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56)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56화
천주룡 (8)
“…….”
오진은 애처롭게 두 다리를 떨고 있는 하은을 바라봤다.
굳게 다문 입술과 꽉 쥔 주먹, 창백해진 얼굴과 공포에 질린 눈빛.
‘내가 누나한테 너무 무리를 시켰던 건가.’
어쩌면 여기에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는 게 좋았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 정도로 바르바토스에 대해서 공포심을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누나라면 아무렇지 않아 할 줄 알았는데.’
그만큼 눈이 멀었을 때의 기억이 그녀에게 있어서 끔찍한 트라우마가 되었던 걸까.
아니, 단순히 그녀에 대해 넘겨짚듯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은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하은이라면 웃으며 떨쳐낼 수 있을 거라고.
근거 없는 믿음을 밀어붙이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미안.”
돌이켜보면 제멋대로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100프로 느낄 수 없다.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결국 고통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것이다.
그걸 ‘이 정도면 괜찮을 것’이라 판단하는 것 자체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응?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아니, 그냥. 누나가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몰랐었어.”
20년을 넘게 함께 있었음에도.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괜히 분하게 느껴졌다.
“모르면 좀 어때? 속살 좀 봤다고 속마음까지 다 알아야 하나.”
하은이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오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오진이 익히 알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녀의 미소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네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야. 사과할 필요 없어 짜샤.”
하은은 오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건 그녀의 문제다.
그녀만이 해결할 수 있고, 그녀만이 극복해야 할 문제다.
남에게 공감받고, 위로받는 순간 더 이상 이 문제를 극복하는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특히 그게 오진이라면 더더욱.
“하아, 알았어. 누나 혼자 상대해 봐.”
오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일단 여기선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위험해질 것 같으면 바로 끼어들 거야.”
트라우마를 극복하건 뭐건.
그녀의 목숨을 위험해 처하게 두기는 싫었다.
“응.”
하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호흡을 들이켰다.
떨리는 두 다리를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바르바토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싸늘하게 식은 목소리.
분노가 임계점을 넘으면 오히려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고 했던가.
바르바토스는 자신을 향해 홀로 다가오는 하은을 노려보며 사납게 이를 갈았다.
용으로서 태어나 이 정도의 굴욕을 맛본 적이 있던가.
이제껏 느꼈던 그 어떤 분노보다도 격렬한 분노가 타올랐다.
하긴.
기껏 ‘은총’을 받아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적들에게 시원한 복수극을 찍으려 했는데 여태 싸우지도 않은 채 구석에서 떨고 있던 여인이 뜬금없이 혼자 상대하겠다고 나선다면 바르바토스가 아닌 누구라도 분노에 휩싸였을 것이다.
“뭐 하는 짓이긴. 못 들었어? 너 정도는 나 혼자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하은은 여유를 가장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 연초를 꺼냈다.
정신 사납게 흔들리는 연초 끝.
어렵사리 불을 붙여 깊게 연기를 한 모금 폐에 담는다.
“후우.”
이제 딱히 니코틴도, 타르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초인의 신체를 가지게 되었지만.
몸에 밴 습관 때문일까.
불안에 떨리고 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감각을 느꼈다.
“자, 그럼 어디 한판 떠볼까?”
달칵.
씨익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왼쪽 눈가를 가리고 있는 안대를 풀었다.
흉측한 힘줄이 뿌리내린 눈가.
호박색으로 번들거리는 파충류의 눈동자가 바르바토스를 향했다.
[그 눈은…?]바르바토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하은의 눈을 바라봤다.
어찌 인간에게 용의 눈동자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의문에 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타올라라.”
하은은 태우고 있던 연초를 중지로 튕겼다.
화르르르륵!
연초 끝에서 사나운 불길이 타올라 살아 있는 생물처럼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휘몰아치는 열기.
용의 형태로 변한 화염이 바르바토스를 향해 쏘아졌다.
[흥! 고작 눈동자를 얻었다고 해서 진짜 용을 상대할 수 있다 생각하느냐!]바르바토스는 코웃음을 치며 거칠게 날개를 펄럭였다.
저주가 깃든 검은 장막이 그의 몸을 보호하듯 감쌌다.
-화륵, 화르르륵.
무생물조차 피해 갈 수 없는 저주.
사납게 타오르던 화염이 힘을 잃고 흩어졌다.
“이제 시작이야 짜샤!”
하은은 쉬지 않고 화염을 쏟아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원거리에서 화염을 쏘아내 장막을 뚫는 건 불가능.
그렇다면.
‘직접 뚫어야겠지.’
저주가 깃든 장막을 향해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긴다.
간신히 진정됐던 다리가 다시 떨리기 시작한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른다.
무섭다.
참기 어려울 만큼.
-누나, 괜찮아 누나?!
6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천주룡과의 싸움에서 의식을 잃은 후.
병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어?
세상은 온통 컴컴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채 허우적거리듯 팔을 움직였다.
-왜 그래 누나?
오진이 그녀의 손을 맞잡아줬지만.
그녀의 시야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지나… 이, 이상해. 아, 앞이 안 보여.
달 없는 밤처럼 어두운 세상.
