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65)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65화
설원 (5)
“크윽.”
욱신거리는 머리.
전신을 뭉툭한 몽둥이로 내려치는 듯한 고통에 오진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여긴…?’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킨 오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새하얀 벽지와 텁텁한 약품 냄새.
꽤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까지 들어가 있는 VIP 병실이었다.
“그 뒤로….”
자신이 천마가 되어주겠다 선언한 이후.
카시아의 반응은 오진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면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먹혀들지 않았다면 헛소리하지 말라며 비웃을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카시아는 사과처럼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 하여간 거짓말쟁이 아니랄까 봐 아무 말이나 지껄이시네요! 다, 당신이 천마 님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날카롭게 소리친 그녀는 이내 질렸다는 듯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버렸다.
‘이게 잘 된 건지 아닌지를 모르겠네.’
처음 계획은 완벽하게 천마를 연기해서 그녀로 하여금 진짜 천마를 오히려 불신하도록 만들려고 했었는데.
그 계획은 ‘지나치게 상냥했다’라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들켜버리고 말았다.
‘뭐, 내 잘못이긴 하지.’
천마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와 맞지 않은 연기를 펼친 건 그의 실수가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오진은 머릿속에 흘러들어온 카시아의 기억들을 토대로 그녀가 품고 있는 트라우마를 보듬어주는 형태로 전략을 바꿨다.
간단하게 말하면.
쓰디쓴 진실 대신, 달콤한 거짓말을 그녀에게 들이민 것.
‘그게 잘 먹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카시아는 자신이 진짜 천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이제까지 해왔던 모든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점에서는 당연히 실패라고 볼 수 있었지만.
“하아.”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무리 달콤한 거짓말이라고 해도 너무 과하게 말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달콤한 것도 과하면 쓰게 느껴지게 마련이었으니까.
“…….”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새하얀 설원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봤을 때, 뭔가 터져 나올 듯한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때 누나랑…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천주룡의 저주에 의해 눈이 멀어버린 후.
병원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던 하은의 모습.
애처롭게 몸을 떠는 그 모습이, 마치 설원 속에 버려진 카시아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하은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하은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쯧.”
생각을 이어가던 오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뭐라고 그녀를 동정할 자격이 있겠는가.
‘뭐, 일단 뒤지지 않았으니까 그걸로 된 거지.’
이 뒤는 결국 카시아 본인의 결정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오진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날 있었던 일들을, 과거의 기억들을 되짚었다.
개천을 사용했을 때의 부작용.
기억의 상실이 무거운 짐처럼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이번에는 또 무슨 기억이 사라졌을까.
이번에는 또 어떤 추억을 잊어버렸을까.
‘누나랑 연인이었던 건… 기억나고.’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원래 과거 있었던 모든 일을 다 기억하는 게 아니다 보니 어떤 부분의 기억들이 사라진 건지 정확하게 알기 어려웠다.
그렇게 하은에 대한 기억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을 때.
-달칵.
병실 문이 열리며 이사벨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나요 오진 씨?”
이사벨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오진에게 다가갔다.
“아, 응. 일어났어.”
“아프신 곳은 있나요?”
“뭐… 아프다면 안 아픈 곳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긴 한데.”
“잠시만요. 의사를 불러서 진통제를 더 투약하라고 할게요.”
“아니, 괜찮아.”
고통을 견디는 것은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이사벨라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로 오진의 손을 쥐었다.
손에 닿는 보드라운 감촉에 전신을 난자하던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응. 그냥 간단한 근육통 정도야.”
단순한 근육통이라고는 할 수 없는 통증이었지만.
굳이 그 말을 해서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후우. 다행이네요.”
이사벨라는 안도에 찬 숨을 내쉬며 가볍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작은 동작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지닌 두 산봉우리가 요동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크흠. 괜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린 오진를 바라보며 이사벨라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오진 씨, 그때 언니랑 무슨 얘기를 하셨던 거예요?”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한가득이었다.
자신의 명령에는 어떻게 저항한 건지, 몸의 절반이 검은 먹구름으로 변한 건 어떻게 된 건지 등등.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의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건….”
오진은 말끝을 흐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카시아와 나눴던 얘기들을 대체 어떻게 바꿔야 ‘천마’라는 얘기를 쏙 빼놓고 그럴싸한 변명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거짓말에는 도가 튼 그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차분하게 오진의 대답을 기다리던 이사벨라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말씀해 주시기 어렵다면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미안.”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이사벨라의 마음에 착잡하게 달라붙었지만, 이렇게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진에게 억지로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오진 씨랑 얘기를 나눈 다음… 언니가 떠나기 전에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검은 먹구름의 벽이 사라진 후.
