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6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62화
설원 (2)
“크윽, 악!”
분수처럼 쏟아지는 핏물.
붉게 달군 인두로 어깨를 지진 것처럼 뜨겁다.
독처럼 번진 고통이 이성을 갉아먹는다.
“흐읍!”
아찔한 통증을 억누르며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카시아의 팔을 폴딩 나이프로 내려찍었다.
카드드득!
가녀린 팔뚝을 내려찍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강한 반발력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그래도 어느 정도 공격은 통한 걸까.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팔의 힘이 순간 약해졌다.
-쿠웅!
거칠게 발을 굴러 카시아와 거리를 벌렸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슬링백에서 비상용 포션을 꺼내 어깻죽지 아래로 뜯겨나간 오른팔의 단면에 들이부었다.
“흐응. 거짓말쟁이답게 약삭빠른 움직임이시네요.”
카시아는 나이프에 찍힌 팔뚝에서 흐르는 피를 혓바닥으로 쓰윽 핥으며 손에 쥔 오진의 오른팔을 쓰레기처럼 바닥에 버렸다.
“언, 니…?”
그림자로 이뤄진 벽을 뚫고 있던 이사벨라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바닥에 나뒹구는 오진의 팔을 내려다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카시아를 노려보는 이사벨라.
그녀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피워 올랐다.
“응? 거짓말쟁이한테 벌을 주고 있을 뿐인데?”
“…….”
이사벨라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오진의 팔을 내려다보며, 벽을 뚫던 것을 멈추고 카시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감히….”
까득, 까드득.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깨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감히, 오진 씨의 팔을…!”
으득.
으깨진 손톱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린 붉은 핏방울이 붉은 낫의 형태로 바뀌었다.
빛을 잃은 동공이 카시아를 향했다.
“멈춰, 이사벨라!”
오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감히 오진의 몸에 상처를 입힌 년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무리 그게 10년을 애타게 찾아온 친언니라 해도.
이사벨라는 붉은 낫을 움켜쥐며 거칠게 발을 박찼다.
촤아아악!
바닥에 아로새겨지는 핏빛 길.
그 길을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인 이사벨라가 크게 낫을 휘둘렀다.
“언니한테 대드는 걸 보니 여전히 버릇이 나쁘구나.”
카시아는 차가운 조소를 흘리며 허공을 움켜쥐듯 주먹을 쥐었다.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와 손에 뭉쳤다.
그림자가 뭉쳐 만들어진 건 기다란 지팡이.
지팡이 끝에 똬리를 튼 두 마리 뱀의 입에는 에메랄드빛 방울이 달려있었다.
딸랑.
맑게 울려 퍼지는 방울 소리.
지팡이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퍼져나간 그림자가 이사벨라의 낫을 쳐냈다.
카가가가가각!
붉은 낫이 거칠게 튕겨 나가며 이사벨라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버릇이 나쁜 건 언니 쪽이야.”
이사벨라는 사납게 카시아를 노려보며 붉은 낫의 날에 손바닥을 그었다.
핏물이 솟구쳐 오르며 붉은 칼날들이 카시아를 향해 쏟아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도 그런 말을 지껄이는구나?”
카시아의 빛을 잃은 동공이 이사벨라를 향했다.
그녀의 이마에 박힌 보석이 음산한 검은 빛을 뿜어냈다.
손에 쥔 지팡이를 가볍게 허공에 휘둘렀다.
샤아아아아!
지팡이의 궤적을 따라 검은 뱀들이 솟구쳐 올라 거대한 방벽을 만들었다.
격돌하는 붉은 칼날과 뱀의 벽.
종잇장처럼 대지가 찢겨나가며 수십 미터 높이의 놀이기구가 먼지를 피워 올리며 쓰러졌다.
“흘러라.”
이사벨라는 낫에 베인 손바닥을 아래로 향했다.
