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73)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73화
탐욕과 사랑 (5)
“어, 언… 니?”
이사벨라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하은을 올려다봤다.
평소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처럼 쾌활하기 짝이 없었던 하은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내가 전에 뭐라고 했어? 오지니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었지?”
그리고 오진이 내린 결정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자는 것.
그게 무슨 이유에서건, 그가 내린 결정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그러니까 기억을 잃기 전에는….”
“그때는 네 맘을 받아주기로 했는데, 기억을 잃고 나서 갑자기 말이 바뀌었다고?”
“예, 예! 마, 맞아요!”
이사벨라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은은 가늘게 눈을 뜨며 이사벨라를 내려다봤다.
궁지에 몰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뭔가 이상한데.”
하은은 눈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번에 사라진 오진의 기억은 이사벨라와 데이트 중에서도 극히 일부의 기억.
물론 오진의 기억이 얼마가 사라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평소의 감정과 사고 자체가 뒤바뀔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자신과 연인이었을 때의 기억이 모두 사라졌을 때조차 그의 감정은 변하지 않았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 ‘앞으론 거짓말도 안 하겠다’고 했었지?”
그 말은 전에는 거짓말을 했었다는 뜻이리라.
흠칫.
이사벨라의 어깨가 떨렸다.
“그, 그건.”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하는 이사벨라.
하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오지니한테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
“…….”
이사벨라는 재판장에 들어온 범죄자처럼 고개를 떨궜다.
“미, 미안해요. 언니.”
“미안한 게 아니라 무슨 거짓말을 했냐고.”
“그게….”
짜증 섞인 하은의 목소리에 이사벨라는 쭈뼛쭈뼛 오진과 있었던 일들을 풀어놨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시시각각 하은의 표정이 변해갔다.
그렇게 난데없는 고해성사가 끝났을 무렵.
“…하이고, 내 골이야.”
하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야 이 한심한 아가씨야.”
고개를 떨군 이사벨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 사기꾼 자식이 그런 거에 속겠냐?”
“하, 하지만 분명.”
“이상한 걸 아는데도 그냥 믿어준 거겠지. 그만큼 널 믿으니까.”
“…….”
“근데 넌 오지니를 속이려고 했네?”
변명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이사벨라는 죄책감에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입술을 짓씹었다.
“…죄송해요.”
“나한테 사과할 일은 아니잖아?”
“언니한테도 죄송해요.”
둘이 사귀고 있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허튼 수를 쓰려고 했으니.
하은에게도 고개 숙여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내일 오진 씨에게도 사과할게요.”
“사과한 다음에 어떻게 할 건데? 이탈리아로 돌아가기라도 하게?”
“…….”
이사벨라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대로 이탈리아로 돌아간다면, 앞으로 오진과 이어질 일은 영영 없을 거라는 걸.
그녀의 삶을 지탱하던 희망이 송두리째 사라지게 되겠지만.
“돌아… 가야죠.”
뻔뻔하게 오진의 옆에 있기에는 지은 죄가 너무 컸다.
“아, 앞으로 오진 씨 앞에… 나, 나타나지… 히끅… 않을게요.”
닭똥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통을 옥죄는 듯한 감각.
앞으로 그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아득한 절망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렇다는데?”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이사벨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하은이 돌연 입을 열었다.
“예?”
누구한테 하는 말일까?
고개를 숙인 채 눈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던 이사벨라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은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품속에 넣어둔 스마트폰을 꺼냈다.
통화 연결이 되어 있는 스마트폰.
이사벨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 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입을 벌린 이사벨라의 앞에서 스마트폰의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그건 좀 곤란한데.]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
지금 이사벨라에게 있어서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임과 동시에 가장 듣기 싫었던 목소리였다.
“오, 오, 오, 오진 씨?!”
[역시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렇게 된 거였구나.]스마트폰 너머의 오진이 쓴웃음을 흘렸다.
이사벨라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하은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 언니. 서, 설마 처음부터…?”
“오지니가 너 걱정된다고 좀 찾아보라 그러더라고.”
하은이 어깨를 으쓱이며 쯧쯧 혀를 찼다.
“그래 뭐…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마경에서 돌아온 직후.
오진이 죽었다고 생각한 이사벨라가 완전히 폐인이 되었을 때부터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이게 다 네 탓이야 새끼야.”
하은은 눈을 찌푸리며 스마트폰을 노려봤다.
“아, 아으.”
이사벨라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설마 하은과의 대화를 모두 오진이 듣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자신의 거짓말도 모두 들통났다는 뜻이 아닌가?
“주, 주, 죽….”
“죽?”
“죽을 수밖에 없어요, 이제.”
이사벨라는 질끈 눈을 감으며 날카로운 손톱을 목덜미에 들이밀었다.
“야, 야 잠깐만!”
하은이 다급하게 이사벨라의 손을 붙잡았다.
황소 같은 힘에 순간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손톱이 목을 파고들기 전에 이사벨라의 손을 멈출 수 있었다.
“죽긴 뭘 죽어?!”
“…전에 언니가 그러셨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울진 눈물에 섞여 떨어진다.
“오진 씨가 죽으면… 언니도 따라 죽겠다고.”
“…….”
“저도… 저도 마찬가지예요.”
오진이 죽은 건 아니었지만.
그의 곁에 있을 수 없다면 사실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죄송해요. 주제도 모르고 언니 자리를 넘봐서.”
“…….”
하은은 굳게 입을 다문 채 날카롭게 이사벨라를 쏘아봤다.
처량하게 눈물을 흘리는 이사벨라의 모습에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왜 그러냐 너? 원래 이러지 않았잖아?”
