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80)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80화
개와 늑대 (5)
핏물을 뒤집어쓴 채 뚜벅, 뚜벅 앞으로 걸어가는 리아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진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여기서 사냥꾼들에게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면서 그들을 안내인으로 써먹는 게 좋다.
물론 그만큼 아이들이 느껴야 할 절망의 시간은 길어지겠지만.
그거야 왕국 안으로 성공적으로 잠입하고 난 후 구해주면 그만이다.
그편이 훨씬 이성적이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참지 않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라.”
오진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사냥꾼들에게 붙잡힌 채 떨고 있는 소녀와 그 소녀를 지키기 위해 피투성이가 된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그들을 외면하고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좇는 게 과연 ‘효율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쯧.”
언제나 이성적이고, 효율적인 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알았다, 알았어.”
오진은 붙잡고 있던 하은의 어깨를 놓으며 몸을 돌렸다.
리아크의 뒤를 따르며 양손에 푸른 뇌전을 만들어냈다.
“안 그래도 나도 좀 참느라 짜증 나긴 했거든.”
아무리 남 등쳐먹고 살아가는 사기꾼이라고 해도 어린아이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버리려는 쓰레기들을 보고 아무 생각이 안 들 수는 없었다.
“이, 이 자식들이…!”
우두머리 사냥꾼이 죽자 당황한 사냥꾼들이 뒷걸음질 쳤다.
“오, 오지 마! 오면 이 애새끼 목숨은 없다!”
“꺄악!”
리루를 붙잡고 있던 사냥꾼이 날카로운 손톱을 그녀의 목덜미에 가져다 대며 외쳤다.
오진과 리아크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 그렇지. 거기 가만히 있어.”
“한 발짝이라도 떼면 이 애새끼들은 뒤지는 거야!”
인질극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 걸까.
소년 쪽을 붙잡고 있던 사냥꾼도 팔 한 짝을 짐승의 것으로 바꾸며 다급히 외쳤다.
멈춰선 오진과 리아크의 시선이 교차했다.
“남자애 쪽은 내가 맡지.”
“오케이.”
둘은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발을 박찼다.
기겁한 사냥꾼이 소녀의 목덜미를 손톱으로 그어버리기 직전.
타앙!
와이어 슈터가 불을 뿜었다.
빠른 속도로 쏘아진 와이어가 사냥꾼의 팔을 붙잡았다.
“크윽! 제, 제기랄!”
사냥꾼은 팔에 얽힌 와이어를 풀어내기 위해 거칠게 몸을 비틀었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갈색 갈기가 전신을 뒤덮었다.
뚜둑!
와이어를 통해 전해지는 어마어마한 압력.
괜히 마경의 주민이 아니라는 걸까.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형태를 바꾼 수인족은 성유석 가루를 섞어 강도를 높인 와이어를 맨손으로 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지지직!
와이어를 타고 흘러드는 푸른 뇌전.
“크아아아아아아!!”
와이어를 맨손으로 뜯어내려고 했던 사냥꾼이 고통에 찬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발작을 일으키듯 난동을 부리는 수인족의 힘에 끌려간 오진의 몸이 부웅 허공에 떠올랐다.
“죽엇!”
사냥꾼은 전격의 충격을 가까스로 견뎌내며 와이어의 묶인 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쥐불놀이의 깡통처럼 공중으로 떠오른 오진.
사냥꾼은 툭 튀어나와 있는 암석을 향해 오진을 내던졌다.
“새끼 힘 하나는 더럽게 세네.”
수인족의 괴력에 끌려 허공을 날고 있던 오진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수인족에게는 각성자와 같은 성흔이 없는 대신 규격을 벗어난 신체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전투라는 게 어디 단순히 힘이 세다고 이기는 건가.
씨이이이잉!
늘어져 있던 와이어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날카로운 암석을 향해 날아가던 오진의 몸이 와이어에 끌려 사냥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
부릅떠진 사냥꾼의 눈.
사냥꾼이 미처 반응하기 전에, 오진은 뇌흔 밟기를 사용해 허공을 질주했다.
허리춤에서 폴딩 나이프의 형태로 있는 단탈리안을 꺼내 사냥꾼이 미간에 내려찍었다.
푸욱!
갈라진 미간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꺄아아아악!”
사냥꾼에게 붙잡혀 있던 리루가 쏟아지는 핏물을 올려다보며 비명을 내질렀다.
오진은 리루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쏟아지는 핏물을 가로막았다.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던 핏물이 오진의 등에 쏟아졌다.
“아…. 가, 감사합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이는 리루.
오진은 공포에 떨고 있는 소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은색 머리칼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낯선 손길에 흠칫 몸을 떨던 소녀는 이내 살며시 뺨을 붉히며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효과가 있던 걸까.
애처롭게 떨리고 있던 소녀의 몸이 조금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리아크는….’
리아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르르르르!”
리아크는 허공을 찢어발기듯 손톱을 내려그었다.
섬뢰(閃雷).
손톱이 그어진 흔적을 따라 허공에 푸른 뇌전의 칼날이 만들어졌다.
파공성이 터져 나오며 뇌전의 칼날이 쏘아졌다.
“크읏!”
소년을 붙잡고 있던 사냥꾼은 대경한 표정으로 몸을 비틀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사냥꾼을 비켜 스쳐 지나갔다.
“허억, 허억!”
사냥꾼이 식은땀을 흘리며 살았다는 듯 안도에 찬 표정을 지었을 때.
철컥.
소년을 묶고 있던 굵은 쇠사슬이 날카롭게 잘려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피범벅이 될 정도로 두들겨 맞았던 소년의 눈에서 타오를 듯한 안광이 뿜어졌다.
“크르르르!”
“아아악! 이, 이 빌어먹을 꼬맹이 새끼가!”