방울져 떨어지는 핏물이 원형의 파동을 만들어내며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붉게 물든 대지에서 꽃이 피어났다.
줄기부터 잎사귀까지 새빨간 핏빛을 띠고 있는 수백 송이의 혈화(血花)가 이사벨라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마치 피로 이뤄진 정원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모습.
이사벨라는 피의 정원에서 천천히 낫을 들어 올렸다.
“헤에, 예쁜 꽃들이네.”
카시아는 흐드러지게 핀 혈화의 정원으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혈화 한 송이를 뽑아 들어 올리며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기억하니? 어렸을 때 네가 화관을 만들어줬던 거.”
드넓은 콜그란데 가문의 정원.
들꽃으로 만든 화관을 든 채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이사벨라와 휠체어에 앉아 포근한 눈으로 이사벨라를 바라보던 카시아.
이젠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소중한 추억들.
“…기억 안 나.”
사실, 기억하고 있다.
꿈에서도 잊지 못할 정도로 생생하게.
“어머? 그러니? 난 기억나는데. 후후, 그때 나한테 화관을 씌워주던 네 모습이 얼마나 역겨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속이 울렁거린다니깐?”
“…….”
이사벨라는 거칠게 입술을 짓씹었다.
지금 카시아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역겨… 웠다고?”
“후훗. 왜, 내가 좋아할 줄 알았니?”
카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마음 한편에 고이 간직해왔던 추억의 앨범이 날카롭게 파고든 비수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시끄러워.”
이사벨라는 사납게 눈을 뜨며 낫을 휘둘렀다.
주변에 피어난 수백 송이의 혈화가 동시에 터지며 무시무시한 폭발을 만들어냈다.
쿠르르르르릉!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뒤흔들리는 대지.
그녀는 한낱 인간의 몸으로 자연재해에 가까운 파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흐응. 예쁜 꽃인지 알았는데, 속은 너랑 비슷하구나?”
그 아득한 폭발 속에서도 카시아는 멀쩡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제 내 차례네?”
딸랑.
맑은 방울 소리와 함께 검은 뱀들이 이사벨라를 향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읏!”
수십, 수백, 수천.
숫자를 헤아리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아득한 숫자의 뱀들.
이사벨라는 낫을 거칠게 휘두르며 해일처럼 몰려드는 뱀들을 베었다.
그렇게 얼마가 흘렀을까.
“하아, 하아!”
이사벨라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붉은 낫을 지팡이 삼아 몸을 기댔다.
“벌써 지쳤니?”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거친 숨을 내쉬는 이사벨라에 비해 카시아의 상태는 처음 격돌할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주 조금 호흡이 가빠진 정도.
카시아가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가볍게 한 걸음 내딛자, 그녀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이사벨라의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 벨라한테도 벌을 줘야겠구나.”
“…언니.”
카시아의 눈동자가 섬뜩한 에메랄드빛으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지팡이를 쥔 손을 높이 들어 이사벨라를 향해 내리쳤다.
아니, 정확히는.
‘내려치려’고 했다.
“읏….”
스위치가 꺼진 기계장치처럼 우뚝 멈추는 카시아의 몸.
그녀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아, 으.”
손에서 놓친 지팡이가 맑은 방울 소리를 흘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카시아는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몸을 웅크렸다.
“멈, 춰… 아니, 멈추면 안, 돼….”
덜덜덜 몸을 떨며 중얼거리는 카시아.
머리를 움켜쥔 채 몸부림칠 때마다 이마에 박힌 보석이 검은빛을 뿌렸다.
“아, 으. 아.”
물고기가 튀어 오르듯 웅크렸던 몸을 핀 카시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그림자로 가려진 하늘은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칠흑으로 뒤덮여 있었다.
기억이 떠오른다.
오래된, 빛바랜.
다시는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들이.
-죄송합니다. 카시아 양의 병은… 현대 기술로는 치료할 수 없습니다.
사형선고처럼 떨어진 의사의 말.
