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77)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77화
개와 늑대 (2)
“이렇게 많은, 손님, 처음.”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백무강.
오진 일행은 예상과는 지나치게 다른 그의 모습에 얼어붙은 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천권성 백무강.
칠성의 일원이자 데네브의 12사도 중 당당하게 서열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가 치매 걸린 노인이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반갑습니다 어르신. 오진이라고 합니다.”
망설임도 잠시.
오진은 코딱지가 묻은 백무강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 잡으며 살갑게 웃었다.
헤헤, 백무강은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아이처럼 순박하게 웃었다.
“나, 무깡이라, 불러.”
“…무깡 말씀입니까?”
“응. 그게, 내 진짜 이름. 백무강, 데네브 님이 지어준 거야.”
데네브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라.
‘무깡’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 대신 ‘백무강’이라는 이름을 쓰게 만든 건가.
남들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데네브다운 짓이었다.
‘그럼 데네브가 유독 천권성에 대한 얘기를 아꼈던 것도….’
자신의 첫 번째 사도라고 당당하게 소개하기엔 창피했기 때문이었을까.
“응? 왜 구래?”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주름진 입가를 올리는 백무강의 모습을 보니 어느 정도 데네브의 심정이 이해되기도 했다.
“그나저나 초면인 제게 본명을 알려주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응? …아! 마, 맞다! 데네브 님이 말하지 말라 했는데!”
허둥지둥거리며 식은땀을 흘리는 백무강.
오진은 우는 아이를 달래듯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백무강 님의 본명에 대해선 함구하겠습니다.”
“고, 고마워.”
백무강이 감동했다는 듯 눈을 글썽였다.
“오진, 착한 사람.”
“…….”
착하다는 말을 들어본 게 얼마 만일까.
오진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백무강을 바라봤다.
“오지나… 이거 괜찮은 거 맞아?”
조심스럽게 오진 옆으로 다가온 하은이 귓가에 속삭였다.
오진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백무강이 이런 상태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이래서야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기나 하려나.’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마경에 대해서 몇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응. 괜찮아. 오진, 착하니까 알려줄게.”
백무강은 몸을 돌려 작은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갔다.
말없이 눈치를 보던 오진 일행은 들어와, 라는 말에 발걸음을 옮겼다.
오두막집 내부는 겉보기보단 꽤나 깔끔했다.
정돈이 잘됐다는 느낌보단, 애초에 사용 자체를 별로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마실 거, 가져올게.”
앉아서 잠시 기다리자 백무강이 차를 내왔다.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보이차였다.
“예전에 우리 할멈이 좋아하던 차야.”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내려놓는 백무강.
오진은 꾸벅 인사를 하며 차를 받았다.
후륵.
한 모금 마시니 구수한 향기가 콧속에 확 퍼졌다.
오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백무강 님은 몇 년 전부터 여기서 생활하고 계셨던 겁니까?”
“음. 4년? 5년? 미안. 잘 기억 안 나.”
“마경에서 생활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요?”
“보물, 찾으러.”
보물?
대외 활동을 모두 중단한 채 마경에서 홀로 생활하는 이유가 보물 때문이었단 말인가?
“무슨 보물이죠?”
“응? 보물은 보물이야.”
“…….”
동그랗게 눈을 뜨며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 바라보는 백무강.
오진은 더 물어보기를 포기하고 화제를 돌렸다.
“어르신. ‘마경의 왕’들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응, 알아.”
“지금 마경 안에 ‘왕’이라 불리는 마수들이 몇 명 존재하죠?”
“마수?”
백무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들, 마수 아냐. 마수는 저 숲에 있는 애들.”
오진 일행이 지난 일주일에 걸쳐 빠져나왔던 마해의 숲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나, 지구나 똑같아.”
알렌에게도 전해 들었던 말이다.
“여기, 수인족, 용인족, 마인족이 살고 있어. 왕도 각각 한 명씩 있어.”
“그러면 왕국도 세 개인 겁니까?”
“음… 좀 달라.”
