 가늘게 눈을 떴다.
“오진 씨는 제가 없는 동안 보고 싶지 않으셨던 모양이네요?”
“그럴 리가 없잖아.”
오진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처음 며칠은 하은과 간만에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한 주가 넘어가니 이사벨라의 빈자리가 그리워졌다.
‘뭔가 이러니까 어장 관리하는 쓰레기가 된 기분인데.’
사실 이사벨라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걸 알고 있음에도 밀어내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궁색한 변명을 하자면 이사벨라와 가까이 지내도 된다는 하은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것만은 아니지.’
오진은 씁쓸한 표정으로 손을 내려다봤다.
역시, 움켜쥔 게 너무 많았다. 지나칠 정도로.
“몰라요.”
이사벨라는 단단히 삐진 듯 고개를 획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발끝으로 괜히 거실 바닥을 긁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오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 제 생각해 주셨던 거 맞죠?”
“없으니 꽤 집이 적적하더라고.”
“후훗.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해주시니 기쁘네요.”
이사벨라의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단히 화가 나 있었는데 고작 말 몇 마디에 이렇게 행복한 기분이 들다니.
‘멜리사한테는 절대 말 못 하겠네요.’
이사벨라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짝!
우울했던 기분을 떨치기 위해 힘차게 손뼉을 친 그녀는 오진을 향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오진 씨!”
“응?”
“축하 파티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엉?”
웬 축하 파티?
“당연히 오진 씨가 칠성이 된 기념 파티죠!”
눈을 빛내는 이사벨라의 모습은 어딜 어떻게 봐도 남편의 승진 소식을 들은 주책바가지 새색시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