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67)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67화
막간–아홉 번째 기억 (1)
뱀처럼 기다란 혓바닥이 날름거린다.
카시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킁킁 냄새를 맡았다.
오진의 몸에 짙게 묻은 낯선 여인의 체향.
“벨라의 냄새도 아니고….”
섬뜩한 살기가 번들거리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오진을 향했다.
뱀의 앞에선 개구리처럼 오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시아는 기다란 혓바닥으로 오진의 목덜미를 핥으며 가늘게 눈을 떴다.
“누구 냄새죠?”
“그건….”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서늘한 소름이 등골을 타고 퍼진다.
‘아니 자매가 쌍으로 왜 이러는 건데.’
가끔 이사벨라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섬뜩한 눈빛을 보낼 때가 있었지만, 카시아의 눈빛은 한층 더 위협적이었다.
“흐응. 뭐, 됐어요. 저한테 하셨던 말씀만 봐도 오진 씨가 어떤 남자인지는 잘 알 것 같으니까.”
사나운 눈길로 오진을 흘겨본 카시아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홱 돌렸다.
단단히 삐진 듯한 모습.
오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아까 전해주겠다는 물건은 뭐야?”
다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카시아는 노골적인 화제 전환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봤지만, 이내 가볍게 혀를 차며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금이 간 검은 보석 하나가 솟아올랐다.
“이건….”
“천마 님이 제 의식을 지배하셨을 때 쓰셨던 성유물이에요.”
“이걸 왜 나한테?”
“이 안에는 흑천의 힘이 깃들어 있거든요. 오진 씨가 지니고 계신 거랑 같은.”
“…….”
두 개의 흑천.
아직 어떻게 흑천이라는 규격 외의 힘이 두 개나 존재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천마가 지니고 있는 건 틀림없이 자신과 같은 흑천이었다.
“어째서 흑천이 두 개나 존재할 수 있는지, 오진 씨라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이걸 나한테 주는 거야?”
“네.”
이 박살 난 보석만으로 과연 그 이유를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굳이 받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카시아는 검은 보석은 오진에게 건네주며 가볍게 입술을 짓씹었다.
“조만간, 마경의 ‘왕’들이 움직일 거예요.”
“왕?”
“예.”
카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들어 네임드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신 건 알고 계시죠?”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천마가 존재한다는 것도.
“지금 흔히 ‘네임드’라 불리는 괴수들은 과거 마경에서 왕의 밑에 있던 수하들이 많아요. 지능적이고, 교활하며, 조직적이죠.”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거야?”
“예. 마경에도 ‘문명’이라는 게 존재하니까요.”
그러고 보니 뽀삐를 타고 마경 밖으로 향하고 있을 때, 거대한 성과 도시를 발견한 적 있었다.
“마경의 왕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시 10년 전과 같은 참사가 일어날지도 몰라요.”
“…….”
10년 전, 처음으로 마경으로 통하는 게이트가 열린 날.
수십 개의 국가가 무너지고, 억 단위의 사람이 학살당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참사.
천마는 다시 한번 그 끔찍한 지옥을 지구에 만들 생각이란 말인가.
‘흑성회 다음은 마경의 왕인가.’
오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카시아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제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몸 조심히 계세요 오진 씨. 아니… 천마 님.”
방긋 예쁜 미소를 지은 카시아가 오진에게 다가왔다.
쪽. 발돋움하며 살짝 뺨에 입을 맞췄다.
“…….”
뺨을 타고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
배시시 미소 짓는 카시아를 바라보며 왜 두꺼비자리의 왕이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 목숨을 걸고 천마 행세를 하고 다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스르르륵.
뱀이 땅을 기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카시아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병원 옥상에는 씁쓸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후우.”
오진은 난간에 몸을 기대며 아래로 보이는 야경을 내려다봤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반짝이는 불빛들.
순간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는 그 찬란한 빛무리에 괜히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빌어먹을.”
천마의 정체가 뭔지.
그의 진짜 목적이 뭔지.
가면 갈수록 오히려 미궁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난간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서늘한 밤바람이 머리를 스치자 복잡했던 머릿속이 그래도 조금은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걸 조사하면 뭔 단서를 얻을 수 있으려나.”
오진은 카시아에게 받은 검은 보석을 들어 올렸다.
겉에 거미줄처럼 금이 간 상태긴 했지만, 그 안에 담긴 힘들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내가 가진 것과는 다른… 또 하나의 흑천.’
오진은 은은한 검은빛으로 반짝이는 보석을 손에 쥔 채 가늘게 눈을 떴다.
과연, 천마가 지닌 흑천과 자신이 지닌 흑천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카시아의 말대로면 역천의 별을 죽여 흡수해야지만 흑천이 완성된다고 했지.’
그렇다면.
자신이 지닌 흑천은 이미 천마가 지닌 흑천보다 상위의 힘이라는 걸까.
“뭐, 흡수해 보면 알겠지.”
흑천의 힘이 깃든 보석을 협회나 칠성에게 가지고 가서 조사를 맡긴다 한들 뭔가 결정적인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천마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카시아조차 그의 정체에 대해선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까.
‘어설프게 조사를 맡길 바에는 흡수하는 게 낫지.’
오진은 검은 보석을 손에 쥔 채 흑천의 힘을 일으켰다.
꾸르르륵.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검은 먹구름이 보석을 휘감았다.
그리고.
-띠링!
[‘흑천의 조각’을 흡수했습니다.] [흑천의 아홉 번째 개화 조건을 모두 달성하였습니다!] [흑천의 아홉 번째 개화가 시작됩니다!]“뭐?”
