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7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74화
막간–두 연인
“그래서….”
다음 날.
느긋하게 퇴원 수속을 마친 후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집에 돌아온 하은은 이제 막 아침 식사를 마친 두 사람에 앉았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오진과 이사벨라를 쓱 훑어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했냐?”
전조도 없이 훅 들어오는 직구.
“어, 언니!”
이사벨라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오진이 괜한 헛기침을 흘리며 하은의 시선을 피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했네, 했어.”
쯧쯧.
하은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얼굴을 붉힌 채 풋풋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괜히 속이 뒤틀렸다.
뭐, 인제 와서 후회한들 어쩌겠는가.
둘의 관계를 허락한 건 자신인데.
“아, 맞다 오진아. 고릴라 아저씨가 너 찾던데?”
“한 부장님이?”
“엉. 어제 그 마경으로 간다는 얘기 좀 했었는데 너 퇴원하면 직접 한번 보고 싶다네. 전해줄 물건이 있다고.”
전해줄 물건이라.
“그 김시후인가? 꼬맹이가 직접 만든 거라고 하더라고.”
“그래?”
김시후의 물건이라는 말에 오진의 눈이 반짝였다.
성유물을 제작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국내에서 따를 자가 없는 천재 소년의 물건이라면 기대해 볼 만하리라.
“무슨 물건인지는 못 들었어?”
“정확히는 얘기 못 들었어. 마경 갈 때 유용할 거라던데?”
“음… 직접 가봐야 하나.”
“한번 가봐. 안 그래도 너 뱀자리 여왕한테 털렸다고 걱정하던데.”
“털리긴 뭘 털려.”
“그럼 이겼냐?”
“아니.”
개털렸지.
“…애초에 지금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고.”
궁시렁거리는 오진의 모습에 하은이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강한 적을 만나더라도 매번 귀신처럼 승리를 거머쥐었던 오진이 이런 풀 죽은 모습을 보이다니.
하은은 오진의 뺨을 장난스럽게 잡아 늘이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빨랑 가봐.”
“알았어. 그럼 나 협회 좀 다녀올게.”
“잘 다녀오세요 오진 씨. 아 참, 로베르토한테 태워달라고 할까요?”
“됐어. 어차피 근천데 뭐.”
오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밖으로 나갔다.
* * *
달칵.
현관문이 굳게 닫히자 무서운 적막이 집 안에 내려앉았다.
“…….”
“…….”
하은과 이사벨라는 말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힐끔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한 남자와 두 여인.
일반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뒤틀린 관계 속에서 하은과 이사벨라는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알고 지낸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처음 만난 것처럼 서로가 낯설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우연히 평소 얼굴만 알고 지내던 친구의 친구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고마워요, 언니.”
뻘쭘한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이사벨라.
방금 막 설거지를 끝낸 듯 에이프런을 입고 있는 그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언니가 허락해 주시지 않았던 이렇게 행복한 감정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녹아내린 설탕처럼 달콤한 행복감.
그토록 바라왔던 오진과 결실을 보게 된 이사벨라는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고마워할 일은 아니지. 난 그냥 오진이 그 자식이 선택한 걸 따랐을 뿐이니깐.”
“하지만 만약 언니가 반대하셨다면 오진 씨도 마음을 바꾸셨을 거예요.”
“그건….”
하긴.
만약 자신이 이사벨라와의 관계를 강경하게 반대했다면 오진의 성격상 가차 없이 이사벨라와의 관계를 끊어냈을 것이다.
오지니한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이사벨라가 아니라, 나니깐.
하은은 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왠지 알 수 없는 고양감과 함께 콧대가 올라갔다.
“…언니?”
“응? 아아. 암것도 아냐.”
하은은 우쭐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오지니가 예전부터 날 잘 따르긴 했지. 같이 보육원에 있던 시절에도 날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었으니까.”
콧대를 높이며 오진과의 추억을 늘어놓는 하은.
보육원 시절부터 쭉 이어져 왔던 기나긴 인연.
