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7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72화
탐욕과 사랑 (4)
호텔 방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넓고 편안한 분위기의 병실 안.
사각사각하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예쁘게 잘려 나간 사과 껍질이 용처럼 몸을 꼬며 그릇에 떨어져 내렸다.
“여기 드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정교한 기계로 자른 것처럼 완벽하게 똑같은 크기로 잘려져 있는 사과.
오진은 포크로 그릇 위에 있는 사과를 하나 찍어 머금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 안에서 팍 터졌다.
“그래서… 마경으로 가실 생각이란 말씀이시죠?”
오진에게 마경의 왕들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해 전해 들은 알렌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예. 놈들이 밀려올 때까지 손 빨며 구경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군대라도 이끌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아뇨. 우선은 정보 수집이 먼저겠죠.”
마경의 왕들이 몇 명인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상황이다.
눈가리개를 한 채 전쟁을 할 수는 없는 법.
지금 당장은 마경이라는 미지의 땅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게 우선이었다.
“알렌 씨는 마경에 가보신 적 있다고 하셨죠?”
“예. 몇 번 천권성 어르신을 만나러 간 적 있습니다.”
“천권성 어르신이라면….”
천권성 백무강.
데네브의 12사도 중 서열 1위의 각성자이자, 지구가 아닌 마경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 극소수의 각성자 중 한 명이었다.
“좀 괴팍한 부분이 있긴 하시지만 좋은 분이시죠.”
천권성을 떠올리고 있는지 무뚝뚝하게 일자를 그리고 있던 알렌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럼 알렌 씨도 마경에 대해 나름 빠삭하시겠네요?”
“짧게 전해 들은 것만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어르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전해주고 바로 돌아왔으니까요.”
아무래도 직접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 각성자들보다는 알고 있는 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진은 눈을 빛내며 알렌을 바라봤다.
“혹시 그 전해 들었다는 말들이 뭐였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음… 그러고 보니 자주 그런 말씀을 하셨었죠.”
알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나 저기나 사는 건 다 똑같다, 고요.”
“똑같다는 건….”
“마경에 갇히셨을 때 놈들이 만든 도시를 보셨습니까?”
“아, 예. 봤습니다.”
“어르신 말씀으로는 그런 도시가 몇 개나 이어져 하나의 왕국을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왕국이라.
그리고 보니 오진이 발견했던 도시에도 ‘성’처럼 생긴 건축물이 있었다.
“아마 최초의 균열이 있는 쪽 근처라면… 수인족들의 왕국이 있는 곳일 겁니다.”
수인족이라는 말에 오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고 보니 리아크가 수인족 출신이라고 했었지.’
리아크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수인족은 일반적인 마수와 달리 뛰어난 지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 사회를 만들 수 있던 것도 바로 그 뛰어난 지능 덕분이겠지.
“혹시 천권성 어르신이 계신 곳이 어디쯤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죠.”
알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의 왕들이 준동하고 있다는 소식은 칠성의 일원인 그의 입장에서도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다만 언제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적보다 당장 세계 곳곳에서 날뛰기 시작한 네임드 마수의 처리가 먼저기에 그쪽을 우선해야 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오진이 마경의 상태를 조사해준다는 것은 그로서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어르신을 찾아가시면 지금보다 훨씬 자세한 얘기를 들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알렌은 품속에서 나침반을 하나 꺼내 오진에게 내밀었다.
“이건?”
“마경에 들어가셔서 마력을 흘려 넣으면 어르신이 있는 방향을 가리킬 겁니다.”
통신 장비가 먹통이 되는 마경 안에서 유용한 장비였다.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침반을 받아들였다.
“환자에게 이런 일을 맡기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네요.”
“뭐, 저도 몸이 다 낫기 전에 마경으로 갈 생각은 없습니다.”
“하하. 만약 그러시려고 했다면 억지로라도 뜯어말렸을 겁니다.”
알렌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쇼.”
간단한 인사를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병신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병실 안.
알렌이 준 나침반을 지그시 움켜쥐며 가늘게 눈을 떴다.
‘일단 대충 계획은 정해졌어.’
마경에서 천권성을 찾고 그에게 지금 마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는 게 우선.
‘왕’들과 천마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들을 막을 수 있는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천마.”
불길하게 울려 퍼지는 그 이름을 입에 담는다.
자신은 왜 전생에서 세계를 멸망시켰는가.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한 세계에서 왜 과거로 돌아왔는가.
천마의 목적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너는, 나니까.”
목적은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
오진은 씁쓸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지금 당장 하은을 만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끓어올랐다.
그렇게 멍하니 하은을 생각하며 누워있을 때, 또 다른 여인 하나가 불쑥 상념 속에 떠올랐다.
겁먹은 표정으로 덜덜 떨고 있던 이사벨라의 모습.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먹구름이 낀 듯 먹먹한 감정이 느껴졌다.
‘내가 미쳤지.’
그녀에 대한 마음을 잡기로 했던 것 아니었나.
오진은 한숨을 내쉬며 낯가죽을 쓸어내렸다.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들이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다.