백무강은 차를 후르륵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왕국은 세 개지만, 사실 다 마인족 거야.”
“…그 말씀은.”
“마인족 숫자 적어. 하지만 강해. 천마의 피를 이었어.”
천마.
오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면 왕국 자체는 3개지만 실질적인 지배자는 마인족이라는 말씀입니까?”
“응. 예전에는 달랐대. 근데 백 년도 더 전에 큰 전쟁이 났대.”
우드득!
갑작스러운 소음과 함께 오두막집 바닥이 부서졌다.
소음이 들린 쪽으로 시선이 모였다.
“아… 미, 미안하군. 발을 잘못 디뎠다.”
리아크가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발을 잘못 디뎠다’라고 하기엔 멀쩡했던 나무 바닥이 처참하게 박살 나 있었지만.
“괜찮아. 어차피 집, 자주 안 써.”
백무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도 저희 잘못인데. 나중에 고쳐놓고 가겠습니다.”
“헤헤. 역시 오진, 착한 사람.”
“그럼 질문을 마저 하면, 여기서 가장 가까운 왕국이 ‘칸’ 왕국 맞습니까?”
“응. 수인족들의 나라야.”
리아크에게 들은 대로였다.
“그곳의 왕에게 접근하고 싶습니다.”
“거기, 왕 없어.”
“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왕국마다 왕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혹시 치매기가 돋아났나 싶어 오진은 눈을 살짝 찌푸린 채 백무강을 바라봤다.
“대신 왕의 대리인 있어. 호루스라는 검은 갈기 부족의 늑대야.”
“대리인? 그럼 왕은….”
“수인의 왕은, ‘칸’이라는 이름을 계승해야 한대.”
백무강은 동화책에서 본 이야기를 재잘거리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전대 ‘칸’이 전쟁에서 실종되고, 그 이후로는 칸의 이름을 계승한 수인은 없어. 그래서 왕의 자리는 지금 공석이야.”
왕의 자리가 공석이라니.
오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근데 왕의 자리가 너무 오랫동안 공석이라, 다들 호루스를 왕이라 불러.”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큰 상관 없으리라.
왕이건 대리인이건 중요한 건 천마와 어떤 연결점이 있냐였으니까.
“그럼 그 호루스라는 수인에게 접근할 방법은 있습니까?”
“몰라, 그건.”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백무강.
오진은 끄응, 침음을 삼키며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된 이상 왕국에 직접 잠입해서 알아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쉽지 않을 텐데.’
자신이야 흑막으로 기척을 감출 수 있지만 하은과 이사벨라는 감추기 어려웠다.
“귀랑 꼬리만 있으면 돼.”
“예?”
백무강이 머리와 엉덩이 부근을 툭툭 손으로 쳤다.
오진은 놀란 표정으로 백무강을 바라봤다.
“그것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응. 수인들, 인간 거의 만나본 적 없어. 그래서 잘 몰라.”
하긴.
마경에 정착해 사는 각성자는 극소수에 불과할 테니 인간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당연하리라.
“그냥 가짜 귀랑 꼬리만 있으면 되는 건가요?”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이사벨라가 물었다.
“응. 나도 몇 개 있어. 빌려줄까?”
“아, 예. 잠깐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기다려.”
몸을 일으킨 백무강이 특유의 우스꽝스러운 걸음으로 벽장에 다가갔다.
부스럭거리며 짐을 뒤지던 그가 양팔 가득 가짜 귀와 꼬리를 들고 왔다.
코스프레에 주로 쓸 법한 복슬복슬한 털이 달린 모형 귀와 꼬리였다.
“종류가 다양하네요.”
“수인들, 많아.”
이사벨라는 흥미롭다는 듯 귀와 꼬리 모형을 살폈다.
그중 강아지 귀처럼 축 처진 갈색 귀 모형을 집어 든 이사벨라가 머리에 모형을 썼다.
“어떤가요 오진 씨? 어울리나요?”
눈웃음 지으며 오진을 돌아보는 이사벨라.