눈앞에 떠오른 푸른 메시지창에 오진은 두 눈을 부릅떴다.
천마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갑자기 아홉 번째 개화라니?
예상치 못한 전개에 순간 당혹감이 밀려왔다.
“크윽!”
쿠르르륵!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먹구름이 소용돌이처럼 주변에 휘몰아쳤다.
각성자도 구성에 다다르게 되면 한 번에 엄청난 변화를 겪는 것처럼, 흑천 또한 아홉 번째 개화에 특별한 뭔가가 일어나는 걸까.
사방으로 뿜어지는 검은 먹구름의 양은 이제까지 여덟 번의 개화를 겪었을 때보다 훨씬 짙고, 많았다.
쿠르르륵! 쿠륵!
소용돌이치던 검은 먹구름이 오진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흑천이 구성개화(九星改化)에 도달했습니다!] [각성자 이신혁의 기억 일부가 전승됩니다!]여느 때와 같은 기억의 전승.
치지지직.
눈앞의 시야가 일그러지며 이신혁의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제 몸은 좀 괜찮아 형?
가장 처음 들린 것은 이신혁의 동생, 이우혁의 목소리.
-아, 응. 이제 좀 괜찮아졌어.
병원 침상에 누워있던 이신혁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우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절대 혼자 게이트에 들어가지 마. 알겠지?
-알았다니깐.
-앤트혼이 만만한 괴수라고 해서 무시하면 안 돼. 최근 들어 게이트에서 이상한 현상들이 급증했다는 건 형도 알고 있지?
-…응.
이신혁은 이어지는 이우혁의 잔소리에 끄응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앤트혼?’
오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마지막으로 흘러 들어왔던 기억대로라면 이신혁은 이미 9성에 도달한 고위 각성자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앤트혼이 무시해서는 안 되는 괴수라고는 하지만, 고위 각성자한테 진지하게 주의하라고 말할만한 수준의 괴수는 아니었다.
‘시간대가… 뒤로 갔어?’
오진은 병실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살폈다.
2020년 11월 30일.
오진과 이신혁이 함께 1성급 게이트에 들어간 지 3주 정도가 흘렀을 즘이었다.
‘시간 순서에 따라 기억이 흘러 들어오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이제까지는 지금 기준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순차적으로 보여줬었는데 뜬금없이 처음과 비슷한 시간대로 돌아오다니.
2020년 11월이라면 지금 오진의 입장에서도 1년 반이나 더 지난 과거였다.
‘왜 이때의 기억이….’
오진은 눈을 찌푸리며 흘러드는 기억에 다시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건 어떻게 됐어? 목동에 게이트가 하나 나타났다며.
-그게… 이상한 점이 좀 생겼어.
-이상한 점?
-응.
이우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거기서 발견한 성유물, 다른 놈한테 바꿔치기 당한 것 같아.
-바꿔치기 당했다고?
-어. 그래서 원래 있던 성유물의 흔적을 따라 좀 조사를 해봤는데… 웬 이상한 놈이 게이트 주변을 어슬렁거리더라고.
-누군데?
-유진, 이라는 놈이었어.
유진.
오진으로서도 굉장히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놈이… 뭐라고 했더라? 아, ‘위성교’. 자기를 위성교의 신도라 하더라고.
-뭐 사이비 종교 같은 거야?
-글쎄. 그냥 사이비라고 하기엔… 뭔가 꺼림칙해서.
이우혁은 가늘게 눈을 떴다.
-아무래도 조사를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아.
-나도 도와….
-형은 일단 퇴원이나 해.
가볍게 핀잔을 주며 몸을 일으키는 이우혁.
흑사자라는 별명답지 않게 형 앞에서는 꽤나 느슨해진 표정이었다.
몸을 돌려 병실 문을 닫고 나가는 이우혁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치지지지직.
일그러졌던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야, 이게 끝이야?”
오진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찌푸렸다.
뭐, 꼭 도움이 되는 기억만 전승이 되라는 법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아무 짝에 쓸모없는 기억이 전승된 건 처음이었다.
“에라이.”
욕지기가 절로 흘러나오는 상황.
몇 번을 다시 기억을 되짚어봐도 어디 써먹을 구석이 생각나지 않는 잡스러운 기억이었다.
‘내가 너무 기대했던 건가.’
오진은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전승으로 얻은 기억이 없다고 해도 일단 흑천의 개화 단계가 올랐으니 그것만으로 어디냐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
“…어?”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감이.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본능이.
그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잠깐, 만….”
완성했다고 생각한 퍼즐이, 사실은 어긋나 있다는 걸 발견한 것처럼.
맨 처음 올려둔 퍼즐 조각이 알고 보니 다른 퍼즐의 조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처럼.
뭔가.
뭔가.
뭔가.
뭔가.
이상하다.
어그러져 있다.
뒤틀리고, 비틀려 있다.
“말이 안 되잖아….”
그래.
말이 안 된다.
상식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맞지 않는다.
맞물리지 않는다.
“왜…?”
아홉 번의 기억.
아마 기시감으로 얻은 기억들까지 합치면, 열 번이 넘는 기억의 전승 동안.
왜.
왜, 왜, 왜, 왜, 왜.
대체, 왜.
단 한 번도.
단 한 마디도.
단 한 글자도.
“흑성회라는 이름이… 안 나올 수 있는 거지?”
언제부터.
유진은 흑성회가 아닌 위성교의 사도가 됐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