“역시… 너무 많아졌어.”
처음엔 하은만 있으면 상관없다 생각했다.
온 세상이 불타고 짓뭉개지더라도 하은만 구할 수 있다면 괜찮다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놓치고 싶지 않은 인연이 늘어간다.
지키고 싶은 것들이 많아진다.
배부르기 짝이 없는 생각이란 걸 그도 잘 알고 있지만.
“끄응.”
오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태평하게 자고 있기엔 문을 박차고 나간 이사벨라가 걱정됐다.
“일단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네.”
아무래도, 마경을 가기 전에 이사벨라와의 관계부터 확실히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오진은 선반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방 안.
기이한 열기로 가득 찬 좁은 방 안에 한 여인이 산발이 된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까득, 까드득.
손톱을 으깨는 섬뜩한 소리.
초췌한 얼굴을 한 여인은 손톱에서 흐르는 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 어떻게 하지? 어, 어떻게 하면….”
이사벨라는 몸을 웅크린 채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실패했다.
실수했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됐었는데, 두 번째로 만족했어야 했는데.
첫 번째가 되고 싶다는 탐욕에 헛된 짓을 했다가 모든 게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왜…? 어, 어째서? 저, 전에는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으셨다고 하셨잖아.”
만약 계획이 실패한다고 해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탐욕의 대가일까.
오진의 대답은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하아, 하아!”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
담담하게 ‘서로의 마음을 정리하자’고 말하는 오진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칼로 난자하는 것 같은 통증이 달렸다.
“아, 안 돼.”
서로의 마음을 정리하자니.
영영 오진의 곁에 있을 수 없다니.
그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용납할 수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해.
오진이 없는 삶은 이제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이사벨라는 입술을 짓씹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뭐, 뭐라도 해야 해… 뭐, 뭐라도.”
하지만 뭘 해야 할까.
뭘 해야 돌아선 그의 마음을 다시 자신에게 돌릴 수 있을까.
까득, 까드득.
손톱을 깨물며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너 창고 방에서 뭐 하냐?”
달칵.
문이 열리며 하은이 들어왔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경악성을 터트렸다.
“야! 너, 너 손톱 왜 그래?”
기겁한 하은이 이사벨라에게 다가왔다.
“…하은 언니.”
이사벨라는 떨리는 눈으로 하은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낀 밤하늘처럼 컴컴했던 그녀의 동공에 별빛이 떠올랐다.
“어, 언니! 언니! 제, 제 부탁 좀 들어줘요!”
“꺄아악! 뭐, 뭐야?!”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하은에게 다가간 이사벨라가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이사벨라는 하은의 발에 매달린 채 애원했다.
“부탁? 무슨 부탁?”
“오, 오진 씨를 말려주세요!”
오진이 그녀에게 마음을 정리하자고 말한 이유는 하은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
하은 쪽에서 이사벨라를 긍정해주기만 한다면, 그도 다시 자신에게 마음을 돌릴 것이다.
“말려달라니? 오지니 이 자식 또 무슨 짓을 했길래?”
설마 혼자 마경으로 훌쩍 떠나 버린 건 아닐까.
하은이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이사벨라를 어깨를 붙잡았다.
“오, 오진 씨가….”
이사벨라는 말끝을 흐리며 하은의 시선을 피했다.
입술을 짓씹은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한테 서로의 마음을 정리하자고… 하셨어요.”
“…뭐?”
“하, 하지만 제게 마음이 없으신 건 아니에요! 아, 그래! 후유증! 그 후유증 때문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사벨라는 하은의 바짓가랑이를 당기며 말을 이었다.
“기억을 잃으시기 전에는 분명 저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고요!”
그래.
이 모든 건 그가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어, 언니라면 알겠죠? 오진 씨가 언니랑 사귀었다는 기억을 잃어버리셨다고 하셨잖아요? 저, 저도 그거랑 마찬가지예요!”
관람차 안에서의 기억만 떠올릴 수 있다면 다시 오진은 자신을 받아줄 것이 분명했다.
그때 분명 ‘둘 다 놓치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으니까.
“…….”
하은은 눈을 찌푸린 채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이사벨라를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오지니가 널 찼다고?”
“그, 그건!”
이사벨라는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아니에요!”
“서로의 마음을 정리하자고 했다며?”
“그러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오진 씨가 기억을 잃어버리셔서 그런 거예요!”
하은의 다리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채 애원하듯 외쳤다.
“어, 언니가 가서 오, 오진 씨에게 말 좀 해주세요!”
“…무슨 말?”
“제, 제 마음을 받아달라고요! 이, 이제 다시는 언니 자리를 욕심내지 않을게요! 앞으론 거짓말도 안 할게요! 저, 전 두 번째로 만족하니까! 그, 그러니까….”
눈물을 쏟아내며 애원하는 이사벨라.
“시, 시키는 건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방울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은은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이사벨라를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오진이한테 차였는데 그걸 나보고 가서 받아달라고 말해달라고?”
하.
하은은 헛웃음을 흘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미쳤냐 너?”
싸늘한 시선이 이사벨라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