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57)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57화
천주룡 (9)
여명이 떠오른다, 고 바르바토스는 느꼈다.
밤하늘을 뒤덮은 검은 먹구름.
별빛조차 비치지 않는 캄캄한 어둠 너머에서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짙은 어둠을 밝히며.
찬란하고, 찬엄하게.
“뒤져 이 도마뱀 새끼야.”
태양처럼 타오르는 화염을 움켜쥔 하은이 높이 점프했다.
한계까지 뒤로 당긴 주먹이 포탄이 쏘아지듯 거칠게 휘둘러졌다.
[크윽!]바르바토스는 침음을 삼키며 코앞까지 다가온 하은을 노려봤다.
저주의 장막을 이토록 쉽게 돌파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쯤은 그분의 은총만 있으면…!’
이마에 돋은 뿔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 안에서 막대한 힘이 흘러나….
[…어?]흘러나오지 않았다.
통화 권외 지역에 들어간 것처럼, 갑작스럽게 ‘주인’과의 연결이 모조리 끊어졌다.
[어째, 서?]바르바토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저녁이 된 걸까.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며 그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으랏차아아아아앗!!”
화르르르륵!
힘찬 기합과 함께 불꽃이 응축된 하은의 주먹이 바르바토스의 턱주가리를 거칠게 올려쳤다.
[커허어어억!]“새끼 진짜 입에서 똥냄새 나네.”
하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바르바토스를 노려봤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노릇.
벌어진 천주룡의 입을 향해 주먹을 겨눴다.
“기술 이름은 어디 보자… 그래, 그게 좋겠다.”
이미지를 편하게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그 기술에 가장 걸맞은 이름이 필요했다.
짧은 고민 끝에 지어진 새로운 기술의 이름은.
“씹룡발광(十龍發光:열 마리의 용이 빛을 뿜는다).”
주먹에 응축되어 있던 열 마리의 화룡이 동시에 바르바토스의 입 안으로 쏘아졌다.
아무리 단단한 비늘을 지닌 용이라고 해도 내부 속살까지 단단할 수는 없는 노릇.
천주룡의 목을 타고 내부로 흘러 들어간 열 마리의 화룡이 몸 안에서 거친 폭발을 일으켰다.
쿠웅!
바르바토스는 끔찍한 괴성을 터트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벌어진 그의 입 안에서 메케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새어 나왔다.
“하아, 하아!”
바닥에 착지한 하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고, 죽겠다 진짜!”
하은은 땅바닥에 대(大)로 드러누웠다.
한 번에 너무 많은 마력을 끌어 쓴 탓인지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바닥에 누워있자 오진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수고했어 누나.”
오진이 드러누운 하은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히히. 봤냐?! 누나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다고 했잖아!”
“어, 응.”
근데 그 기술 이름은 좀 바꾸자.
씹룡발광이 뭐야 씹룡발광이.
“아, 그리고 누나 10성 됐다. 오지나! 봐봐 이거!”
하은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고 있는 폴라티를 쭈욱 끌어내렸다.
검은색 브래지어에 감싸인 새하얀 살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사벨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하은도 한 손으로 잡기 어려울 정도로 풍만한 볼륨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진은 기겁한 표정으로 그녀의 옷을 다시 끌어 올렸다.
“아니 이 미친 누나가 밖에서 뭐 하는 짓이야?!”
어째서일까.
성흔 옆에 새겨진 열 번째 획보다 그녀의 가슴골에 찍힌 작은 점 하나가 눈에 밟혔다.
검지 끝으로 가슴골의 점을 꾸욱 눌러보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녀와는 이미 볼 거 다 본 연인 사이니 굳이 참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베가와 이사벨라가 빤히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미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에이, 뭐 언제는 떡 주무르듯 신나게 주무르더니 인제 와서 부끄러워하냐?”
이 누나에게 정녕 수치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일단 옷 좀 제대로 입어.”
“히히. 그래, 나중에 눈 대신 손으로 확인하면 되지. 성흔 말고 다른 것두.”
가슴골의 점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게 들킨 걸까.
하은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찡긋 윙크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천주룡을 꺾어서인지 하은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들떠 있었다.
“…….”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뜬 채 쓰러진 바르바토스를 바라봤다.
분명 하은이 10성에 도달하며 한 번에 확 강해진 건 사실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허무하게 당했는데?’
하은이 저주의 장막을 막 돌파하고 바르바토스를 향해 점프한 순간.
바르바토스의 움직임이 순간 멈추며 당황한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크으… 쿨럭!]입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던 바르바토스가 힘겹게 기침했다.
“어, 뭐야? 저 자식 아직 살아 있었네?”
하은이 눈을 찌푸리며 다시 불꽃을 만들어냈다.
“잠깐만 누나.”
오진은 하은의 어깨를 붙잡으며 쓰러진 바르바토스에게 다가갔다.
놈을 마무리 짓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왜… 왜, 저를… 버리, 신 겁니까.]쓰러진 바르바토스가 절망에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버렸다고?’
지금 상황에서 그를 버릴 수 있는 존재는 그가 ‘주인’이라고 부르는 존재 외에는 없었다.
고개를 돌려 바르바토스의 이마를 살펴보니 이마에 돋아 있던 검은색 뿔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게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이유인가.’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바르바토스, 네가 ‘주인’이라는 놈의 정체는 뭐지?”
[아, 으으, 아아….]바르바토스는 대답 대신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오진은 충격에 빠진 바르바토스의 머리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이렇게 공황 상태에 빠진 상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고도의 화술이 필요했다.
“창뢰.”
[크아아아아아아아!]파지지지직!
