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81)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81화
개와 늑대 (6)
오진은 배낭에서 포션 한 병을 꺼내 레오에게 다가갔다.
꽤나 격전을 치렀던 듯 전신이 상처에 뒤덮여 있는 소년의 몸에 포션을 조금씩 들이부었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포션을 거부하던 레오도 곧 상처가 빠른 속도로 치유되자 얌전히 포션을 받아마셨다.
“이제 좀 진정됐냐?”
“흥! 고, 고작 이런 걸로 날….”
“아깐 아주 좋아 죽으려 하는 것 같더만.”
“시, 시끄러워!”
레오가 새빨갛게 뺨을 붉히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은이 가늘게 눈을 뜨며 쯧쯧 혀를 찼다.
“하여간 사내새끼들은 다 똑같다니깐. 저런 지방 덩어리가 뭐가 좋다고.”
영 맘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이사벨라의 흉부 쪽을 노려보는 하은.
이사벨라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팔짱을 꼈다.
팔짱을 끼자 안 그래도 거대했던 두 산봉우리가 더욱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글쎄요? 저도 이런 걸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니깐요?”
“이, 이년이.”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는 양 능청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기는 이사벨라의 모습에 하은은 뒷목을 붙잡았다.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
레오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버럭 외쳤다.
포션으로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레오는 뒤로 점프해 거리를 벌리며 다시금 전투 자세를 취했다.
“거기서 움직이지 마!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
“오빠.”
귀와 꼬리를 쫑긋 세운 채 경계심을 불태우고 있는 레오에게 리루가 다가갔다.
리루는 레오의 등을 차분히 토닥이며 그를 진정시켰다.
“저분들이 나쁜 마음 없다는 거, 오빠도 알고 있잖아?”
“…그건.”
“이제 그만해 오빠. 난 괜찮으니까.”
리루가 씩씩하게 웃으며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
레오는 전투 자세를 풀며 홱 고개를 돌렸다.
“저분들에게 할 말 있지 않아?”
“그, 그런 거 없어.”
“오빠.”
엄한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는 리루.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을 피하고 있던 레오가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였다.
“…마워.”
“응? 뭐라고오~? 잘 안 들리는데에~?”
하은이 히죽 미소를 지으며 레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레오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고, 고맙다고! 구해줘서!”
“하하하! 이제야 좀 솔직해졌네, 이 꼬맹이.”
하은이 폭소를 터트리며 레오의 머리를 툭툭 쳤다.
발끈한 레오가 하은의 손을 물어뜯으려는 듯 이를 드러냈다.
“그나저나, 아까 우릴 보고 ‘장막 너머의 악마’라고 했었지?”
“으응? 맞아. 우리 사이에서 인간은 그렇게 불리고 있어.”
“나쁜 짓 하면 밤에 찾아와서 통째로 잡아먹는다고 해요!”
도깨비냐 무슨.
오진은 생각과는 너무 동떨어진 취급에 헛웃음을 흘렸다.
“흑성회 때문 아닐까요?”
“아.”
그러고 보니 흑성회는 마경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고 했었지.
“뭐… 집행관 중에서도 실제 마경에 살았던 각성자는 드물긴 하지만요.”
이사벨라만 해도 마경 근처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뭐… 카시아는 마경에 있었으니깐.”
애초에 마경으로 넘어온 각성자는 90% 이상이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척살 대상이 되어 도망쳐 온 사람이었다.
‘장막 너머의 악마’라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리라.
‘아이러니하긴 하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마경의 존재들이 정작 인간을 두려워하고 있다니.
인류가 얼마나 마경에 대해 무지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그래도 오진 오빠는 나쁜 사람 같지 않아요!”
오진을 바라보는 리루의 눈빛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하은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이 자식 나쁜 놈 맞아. 아주 천하의 개자식이야.”
“아, 아닌 것 같은데….”
움츠러든 채 중얼거리는 리루.
오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보다 집은 어느 쪽이야? 바래다줄게.”
마해의 숲만큼은 아니라 해도 이런 울창한 숲속에 어린아이들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우리 부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어. 이쪽이야.”
오진 일행은 레오를 따라 은색 늑대 갈기 부족의 마을로 향했다.
* * *
마을이 위치한 곳은 왕국이 있는 곳과는 꽤 떨어진 장소였다.
“레, 레오! 리루! 무사했구나!”
“아빠!”
마을에 도착하니 한 수인족 사내가 달려 나와 레오와 리루를 끌어안았다.
“당신들은….”
오진 일행을 바라보며 경계심 어린 눈빛을 보내는 사내.
레오와 리루가 오진 일행과 만났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적의를 내비치던 수인족 사내도 필사적으로 오진 일행을 변호하는 두 아이의 모습에 생각이 바뀌었는지 오진 일행을 향해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아이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은색 갈기 부족을 책임지고 있는 레오루라 합니다.”
“책임지고 계시다면….”
“…예. 제 자식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부족한 놈입니다만, 족장 직을 맡고 있습니다.”
씁쓸한 표정으로 두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레오루.
“…너희 아버지가 족장님이었어?”
“맞아! 우리 아빠는 은색 갈기 부족을 이끄는 족장님이라고!”