그녀는 병실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홀로 집에 남겨진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오지니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겠지.’
비단 저주의 걸렸을 때만이 아니다.
그녀의 삶은 오진이라는 그늘 아래서야 싹을 틔울 수 있었다.
‘항상 그랬어.’
언제나 그녀의 앞에는 오진이 서 있었다.
세상의 지독한 악의를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그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녀의 앞을 지켰다.
그라고 무섭지 않았을까.
그라고 두렵지 않았을까.
답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오진이라는 그늘 뒤에 숨어 소라게처럼 몸을 웅크렸다.
그게 편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는 모든 걸 바쳐 자신을 지켜줬으니까.
“…지랄.”
까득.
하은은 이를 갈며 거칠게 입술을 짓씹었다.
언젠가 이사벨라가 그랬던가.
오진은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이라고.
이사벨라에게 있어 오진이 희망이었다면, 하은에게 있어 오진은 구원이었다.
겉으로는 온갖 센 척을 하며 허세를 떨었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보다 나약했던 자신을 지켜준 남자.
‘그래놓고 누나니, 뭐니.’
하은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원래라면 누나인 자신이 그를 지켜줘야 했지만.
역으로 그가 만들어준 그늘 아래 숨어 보호만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누나’로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서 있기를 바랐다.
“이제… 벗어나야지.”
언제까지 그의 뒤에 숨어 몸을 웅크리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적어도 그의 옆에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도록.
쏟아지는 삶의 풍파를 그와 나눠 맞을 수 있도록.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크르르르르! 이 건방진 계집이! 네년이 이 저주의 장막을 뚫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두려움으로 자리 잡은 존재를 향해.
“하아, 하아.”
한 걸음.
전신이 무거워지며 지독한 피로가 그녀를 덮쳤다.
두 걸음.
두통과 함께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세 걸음.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그녀를 덮쳤다.
네 걸음.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독처럼 퍼졌다.
다섯 걸음.
높은 산에 올라온 듯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여섯 걸음.
산성으로 이뤄진 늪에 몸을 담근 것처럼 피부가 녹아내렸다.
일곱 걸음.
귓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끔찍한 감촉과 함께 소름 돋는 비명이 고막을 두드렸다.
여덟 걸음.
사진으로만 본 적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증오 어린 욕설을 쏟아붓는 환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아홉 번째 걸음.
“…아.”
눈앞이 암전(暗轉)한다.
달이 없는 밤처럼 지독한 어둠이 그녀의 두 눈에서 빛을 앗아갔다.
[크흐흐흐! 오랜만에 맛보는 감각이지 않은가?]바르바토스는 발걸음을 멈춘 하은을 내려다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6년 전 과거.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그녀의 눈을 앗아갔을 때 느꼈던 짜릿한 희열이 다시금 그의 등골을 타고 퍼졌다.
“아으.”
하은은 지독한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눈을 잃고 난 후에 느꼈던 끔찍한 무력감과 절망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오지나… 오지나.”
본능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곳에 얌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그가 도와주러 올 것이다.
천주룡을 가볍게 무찌르고 그녀를 구해주겠지.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싫어.’
하은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결심하지 않았던가.
더 이상 그의 등 뒤에 숨어 지내지 않겠다고.
“쓰읍.”
깊게 호흡을 들이킨다.
왼쪽 눈가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륵!
전신이 불로 이뤄진 용이 그녀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총 아홉 마리의 용이 그녀의 몸 주위를 지키듯 둘러쌌다.
불꽃이 어둠을 밝힌다.
눈앞에 검은 비늘을 지닌 용이 보였다.
천주룡 바르바토스.
그녀에게 지독한 악몽을 선사해줬던 존재가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주를… 부, 불태웠다고?]바르바토스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하.”
실소가 흘러나왔다.
악몽 속에서 본 천주룡의 모습은 언제나 두렵기 짝이 없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한심하고 꼴사납기 그지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6년보다도 훨씬 더 전의 기억.
보육원에서 그녀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선사했던 원장에 대한 기억이었다.
어린 그녀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원장의 모습은 동화 속에 나오는 악귀나 괴물처럼 느껴졌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신적인 존재처럼.
하지만.
-부, 불이라고?!
오진이 그 악귀를 거짓말로 골탕 먹이는 모습을 봤을 때.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꼴사납게 도망치는 그의 모습을 봤을 때.
그녀는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야, 별거 아니었잖아.”
그래.
마치 지금처럼.
“흣차.”
열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왼쪽 가슴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바르바토스의 저주 때문에 느껴지는 통증은 아니었다.
각성자라면 오히려 기쁨에 찬 환호성을 내지르게 되는 통증.
열 번째 획(劃)이 용자리의 성흔 옆에 새겨졌다.
그리고.
-화르르르륵!
아홉 마리의 꼬리를 잇듯, 열 번째 화룡이 나타나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하은은 허공을 움켜쥐듯 거칠게 주먹을 쥐었다.
열 마리의 화룡이 그녀의 팔을 타고 움켜쥔 주먹에 뭉쳤다.
“타올라라.”
하은은 불꽃에 휩싸인 주먹을 힘껏 당기며 거칠게 발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