소년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사냥꾼을 얼굴을 손톱으로 내리그었다.
사냥꾼은 얼굴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소년을 향해 난폭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갈색 털에 뒤덮인 주먹이 소년의 머리를 으깨기 직전.
“잘했다, 꼬맹아.”
눈부신 속도로 질주한 리아크가 물고기를 낚아채듯 사냥꾼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비틀었다.
우드득!
목뼈가 부러진 사냥꾼이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미, 미친!”
눈 깜짝할 사이 인질을 구출한 오진과 리아크의 무위에 사냥꾼들 사이에 동요가 퍼졌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그들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딜 튀려고 이 개자식들이!”
하은이 품속에서 꺼낸 연초 한 개비를 지팡이처럼 휘둘렀다.
화염의 벽이 만들어져 주변을 에워쌌다.
“크윽!”
“어, 어디서 이런 불이…?”
털이 바짝 타들어 가는 고통에 뒷걸음질 치는 사냥꾼들.
“마무리는 제가 할게요.”
이사벨라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사냥꾼들에게 다가갔다.
퇴로가 막힌 사냥꾼들은 느긋하게 걸어오는 이사벨라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남은 사냥꾼들의 숫자는 다섯.
딱 봐도 가녀려 보이는 여인 하나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으리라.
반인반수의 형태로 몸을 바꾼 사냥꾼들이 동시에 이사벨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사벨라는 손톱을 세워 여유롭게 손바닥을 그었다.
뚝, 뚝.
방울진 핏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온 사냥꾼들이 이사벨라를 에워쌌을 때.
“죽으렴.”
나지막한 명령.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이 수십, 수백 배 부풀어 오르며 가느다란 혈선(血腺)을 만들어냈다.
뭉친 실타래를 풀어헤치듯 혈선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커헉, 컥!”
“케르륵!”
혈선에 스친 사냥꾼들의 몸이 큐브 조각처럼 잘게 썰렸다.
확 피어오르는 짙은 혈향을 맡으며 이사벨라는 입맛을 다시듯 혀를 내밀어 입술을 훑었다.
“…야, 너 그 표정 디게 무섭다.”
“어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언니?”
능청스럽게 표정을 바꾸는 이사벨라.
하은은 헛웃음을 흘리며 오진과 리아크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주변에 다른 놈들은 더 없지?”
“그런 것 같네.”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소녀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풀었다.
“리루!”
“레, 레오 오빠!”
쇠사슬에서 풀려난 소년이 다급히 리루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괘,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으, 응. 괜찮아.”
레오의 품에 안긴 채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루.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리루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레오가 퍼뜩 몸을 돌리며 오진 일행을 노려봤다.
“다, 당신들 누구야?!”
경계에 가득 찬 눈빛.
레오는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오진을 노려봤다.
정확히는 그의 ‘검은 털’에 뒤덮인 그의 귀와 꼬리를.
“검은 갈기 부족이 왜 우릴 구해준 거야.”
살벌한 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아무리 오진 일행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해도, 평소 다른 부족들에게 시달려 왔던 레오에게는 똑같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오, 오빠. 그래도 우릴 구해주신 분들인데….”
“리루는 가만히 있어. 저놈들 검은 갈기 부족이잖아.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른다고!”
리루를 지키듯 앞에 선 채 전투 자세를 취하는 소년.
오진은 짧은 침음을 삼키며 눈을 찌푸렸다.
‘이거 오히려 털 색 때문에 더 경계 받는 느낌인데.’
수인족 사회에 쉽게 녹아들기 위해서 착용한 모형이 오히려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오진은 머리에 쓰고 있는 귀 모형을 벗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우린 검은 갈기 부족이 아니니깐.”
“……?!”
레오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입을 쩍 벌렸다.
“서, 서, 설마 인간?”
“그래.”
“히익! 오, 오빠아!”
“자, 장막 너머의 악마들이 왜 여기에!”
경기를 일으키듯 뒷걸음질 치는 레오와 리루.
“엥?”
검은 갈기 부족을 봤을 때보다도 더욱 격렬한 거부 반응에 오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막 너머의 악마들이라는 게 무슨….”
“마, 맞잖아! 마해의 숲 너머에 있는 검은 장막에서 온 악마들!”
레오는 명백하게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조, 족장님에게 들었다고! 인간들은 검은 갈기 부족보다도 더 조심해야 할 존재라고!”
“흐음.”
인간에 대해선 별 경계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 같았다.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렴.”
이사벨라가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너희에게 해코지할 생각이었다면 왜 구해줬겠니?”
논리적인 설명을 하며 천천히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이사벨라.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온화한 분위기에 순간 레오와 리루의 표정이 풀어졌다.
약에 취한 듯 표정이 풀어졌던 레오가 퍼뜩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니 무서워하지 말렴.”
레오에게 다가간 이사벨라가 상냥하게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 만지지 마!”
레오는 뺨을 쓰다듬는 이사벨라의 손을 탁, 쳐내며 사납게 그녀를 노려봤다.
이사벨라는 굴하지 않고 다시 레오의 머리를 잡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많이 무서웠지?”
포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레오를 껴안은 이사벨라.
상냥하게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 레오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살기도 빠르게 누그러졌다.
“그, 그런다고 내가 속아 넘어갈….”
뭉클.
레오의 양 뺨에 이 세상의 것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수인족이라고 해도, 아니, 오히려 수인족이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수컷의 본능이 발동한 걸까.
레오는 양 뺨을 압박하는 부드러운 감촉에 녹아내리는 표정으로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소, 속아 넘어갈… 헤으응.”
“…….”
자기도 모르게 이사벨라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소년.
“오빠… 저질이야.”
리루는 그런 레오를 경멸 어린 눈초리로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