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5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59화
데이트 (1)
다음 날.
오진은 잠실역 근처에서 이사벨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집에 사니 그냥 집에서부터 같이 나오면 간단했지만, 조금 더 데이트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는 이사벨라의 의견을 따라 일부러 따로 출발해 잠실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아.”
편의점에서 산 캔 커피를 손에 든 채 홀짝이고 있는 오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천마가 움직였을지도 모르는 이 심각한 상황에서 태평히 데이트를 즐기러 나온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하은이라는 연인이 있는 데도 다른 여자와 단둘이서 데이트를 하기 위해 멀뚱히 역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더 자괴감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리 누나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머릿속에서 복잡한 생각이 뒤엉켰다.
“아, 오진 씨. 기다리셨나요?”
하지만 복잡하게 뒤엉키던 생각들도, 고급스러운 리무진에서 내린 이사벨라의 모습을 본 순간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밤 갈색 목폴라 니트에 튤립 스커트, 그 아래에 쭉 뻗은 늘씬한 두 다리는 검은색 스타킹에 감싸 있었다.
왼쪽 팔에는 에르메스 백이 들려 있었고, 번쩍번쩍 화려하진 않지만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귀걸이와 목걸이가 은은한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시선이 가는 건 펑퍼짐한 니트를 입었음에도 굴곡이 확연히 보이는 배덕감 가득한 두 언덕.
아니, 언덕이라기보다 높게 솟은 산이라는 표현이….
“오진 씨?”
“아, 응. 미안.”
퍼뜩 정신을 차린 오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 나도 방금 도착했어.”
연인 사이에 으레 하는 겉치레가 아닌, 진짜 역에 도착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애초에 같은 집에 사니 따로 왔다고 해도 도착시간이 크게 차이 날 리 없겠지.
“헤헤. 다행이네요.”
이사벨라가 배시시 웃으며 오진의 팔을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녀가 다가오자 향긋한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향수 새로 산 거야?”
“후훗. 봄이니까요.”
그녀의 말마따나, 이제 막 벚꽃이 피기 시작한 봄철에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향 엄청 좋네.”
어디 브랜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향기는 화사한 백금발을 지닌 이사벨라에게 쏙 어울리는 향이었다.
“그, 그런가요?”
갑자기 에르메스 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어딘가 메시지를 보내는 이사벨라.
힐끔 보이는 내용으로 봐선 지금 바로 향수를 더 사두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아마 로베르토에게 보내는 메시지겠지.
‘죄송합니다 로베르토 어르신.’
실시간으로 그의 일거리를 늘려주는 것처럼 느껴져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갈까?”
“예, 오진 씨!”
문자를 다 보낸 이사벨라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진과 이사벨라가 데이트 장소로 정한 곳은 롯데월드.
서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봤을 법한 정석 그 자체의 데이트 장소였다.
“근데 진짜 여기로 괜찮겠어? 해외 쪽에 있는 놀이공원이 더 시설이 좋을 텐데.”
롯데월드도 놀이공원 중에서는 상당히 잘 만들어진 축에 속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해외 유명 놀이공원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물론 ‘해외’라는 장벽이 있긴 했지만 개인 전용기까지 가지고 있는 이사벨라에게 문제 될 건 아니었다.
“괜찮아요. 앞으로 쭉 한국에서 살 거면 이쪽 문화에 익숙해져야죠.”
앞으로 쭉, 이라.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오진은 복잡한 생각들을 지워내며 롯데월드 안으로 발을 디뎠다.
“와아.”
롯데월드 안에 들어온 이사벨라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판타지 동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인테리어.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놀이공원은 처음이라고 했던가?”
“예, 처음이에요.”
이사벨라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소풍 온 어린아이처럼 들뜬 그녀의 모습에 오진의 입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오진 씨는 오신 적 있나요?”
“예전에 한 번.”
보육원에 있던 시절 국가 지원 프로그램에 따라 와본 적이 있었다.
보여주기식 프로그램이니만큼 원장의 강요에 따라 억지웃음을 짓느라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옥 같았던 보육원 시절에서 몇 안 되는 즐거운 기억이었다.