쓰러진 오진을 안아 든 채 걸어온 카시아는 이사벨라의 앞에 그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마에 박힌 검은 보석이 사라진 카시아는 어딘가 슬픈 표정으로 이사벨라를 지켜보더니 그림자와 함께 사라졌다.
“언니는 그럼 천마의 지배에서 완전히 풀려난 건가요?”
“그건 모르겠어.”
오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일단 지금 당장은 천마의 지배 속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천마의 입장에서도 뱀자리 여왕은 놓치고 싶지 않은 전력일 테니까.
“그리고 언니의 그 능력.”
그림자 뱀을 소환해 싸우던 카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거머리 여왕이라 불리며 흑성회의 집행관 중에서도 서열 3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그녀조차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졌을 정도로 카시아는 강력했다.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각성자가 이제까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남은 가능성은 하나.
“뱀자리 여왕이… 언니였군요.”
이사벨라는 자조 섞인 미소와 함께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흑성회에 몸을 담고 있었으면서도 뱀자리 여왕의 정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언니였다는 걸 몰랐다니.
자기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언니가 오진 씨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뱀자리 여왕을 만나셨던 건가요?”
“응. 전에 마경에 갇혔을 때 잠깐 본 적 있었어. 설마 이사벨라의 언니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말이야.”
그녀에게 실종된 언니가 있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름이라든지 외모에 대해서는 들은 적 없었기 때문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아직 완전히 의문이 풀린 건 아니었지만.
일단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조금은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하아. 상황이 이러니 하은 언니한테 그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겠네요.”
“응? 무슨 얘기?”
“흠흠. 그… 저희가 관람차 안에서 나눴던 얘기들이요.”
“…….”
순간.
오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까득, 이를 갈았다.
“오진 씨?”
“…….”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오진을 향해 이사벨라가 조심스럽게 다가갔지만, 그는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어? 아, 응. 아무것도 아냐. 미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는 오진.
“…….”
이사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째서일까.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젓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오진 씨.”
시선을 피하는 오진의 뺨을 붙잡아 돌렸다.
거짓말이 들통난 사기꾼처럼 불안에 떨리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날, 저희가 관람차 안에서 나눴던 얘기들. 기억하시죠?”
“…….”
병실 안에 내려앉은 짧은 침묵.
이사벨라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그의 뺨을 꼬집었다.
“왜, 오진 씨가 그러셨잖아요. 언제가 언니랑도 롯데월드에 가보고 싶으시다고. 그새 까먹으셨어요?”
“아, 응. 그랬지. 미안, 이제 막 일어나서 그런가, 정신이 없어서 까먹었네.”
“…….”
오진의 대답을 들은 순간,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던 이사벨라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갑작스럽게 변하는 그녀의 표정을 본 오진이 흠칫, 몸을 떨었다.
오진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런 얘기, 한 적 없는 거지?”
“…예.”
“하아.”
설마 이런 간단한 수법에 낚이다니.
자조 섞인 실소가 흘러나왔다.
“말씀해주세요, 오진 씨. 어떻게 된 일인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이사벨라가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래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보였다.
“그때… 내 몸이 먹구름으로 바뀐 거 봤지?”
“네.”
흑천에 관해서까지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오진은 일단 이 부분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흑천이 아니었으니까.
“약간 필살기… 라고 해야 하나. 그걸 사용하면 부작용으로 기억의 일부가 사라져버려.”
“기, 기억이 사라지신다고요?”
이사벨라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그런 위험한 기술을 왜…!”
“널 구해야 했으니까.”
“…….”
막힘 없는 그의 대답에 이사벨라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오진이 그때 와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이제까지 몇 번… 몇 번 그 기술을 쓰신 거죠?”
“2번… 아니, 3번 정도 썼어.”
이번까지 합치면 개천을 사용한 적은 네 번째였다.
“다른 기억들은 그럼….”
“사라지는 건 일부의 기억만이야. 이번에도… 데이트를 했던 것까진 기억나고.”
그리고 이사벨라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
이사벨라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기억상실’이라는 터무니없는 리스크가 있는 기술을 그가 써야만 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날카롭게 저몄다.
“누나한테는 말하지 말아줘.”
오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언니에 대한 기억도… 잃어버리신 적 있는 건가요?”
“…….”
오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와 연인 사이였었다는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 느꼈던 아찔한 절망이 다시금 떠올랐다.
눈을 감는다고 세상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두컴컴한 어둠이 드리워진 세계는 낯설고, 두렵기 그지없었으니까.
“어쨌든. 누나한테는 이번 일은 비밀로 해줘.”
“하지만.”
“부탁할게.”
“…예.”
이사벨라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때.
-끼익.
굳게 닫혀 있던 병실의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비치는 건,
“지금… 뭐라고 했어?”
잔뜩 일그러진 하은의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