부채꼴처럼 넓게 펼쳐진 푸른 뇌전이 바르바토스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거칠게 경련을 일으키며 펄떡펄떡 몸을 들썩이는 바르바토스.
“무서워할 필요 없어 바르바토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으니까.”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심문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극한의 긴장과 공황 상태에 놓인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
공감과 이해는 화술(話術)의 기본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그, 그만! 그마아아안!]오진의 진심이 통한 걸까.
이제까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바르바토스의 시선이 오진을 향했다.
역시.
대화에서 진심이 담긴 한마디 말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드디어… 이쪽을 돌아봐 주는구나.”
오진은 새하얗게 눈을 뒤집어 깐 채 거품을 부글부글 흘리고 있는 바르바토스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다시 보랏빛으로 돌아온 비늘 위를 스치는 손.
감촉이 간지러워서 그런가.
오진의 손이 스칠 때마다 바르바토스는 거칠게 몸을 뒤틀며 경련을 일으켰다.
[마, 말하겠다! 말할 테니 제발…!]“억지로 말할 필요 없어.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오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바르바토스의 표정을 보라.
그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저렇게 겁에 질려 있는데 억지로 대답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천마! 내게 은총을 내려주신 건 천마 님이시다!]“…뭐?”
바르바토스의 머리를 쓰다듬던 오진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천마라고?’
오진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 은총을 받은 거지?”
[그,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정확히 언제?”
[한 달 전쯤… 레어에 몸을 숨기고 동면에 들었던 내게 그분이 찾아오셨다.]네임드 몬스터들이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한 시간과 얼추 비슷했다.
“…….”
순간 카시아가 독단적으로 한 일이 아닌지 의문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녀는 지금 그의 명령을 듣고 파리자리 파벌을 처치하기 위해 남미로 향한 상태.
뜬금없이 천주룡에게 힘을 건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한 일이 아님에도, 천주룡에게 ‘천마의 은총’이 내려진 거라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뿐.
‘진짜 천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오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습기가 가득 찬 남미의 열대 우림.
얇은 안경을 낀 사내가 피가 흘러나오는 가슴을 움켜쥔 채 다급히 숲길을 달리고 있었다.
“읏!”
상처가 심한 탓일까.
그는 얼마 달리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하아, 하아!”
나무에 등을 기댄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스륵, 스륵.
그가 도망쳐온 길을 따라 뱀이 지나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포기하신 건가요?”
맑은 목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칠흑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
소녀처럼 가냘픈 몸을 지닌 여인이었지만,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외모는 ‘소녀’라는 표현을 쓰기엔 지나치게 고혹적이었다.
“…예, 아무래도 여기까진 것 같네요.”
안경을 쓴 사내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카시아를 올려다봤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왜… 당신이 저희를 습격한 거죠?”
“흐응.”
카시아는 뱀처럼 기다란 혓바닥을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천마 님께서 파리가 날아다니는 소리가 거슬리신다고 하셨거든요.”
“…하.”
사내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이제껏 쌓아둔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던 건가.
사내는 헛웃음을 흘리며 나무에 등을 기댔다.
“정말… 제 성흔처럼 파리 같은 목숨이군요. 당신들에게 있어서 저라는 존재는.”
“살고 싶은 가요 아델?”
카시아는 안경을 쓴 사내, 아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오진은 그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지만, 만약 그가 천마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한다면 당장은 살려둘 용의가 있었다.
“하하. 살고 싶냐, 라….”
아델은 실소를 흘리며 목에 건 펜던트를 매만졌다.
펜던트 안에 담긴 한 여인의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살고 싶냐, 가 아니죠.”
왼쪽 가슴에 새겨진 파리자리 성흔이 검은빛을 뿜었다.
“전, 살아야만 합니다. 반드시.”
사르륵, 사르르륵!
수풀이 흔들리며 사방에서 시끄러운 괴성이 울려 퍼졌다.
그워어어어어!
우거진 수풀을 뚫고 지독한 썩은 냄새를 풍기는 시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흐응… 그런 것 치고는 별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이시는데요?”
카시아는 몰려드는 시체들을 바라보며 흥이 식었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파리답게 밟아 죽여드리….”
뱀자리 성흔의 음산한 빛을 뿜으며 다가오는 벌레 무리를 향해 가볍게 손을 휘두르려 했을 때.
쿠르르르륵.
허공에 검은 균열이 생기며 그 사이로 검은 먹구름이 흘러나왔다.
밝은 태양이 내리쬐고 있던 하늘이 순식간에 깜깜한 밤처럼 어두워졌다.
“이건…?”
카시아와 아델 모두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갑작스럽게 나타난 검은 먹구름을 바라봤다.
쉴 새 없이 변화를 반복하는 어두컴컴한 먹구름.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며 불처럼 타오르는 먹구름 사이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구나.]아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카시아를 향해 다가가는 검은 먹구름.
“…천마?”
아델은 검은 먹구름을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렇다.]검은 먹구름이 고개를 끄덕이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당신이… 천마 님, 이라고요?”
카시아는 가늘게 눈을 뜬 채 검은 먹구름을 살폈다.
마치 정교하게 복제된 미술품을 감정하듯 샅샅이 먹구름을 살피던 그녀가 실소를 흘렸다.
“거짓말.”
어설프게 그의 모습을 따라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천마 님이 아니에요.”
카시아는 뱀처럼 세로로 찢어진 눈을 번들거리며 섬뜩한 살기를 피워 올렸다.
감히 천마의 이름을 사칭한 정체불명의 존재를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한 마리 뱀이 솟구쳐 오르며 검은 먹구름을 향해 쏘아졌다.
[으음…?]검은 먹구름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