“뭐부터 타볼래?”
“으음. 잠시만요.”
이사벨라가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 도토리 껍질을 까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미리 놀거리를 조사해 오기라도 한 걸까.
화면에는 롯데월드에 있는 놀이기구들의 종류와 특징에 대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아틀란티스! 이게 가장 인기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그거 타러 갈까?”
오진은 피식 웃으며 아틀란티스가 있는 외부로 향했다.
맑은 햇살과 함께 싱그러운 봄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저긴가 봐요 오진 씨!”
아틀란티스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예전이라면 1~2시간은 기본, 길면 3시간도 넘게 기다려야 하는 놀이기구였지만, 게이트가 열리고 대부분의 삶이 척박하게 바뀌면서 이용객이 많이 줄어들었다.
뭐, 척박하다고 해도 한국은 그나마 살기 좋은 나라에 속하다 보니 아직 놀이공원이 운영 중인 거지만.
“30분 정도 기다리면 탈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럼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간단하게 먹을 거라도 사 올게.”
“먹을 거요?”
“놀이공원에 오면 꼭 먹어줘야 하는 게 있거든.”
오진은 씩 웃으며 근처 가게에서 츄러스를 두 개 샀다.
설탕이 잔뜩 뿌려진 츄러스에서는 특유의 계피 향이 그윽하게 풍기고 있었다.
“이게 놀이공원에 오면 꼭 먹어줘야 하는 건가요?”
“응. 한번 먹어봐.”
이사벨라가 조심스럽게 츄러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맛있어요.”
“그치?”
“네. 커피랑 잘 어울릴 것 같은 디저트네요.”
츄러스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이사벨라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게 왜 놀이공원에 가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된 거예요?”
“어…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딱히 이유랄 게 있었던가…?
“으음. 그럼 이것도 한국 만의 문화 같은 거네요!”
이사벨라는 눈을 반짝이며 츄러스를 오구오구 먹었다.
그렇게 츄러스를 먹으며 기다리는 사이, 빠르게 줄이 줄어들었다.
쿠르르르릉!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롤러코스터.
놀이기구에 탄 사람들이 내지르는 환호성과 비명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여기 타면 되는 건가요?”
“응.”
오진과 이사벨라는 보트 앞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자아~ 곧 출발하겠습니다! 모두 안전바를 꽉 잡아주세요!”
안내원의 멘트와 함께 급발진을 시작한 보트.
1.5초 만에 시속 72㎞에 달하는 속도 쏘아진 보트가 빠르게 레일 위를 누볐다.
보트에 탄 사람들이 꺅꺅 비명을 지르는 와중.
“흐음.”
이사벨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안전바에서 손을 놓을 뿐이었다.
하긴.
그녀는 1.5초 만에 시속 72㎞는커녕 음속을 돌파할 정도로 빠르게 가속할 수 있는 초인.
이 정도 속도에 스릴을 느낄 리가 없었다.
“재미없지?”
“아, 아니에요. 엄청 재밌어요!”
데이트 자체가 재미없다는 말처럼 들린 걸까.
이사벨라가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이런 거 말고 다른 거 타러 가자.”
놀이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절규계 놀이기구는 이미 초인의 육체를 지닌 오진과 이사벨라에게는 딱히 흥미가 솟지 않는 놀이기구였다.
“제가 조사한 것들은 다 저거랑 비슷한 놀이기구였는데….”
“유령의 집은 어때? 그건 너무 유치한가?”
“유령의 집이요?”
이사벨라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유령의 집이라면 그거 아닌가.
일부러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한 후 귀신으로 분장한 알바생들이 튀어나오는.
한 번도 가본 적 없었지만, 대충 어떨지 예상이 갔다.
“네, 좋아요.”
이사벨라는 그래도 오진이 열심히 생각해 준 게 고맙다는 듯 유령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질 듯 울려 퍼지는 비명.
이사벨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오진의 팔을 부여잡았다.
“오, 오진 씨! 귀, 귀신, 귀신이이이인!”
그녀는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새하얀 소복을 입은 채 이쪽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오는 처녀 귀신을 가리켰다.
“…이사벨라?”
“빠, 빨리 가요 빨리!”