말 그대로 한평생을 함께 쌓아 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 단단한 추억의 성은 감히 이사벨라가 넘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
이사벨라의 눈이 살며시 찌푸려지며 이마에 희미한 힘줄이 돋아났다.
자랑스럽게 오진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하은의 모습을 보니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뭐, 그런 걸로 치면 오진 씨도 절 위해 두 번이나 목숨을 걸어주셨지만요.”
마경에 갇혔을 때 한 번, 그리고 이번에 카시아의 습격에서 또 한 번.
오진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사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그거야 당시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그런 거고. 굳이 목숨을 걸어야만 소중하게 여겨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서로에 대한 신뢰라는 건 결국 오랜 시간이 필요한 법이거든.”
하은은 계속해서 ‘오랜 시간’을 강조했다.
이사벨라는 방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은 그림으로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시간이야 앞으로 저도 천천히 쌓아가면 되는 거니까요. 어차피 나중에 가면 언니랑 별 차이 없을걸요?”
“…별 차이 없다니?”
“왜 그렇잖아요. 10대 때는 한 살, 한 살 차이가 크게 느껴졌는데 30대, 40대에서는 한두 살 차이는 차이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고.”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진과 하은만이 공유하고 있는 추억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헹, 그거랑 같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는 법이라고. 너 보육원에 있을 때 그 자식이 어땠는지 전~ 혀 모르지?”
“어머, 이게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라떼’라는 건가요?”
“라떼?”
“왜 있잖아요. 꼭 말할 때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사람들.”
하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입가를 씰룩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 혹시 질투하냐?”
“어머, 그럴 리가요. 전 어디까지나 두 번째잖아요?”
이사벨라는 살짝 허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젯밤을 생각하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던데요?”
가슴 위에 손을 살며시 얹은 채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피부를 간질이는 뜨거운 숨결.
부러질 듯 거칠게 몸을 끌어안는 단단한 두 팔의 감촉.
오진은 짐승처럼 거칠게 자신을 탐했다.
“후훗. 오진 씨도 참…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으셨는데도 몇 번이나 그렇게.”
양 뺨에 손을 올린 채 어젯밤 뜨거운 정사를 떠올리는 이사벨라.
“오진 씨가 아주 좋아하시더라고요. ‘이거’.”
이사벨라는 힐끔 하은을 바라보며 은근슬쩍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풍만한 곡선이 강조되며 단숨에 시선을 앗아갔다.
하은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펑퍼짐한 에이프런 너머로도 확연히 보이는 굴곡을 눈에 담았다.
그녀 자신도 어디 가서 꿀릴 정도로 작은 크기는 아니었지만, 저 상식을 벗어난 탄력과 크기를 지닌 산봉우리에는 감히 미치지 못했다.
하은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헹. 어차피 제대로 하지도 못했을 거면서.”
“…그, 그걸 언니가 어떻게 알아요?”
이사벨라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하은의 말마따나, 어젯밤 그녀는 너무 긴장했던 탓에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오진이 이끌어주는 대로만 따라 움직였다.
평소 그녀 쪽에서 적극적으로 오진을 유혹했다는 걸 생각하면 꽤나 수치스럽게 느껴질 만한 첫 경험이었다.
“안 봐도 뻔하지 뭐.”
하은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우쭐 콧대를 높였다.
“나야 뭐, 오지니랑은 경험이 많으니까 요즘은 내가 리드해 주지만.”
“…누가 리드하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고럼~ 고럼. 아무렴 하나도 안 중요하지.”
승자의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는 하은의 모습에 이사벨라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네까짓 게 발버둥 쳐봤자지’라고 말하는 듯 한껏 여유를 부리는 하은의 모습에 천불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하은의 흉부.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확실한 ‘차이’가 나는 부분이었다.
신체적 차이를 두고 우월감을 느끼는 게 얼마나 유치한 일인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지만.
원래 사람이란 한 번 머리에 열이 오르게 되면 놀라울 정도로 유치해지는 법이다.
“가, 가슴도 쬐끄만 게!”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작은 게 아니라 네가 쓸데없이 큰 거거든?!”