평소 이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던 오진이었지만, 막상 강아지 귀를 쓴 이사벨라의 모습을 보니 괜히 뺨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크흠. 어, 어울리네.”
“어머, 다행이네요.”
이사벨라는 농염한 미소를 지으며 오진에게 다가왔다.
살며시 몸을 기울인 이사벨라가 오진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멍멍.”
미친.
오진은 입을 쩍 벌린 채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런 오진의 반응이 퍽 마음에 드는지 이사벨라는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것들이 대낮부터 염장질이네.”
하은이 눈을 찌푸리며 오진과 이사벨라를 노려봤다.
“언니도 한번 써봐요.”
“됐네요. 관심 없다 그런 거.”
“에이, 어차피 왕국에 가려면 써야 하잖아요? 언니한테는 고양이 귀가 어울릴 것 같은데.”
모형을 뒤지던 이사벨라가 검은색 고양이 귀를 집어 하은의 머리에 씌웠다.
“아이 씨. 쪽팔리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은은 슬쩍 오진 쪽을 바라봤다.
살며시 달아오른 그녀의 뺨이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귀 모형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이 중에서 아무거나 골라서 쓰면 되는 겁니까?”
“검은색이 좋아.”
“검은색이요?”
“응.”
백무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칸 왕국, 검은 갈기 부족이 제일 강해.”
검은 갈기 부족이라.
‘그러고 보니 리아크가 은색 갈기 부족이라고 했던가.’
오진은 은색 귀 모형을 집어 들었다.
탁.
은색 귀 모형을 집어 든 그의 손을 백무강이 붙잡았다.
백무강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은색, 안 돼.”
“따로 이유가 있습니까?”
“은색 갈기 부족, 약해.”
수인들 사이에도 털 색깔에 따라 계급 같은 게 존재하는 건가.
오진의 시선이 리아크를 향했다.
리아크는 말없이 오진의 손에 들린 은색 귀 모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색으로 하죠.”
오진은 검은색 귀 모형을 집어 들었다.
“귀랑 꼬리 있어도, 냄새 조심해. 인간 냄새 잘 몰라도, 가까이 있으면 들켜.”
“예, 알겠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걱정할 게 없었다.
이사벨라나 하은의 경우는 힘들겠지만, 오진에겐 기척을 완벽하게 없애는 흑막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같이 다닐 걸 생각하면 최대한 냄새를 가릴 게 필요하겠네.’
그 부분은 리아크의 도움을 받아 만들면 될 것이다.
머리에 쓴 고양이 귀를 만지작거리던 하은이 백무강을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귀랑 꼬리만 있으면 된다는 건 수인족들이란 게 생김새는 사람이랑 거의 차이 없다는 거지?”
백무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면….”
하은의 시선이 리아크 쪽으로 향했다.
같은 수인족인 리아크는 평소 늑대의 모습을 주로 하고 있고 전투 때에 모습을 바꿔도 인간과는 그 생김새가 아예 다른, 늑대인간의 모습으로 바뀔 뿐이었다.
“하아.”
리아크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기본적으로 수인족은 이 모습을 가장 많이 한다.”
우드득.
섬뜩한 뼈 소리와 함께 리아크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늑대인간이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몸을 바꾼 리아크.
곧 리아크는 우직함이 느껴지는 턱선과 구릿빛 피부, 탄탄한 근육을 지닌 미중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
화은은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으로 리아크를 바라봤다.
인간의 모습으로 몸을 바꾼 리아크가 팍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
“아니, 그. 뭐냐.”
하은은 헛기침을 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조, 좀 가려라 인마.”
“크윽!”
리아크가 다급히 몸을 돌렸다.
“오, 오랜만에 인간 모습으로 돌아와서 실수한 것뿐이다!”
당황한 목소리로 외치며 다시 늑대의 모습으로 몸을 바꾸는 리아크.
그사이 오진 옆으로 다가온 하은이 툭툭 오진의 허벅지를 쳤다.
하은은 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네가 이겼다?”
이기긴 뭘 이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