그녀가 알고 있는 이사벨라는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온갖 고상한 척을 떨며 능구렁이처럼 뻔뻔한 태도를 보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어떤가.
능구렁이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꿈틀거리는 거머리나 다름없지 않은가.
비참할 정도로 축 처진 이사벨라의 모습에 질척한 불쾌감이 차올랐다.
하은은 사나운 눈으로 이사벨라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왜 그런 쓸데없는 거짓말을 한 거야?”
오진의 곁에 있고 싶다면 굳이 ‘첫 번째’가 될 이유가 없었다.
이사벨라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으니까요.”
“응? 뭐라고?”
“무서웠… 으니까요.”
사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하은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는 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서웠다.
두렵고, 두려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오진은 하은과 연인이었다는 기억을 잃어버리고도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그녀와 이어졌다.
둘 사이에는 기억을, 추억을 넘어선 유대가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두 번째’에 불과한 자신한테는?
오진과 추억이라 부를 만한 뭔가 있었나?
기억을 넘어선 유대가 있었나?
“죄송… 흐윽. 죄송, 해요.”
만약 오진이 또 한 번 온몸이 검은 먹구름으로 변했던 기술을 사용한다면.
또 한 번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린다면.
과연 자신은 하은처럼 다시 아무렇지 않게 원래의 관계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저도… 어, 언니처럼. 언니처럼… 되고 싶어서.”
그렇기에 첫 번째를 바랐다.
분에 맞지 않는 자리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쭙잖은 거짓말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욕심을 부렸다.
“잘못… 했어요.”
“…….”
하은은 흐느끼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말없이 낯가죽을 쓸어내렸다.
하아.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야, 권오진.”
하은은 고갤 돌려 현관 쪽을 바라봤다.
“거기 있지?”
“…예?”
달칵.
현관문이 열리며 환자복 차림의 오진이 집으로 들어왔다.
이사벨라는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떨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오, 오진 씨?!”
“…….”
말없이 이사벨라에게 다가온 오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하은은 쯧,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뒤는 네 알아서 해라.”
“…알아서 하라고?”
“말했잖아? 난 네 결정에 따를 거라고.”
“…….”
굳게 입을 다문 채 생각을 이어가던 오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미안, 누나.”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나 진짜 쓰레기 새끼 맞나 보다.”
“그걸 이제 알았냐?”
하은이 헛웃음을 흘리며 오진의 정강이를 퍽 걷어찼다.
“너 만약 내가 다른 남자 새끼 하나 데려와서 양다리 걸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그 새끼 두들겨 팬 다음 누나 옆에서 꺼지라고 하겠지.”
“존나 이기적인 새끼.”
“말했잖아. 쓰레기 새끼 맞다고.”
이제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포기했다.
개천의 후유증 따위 알게 뭐란 말인가.
“대신, 이라고 할 건 아니지만.”
오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 손으로는 이사벨라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하은의 손을 붙잡았다.
“행복하게 해줄게. 두 사람 모두.”
온 세상을 짓밟고, 불태워서라도.
“…오, 오진 씨?”
“지랄.”
하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거친 욕설을 내뱉은 것과 달리 그녀는 붙잡은 오진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누나가 너 사정 봐준 거니까 앞으로 누나 말 잘 들어라?”
“지은 죄가 있는데 뭐든 들어줘야지.”
“메이드복 차림으로 제로투 춰줘.”
“미안해 이사벨라. 네 마음을 받아주긴 힘들 것 같아.”
“아….”
이사벨라의 동공이 수축했다.
절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바들바들 어깨를 떨었다.
“야, 야. 이러다 애 또 울겠다.”
하은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이사벨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언니?”
“나도 웬 어쭙잖은 년이 오지니 옆자리 꿰차겠다고 하면 많이 빡칠 것 같긴 한데.”
옅은 미소를 지으며 주저앉은 이사벨라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뭐냐. 솔직히 별로 싫어하지는 않거든. 여동생 하나 생긴 기분이기도 하고.”
가끔 당돌한 행동 때문에 뒷목을 잡게 만들지만, 기본적으로 이사벨라는 싹싹하고 상냥한 성격이었다.
똑 부러진 여동생을 하나 둔 기분이랄까.
연적(戀敵)으로서는 최악의 상대였지만 친구나 동료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그, 그러니까 지금 절… 이, 인정해 주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언니?”
공허했던 이사벨라의 눈동자가 찬란한 은하수가 펼쳐졌다.
하은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오진을 향해 고갤 돌렸다.
“너 병실에서 말없이 튀어나왔지?”
“아, 응.”
뭐 설명하고 어쩌고 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쯤 너 사라졌다고 난리 났겠네.”
VIP 병실의 고객이 돌연 사라졌으니 병원 전체가 뒤집혔으리라.
“잠깐. 바로 전화할….”
“됐다. 내가 가서 퇴원 수속 밟아줄게.”
어차피 VIP 병실에서 죽치고 있어도 개천의 후유증이 낫는 것도 아니었다.
하은은 이사벨라를 힐끔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사이에 얘랑 얘기 끝내놔라.”
“…고마워 누나.”
“됐다. 이게 다 남자 새끼 잘 못 사귄 내 잘못이지.”
하은은 푹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아, 잠깐만.”
밖으로 나가려던 그녀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방 서랍을 뒤적였다.
서랍에서 꺼낸 건 손바닥보다 살짝 작은 크기의 종이 상자.
“할 거면 쓰고 해라.”
하은은 오진에게 종이 상자를 던졌다.
“…….”
“…….”
종이 상자에 적힌 ‘0.01’이라는 숫자를 본 오진과 이사벨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