레오는 존경에 가득 찬 눈으로 레오루를 바라봤다.
레오루는 레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오진 일행에게 다가왔다.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마을 사람들에겐 잘 설명해 두겠습니다.”
레오루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사방에서 경계심과 적의에 가득 찬 눈빛이 쏟아졌다.
“들어오십쇼.”
레오루가 낡은 오두막의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족장의 집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초라한 집.
백무강이 살던 오두막보다도 더 작고, 낡은 오두막이었다.
“레오, 리루. 잠시 밖에 나가 있거라.”
“응! 마을 사람들한테도 무사하다고 얘기해 주고 올게!”
“저, 저도요.”
레오와 리루가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씁쓸한 표정으로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오루가 입을 열었다.
“아이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아까 받지 않았습니까.”
“몇 번을 해도 부족하죠.”
레오의 아버지라고 하기에 한 성깔 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레오루는 점잖은 성격이었다.
“오진 씨는 인간이라 들었는데… 마경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호루스를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
레오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싸늘한 살기가 오두막 안을 채웠다.
“검은 갈기 부족의 왕은… 무슨 일로 만나시려는 겁니까?”
“그자와 천마 사이에 무슨 연결점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천마라….”
레오루는 눈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천마는 몰라도, 마인족과는 확실히 연결점이 있지요.”
으득.
레오루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씹어뱉듯 말했다.
“그는 왕국을 마인족에게 팔아넘긴 개자식이니깐.”
강렬한 살기가 오두막 안에 휘몰아쳤다.
만약 마력을 지니지 못한 인간이었다면 그대로 심장이 멎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짙은 살기.
점잖은 인상이었던 레오루의 얼굴이 순식간에 포악한 짐승의 것으로 변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오진은 레오루가 폭발하지 않도록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화를 가라앉힌 레오루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백 년 전에… 아니, 백 년도 더 전에 칸 왕국과 마인족 사이에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백무강에게 들었던 말이다.
“수인족들은 마인족들의 침입에 맞서 필사적으로 싸웠죠. 하지만 마인족의 힘은 지나치게 강했습니다.”
기나긴 전쟁.
패색이 짙어진 수인족들에게 마인족은 달콤한 제안을 건넸다.
가장 먼저 항복한 종족은 살아남는 건 물론,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을 거라고.
“…그럼 호루스는 마인족에게 항복한 겁니까?”
“예.”
레오루는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제껏 수인족을 이끌어줬던 ‘칸’을 배신하고, 마인들의 충성스러운 개가 된 겁니다.”
“은색 갈기 부족은….”
“끝까지 맞서 싸웠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왕국에서 추방당한 채, 외딴 숲속에 마을을 지어 숨어 사는 거란 말인가.
“…안타까운 일이군요.”
“아뇨, 명예로운 일이죠.”
고개를 젓는 레오루의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저희는 늑대입니다. 결코 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사의 각오가 느껴지는 목소리.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러면 지금 칸 왕국은 마인족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겁니까?”
“…정확히는 그들을 따르는 추종 세력에게요. 실제 왕국에 거주하고 있는 마인족들의 숫자는 적습니다.”
“몇 명이죠?”
“다섯입니다.”
“예?”
아무리 마인족들이 소수 정예라고 해도 한 나라를 점령하고 있기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원래는 이렇게 적지 않았습니다. 최근 들어 마인족들이 대거 빠져나가기 시작해서 그렇죠.”
“따로 이유가 있습니까?”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대거 이주라.
‘천마와 연관이 있는 건가?’
오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섣부르게 단정 짓기에는 아직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아, 그러고 보니 최근 마족들이 빠져나가면서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이상한 소문이요?”
“예.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입니다.”
“…전쟁?”
오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호루스가 장막 너머의 악마… 아, 죄송합니다. 인간들과 전쟁을 준비한다며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인간들과의 전쟁.
‘이게 카시아가 말했던 건가.’
어찌 됐든.
흘려들을 수 없는 소문이었다.
“물론 아직 소문에 불과합니다. 따로 소집령이 떨어진 것도 아니니까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어가게 됐군요.”
오진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제 자식들을 구해주신 은인인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나저나… 오진 씨는 호루스를 만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글쎄요. 일단 천마와 연관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죠.”
“…있다면?”
“죽여야죠.”
더 큰 재앙이 덮치기 전에.
“…….”
레오루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번뜩였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왕국으로 가실 때까지 마을에서 편히 쉬십시오. 잘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은색 갈기 부족은 복수와 은혜만큼은 잊지 않습니다.”
레오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집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
“한 가지.”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리아크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예.”
레오루는 검은 털을 지닌 리아크를 경계하는 듯 살짝 주먹을 움켜쥐었다.
“후회… 하지는 않나?”
씹어뱉듯, 짓뭉개듯.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응축된 물음.
“무슨 후회….”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는 지금 이런 외진 숲속에서 비참하게 숨어지내고 있다.”
“…….”
“언제 납치당해 노예로 팔릴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벌벌 떨며,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한 채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나?”
“…당신.”
레오루는 눈을 찌푸리며 리아크를 노려봤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예전에 ‘칸’ 님께서 그러셨거든요.”
레오루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자부심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늑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