정확한 병명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리부터 허리, 팔, 이윽고 전신의 근육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돌처럼 굳어가는 병이었다.
콜그란데 가문의 막대한 자금력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점차 굳어가기 시작하는 몸을 휠체어 위에 올려놓은 채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헤헤, 카시아 언니! 이것 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꽃으로 만든 왕관을 선물해주는 이사벨라.
마치 휠체어에 탄 자신을 약 올리듯 건강하게 뛰어노는 그녀를 바라보며, 얼마나 비참한 감정을 느꼈던가.
하지만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아닌 척.
그래야, 사랑하는 이들이 슬퍼하지 않을 거라 믿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 일어나 복도를 지나던 그녀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벨라까지 그랬으면 전 정말… 하아.
어딘가 안도한 듯한 어머니의 한숨 소리.
어머니의 말을 들은 순간, 그녀의 세상은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
그녀의 삶은, 카시아 콜그란데의 삶은.
‘그래도 다행’인 삶에 불과했던 것이다.
제비뽑기로 치면 ‘꽝’이 적힌 용지나 다름없다.
아무도 원하지 않고.
아무도 바라지 않는.
구겨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질 일만 남은 종이쪽지.
그날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다정했던 아버지도, 상냥했던 어머니도, 사랑스러웠던 여동생도.
자기 자신조차.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가문의 규율에 따라 머나먼 아이슬란드의 한 병원에 맡겨지게 됐다.
억울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가진 거라곤, 망가져 가는 비루한 몸뚱이뿐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가문에서 버려지게 된 그녀는, 마경으로 통하는 거대한 균열이 열리면서 한 번 더 버려지게 됐다.
괴수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상황에서 그녀를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힘겹게 휠체어를 끌고 나와 쓰러진 곳은 새하얀 설원.
몰아치는 눈보라와 끝없이 펼쳐진 눈밭 속에 그녀는 홀로 남겨졌다.
너무나 춥고.
베일 듯 시리고.
얼어붙을 듯 차가웠던 기억.
“아아.”
달 없는 밤처럼 어두운 하늘.
고개를 내린 카시아가 비틀비틀 몸을 휘청이며 지팡이 들어 올렸다.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해.”
기억한다.
되새긴다.
떠올린다.
바들바들 몸을 떨며, 애처롭게 눈물 흘리며.
다가올 죽음을 기다렸던 그날의 기억을.
깨지 않는 악몽을.
“…그래야.”
다시는.
버림받지 않을 수 있━
“천뢰!”
파자자자작!
하늘에서 떨어진 푸른 뇌전이 카시아의 몸을 관통했다.
카시아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주춤 뒷걸음질 쳤다.
타앙!
오진은 와이어로 이사벨라의 몸을 묶은 후 재빠르게 끌어당겼다.
“후우.”
아직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이사벨라를 남은 한쪽 팔로 끌어안았다.
“하아, 하아. 이제 괜찮아요 오진 씨.”
숨을 헐떡이고 있던 이사벨라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다시 붉은 낫을 만들어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시간을 끌 테니까, 그사이 오진 씨는 도망치세요. 아까 전에 그래도 제가 그림자 벽에 작은 틈을 만들어 놨어요.”
“아니.”
오진은 단칼에 그녀의 말을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
“같이 싸우는 게 그나마 나을 거야.”
“…….”
애초에 도망치고 싶어도 사방이 그림자에 뒤덮여 있어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틈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사벨라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남은 한쪽 팔을 들어 올리며 어떻게든 싸울 자세를 취하는 오진을 바라보던 이사벨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도망치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지막한 명령.
“크윽!”
오진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사벨라!”
“죄송해요, 오진 씨.”
이사벨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때 저도 같은 심정이었답니다?”
찡긋 윙크를 날리며 낫을 움켜쥐는 이사벨라.
그녀는 카시아를 향해 다시 한 번 발을 박차고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