“쓸데없지 않아요! 오진 씨가 얼마나 좋아해 주셨는지 언니는 모르죠?”
“이게 또 나 이겨 먹으려고 하네? 그러다가 한 번 데인 거 그새 까먹었어?”
“흥, 이길 자신 없으면 자신 없다고 말하세요.”
“자, 자신 없지 않거든?!”
“어머, 그런 것 치고는 목소리가 좀 커지셨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두 여인은 서로 잡아먹을 듯이 사납게 노려봤다.
다시금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말없이 10여 초 정도가 흘렀을까.
두 여인, 아니 두 연인의 눈이 허공에 교차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아. 나이 처먹을 대로 처먹고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이냐 이게.”
“그러게요.”
하은과 이사벨라는 서로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야.”
“맞아요 언니. 다 오진 씨 잘못이에요.”
방금까지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던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고마워요 언니. 제가 오진 씨 곁에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이사벨라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어제 언니가 그러셨잖아요? 여동생이 하나 생긴 기분이시라고.”
“아, 응. 그랬지?”
쭈뼛거리며 고개를 돌리는 이사벨라.
사과처럼 붉어진 뺨을 숨기며 말을 이었다.
“저도 뭐… 언니 한 명 생긴 기분이었어요. 원래 언니가 있었지만… 서로 떨어져 지낸 지 오래됐거든요.”
오래만 됐을까.
그녀의 기억 속 다정다감했던 언니는 직접 그녀를 죽이려고까지 했었다.
물론 천마에게 조종당했던 탓이지만.
어쨌든 어제 성소 앞에서 재회했을 때도 살가운 대화를 나눴던 건 아니었다.
“그래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 잘 부탁해.”
“저도요.”
하은은 이사벨라와 손을 마주 잡으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아 참. 그리고 만약 다른 년이 오지니를 노리면….”
“그때는 제가 나서서 손을 쓸게요.”
방긋.
이사벨라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지어졌다.
“오진 씨 근처엔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할 거예요.”
“그래.”
하은은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는 듯 만족스럽게 고갤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걔가 좀 수상하더라고.”
“누구요?”
“녹존성.”
“리베카 씨가요?”
“응응. 전에 막 오지니 무릎 위에 앉고 그랬다니깐?”
“…자세하게 들려주세요.”
한동안 두 여인은 서로 머리를 맞댄 채 어떻게 하면 오진의 주변에 다른 여자들을 얼씬거리지 못하게 만들까 궁리했다.
“최대한 빨리 마경으로 출발해야겠네요.”
“그치? 어차피 가야 하는 곳이라면 꾸물거릴 필요가 없잖아?”
파군성의 칭호를 받으면서 오진은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됐다.
아직 9성도 되지 못한 각성자가 칠성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으니 그를 노리는 세력은 앞으로 우후죽순으로 늘어날 터.
그리고 미인계는 옛적부터 세력 간의 경쟁에 흔히 쓰이는 수법이었다.
냉전 시절에도 러시아의 스파이들이 미인계를 주로 사용했다 하지 않던가.
“저도 그럼 빨리 떠날 준비를 해야겠네요.”
“뭐 도와줄까?”
콜그란데 가문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이끌고 있는 이사벨라와 달리 하은은 딱히 준비할 게 많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방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던 참이었어요.”
“근데 나 서류 정리나 그런 건 잘못하는데.”
“어머,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콜그란데 가문은 유럽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문.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만 수십에 달하는 메머드급 가문이었다.
이사벨라가 자리를 비운다면 그녀가 없는 콜그란데 가문을 노리고 여러 세력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것은 당연지사.
안 그래도 최근 한국에 지내면서 실무에서 반쯤 손을 떼고 있다 보니 몇몇 가문들이 콜그란데 가문의 사업체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
그런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 얼씬도 못 하게 만들기에 최적의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냥 몇 군데 좀… 불태워주시기만 하면 돼요.”
이사벨라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하은은 이사벨라의 손을 마주 잡으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건 또 내가 전문이지.”
그렇게 마경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