도저히 연기로는 보이지 않는 절절한 애원에 오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왜, 왜 웃으시는 거예요?!”
이사벨라는 버럭 소리치며 오진에게 찰싹 밀착했다.
뭉클.
밤 갈색 니트 너머로도 강한 존재감을 과시하던 두 봉우리가 오진을 압박했다.
“크흠.”
오진은 괜히 헛기침을 흘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꺄아아아악! 오, 오진 씨! 배, 뱀파이어! 뱀파이어예요!”
“아니.”
너도 흡혈귀잖….
“오진 씨이이이이!”
“으갸갸갸갸갹!”
뼈가 부러질 듯 거칠게 압박하는 팔 힘에 오진은 다급히 유령의 집을 빠져나왔다.
“허억, 허억!”
간신히 유령의 집을 빠져나온 후.
오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사벨라를 바라봤다.
밖으로 나왔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눈가에 맺힌 눈물을 쓱 닦아낸 이사벨라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으로 정리하며 말했다.
“벼, 별로 무섭지도 않네요.”
“…예?”
그게 무섭지 않은 사람 반응이었다고요?
“오, 오진 씨랑 스킨십을 하려고 조금 무서운 척을 한 건데, 까, 깜빡 속으셨죠?”
오진의 시선을 피한 채 저 멀리 응시하는 이사벨라.
오진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럼 한 번 더 들어갈래?”
“아, 안 돼요!”
이사벨라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푸흡, 하하하하하!”
겁에 질린 이사벨라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고한 여왕님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놀리지 마세요 오진 씨!”
“하하하! 미안, 미안.”
오진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린 이사벨라를 돌아봤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정신없이 놀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뭐 먹고 싶어?”
“음… 분식, 이라고 하나요? 그걸 먹고 싶어요!”
“분식?”
“네!”
확실히 한국 문화를 알고 싶어 했던 그녀에게 분식만 한 먹거리는 없을 것이다.
“여기 떡볶이집이 있던가?”
식당가를 찾은 오진은 주변에 분식집을 찾았다.
겉은 판타지풍 거리라고 해도 그 속은 여전히 한국이라는 걸까.
얼마 찾지 않아 떡볶이 체인점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엽기 떡볶이? 이름이 특이하네요.”
“나름 유명한 곳이야.”
오진과 이사벨라는 떡볶이집으로 들어갔다.
메뉴에는 순한 맛과 보통 맛, 매운맛을 고를 수 있는 옵션이 있었다.
“매운맛으로 먹을래요!”
메뉴판을 보던 이사벨라가 망설임 없이 매운맛을 골랐다.
“괜찮겠어? 여긴 보통 맛으로 해도 꽤 매울 텐데.”
“후훗. 매운 걸 즐겨 먹는 것도 한국의 문화잖아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이사벨라는 으스대듯 가슴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저 김치찌개나 제육볶음 같은 매운 음식도 잘 먹으니까요!”
“어… 응.”
그게… 매운 음식이었던가?
오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단 이사벨라의 주문 대로 매운맛을 시켰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볶이가 접시에 담겨 나왔다.
“와아! 이게 떡볶이라는 거군요!”
이사벨라는 눈을 반짝이며 포크로 떡볶이를 찍어 앙,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흐응? 생각보다 맵지 않….”
다, 라고 말하려는 순간.
“으으으읍! 으으으으으읍!”
이사벨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두 다리를 거칠게 파닥이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물컵을 향해 손을 뻗는 이사벨라.
“어, 잠깐 물을 마시면….”
매운 음식을 먹을 때 물을 마시면 괜찮아지는 건 그 순간.
오히려 더 격렬한 매운맛이 뒤따라오게 된다.
“으으으으으으으읍!”
벌컥벌컥 물을 들이마셨던 이사벨라가 눈물을 글썽이며 온몸을 뒤틀었다.
오진은 몸부림치는 그녀를 향해 쿨피스를 내밀었다.
“하아, 하아!”
쿨피스를 먹고 어느 정도 진정된 이사벨라가 파르르 몸을 떨며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하, 한국인들은 정도라는 걸 모르는 건가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지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