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8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82화
개와 늑대 (7)
“그럼 편히 쉬십시오.”
오진 일행을 빈 오두막에 안내해준 레오루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몸을 돌렸다.
레오루가 소개해준 빈 오두막은 좁고, 낡았지만 꽤나 공들여서 정리해 둔 듯 내부 자체는 굉장히 깔끔했다.
“흐아! 결국 오늘 왕국에는 못 들어갔네.”
하은이 짐을 풀어놓으며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침대라고 해도 푹신함과는 거리가 먼 나무 침대였지만, 그래도 며칠 동안 숲속에서 야영을 한 오진 일행에게 있어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어우, 피곤해.”
침대에 벌러덩 누운 하은은 번데기가 탈피하듯 침대에 누운 채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언니, 칠칠치 못하게 뭐 하는 짓이에요.”
“아, 왜. 움직이기 귀찮아.”
“쓰읍.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러시면 안 되죠. 오진 씨가 뭐라 생각하겠어요?”
“오지닌 좋아할 것 같은데?”
양말을 획 벗어던진 하은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채 늘씬한 다리를 뻗어 오진의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절로 입꼬리가 승천할 것 같았지만.
“누나, 발 냄새 난다.”
“뭐? 거, 거짓말하지 마 새꺄! 그래도 중간중간에 발은 씻었….”
“진짠데?”
오진은 하은의 맨발을 손으로 잡아 들며 코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녀의 말대로 오랫동안 딱딱한 부츠를 신고 있던 것치곤 별 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괜히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짓궂게 말했다.
“봐봐. 구수한 청국장 냄새가….”
“이 미친놈이 뭐 하는 짓이야!”
하은이 빼액 소리치며 오진의 얼굴을 걷어찼다.
김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얼굴이 달아오른 하은은 침대에서 홱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갔다.
“나, 나 씻고 온다!”
“아, 언니. 저도 같이 가요.”
[본녀도 씻어야겠느니라. 계속 주머니 안에 숨어 있다 보니 먼지가 많이 묻었구나.]당연히 낡은 오두막 안에 목욕탕이나 샤워 시설 같은 건 없었지만.
근처에 개울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씻는 건 문제 되지 않았다.
“훔쳐보면 죽인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밖으로 나가기 전, 하은이 도끼눈을 뜨며 오진을 노려봤다.
“이미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에 무슨.”
“그,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거든?!”
오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사벨라가 살며시 옆으로 다가왔다.
팔을 끌어안으며 찰싹 몸을 밀착한 그녀는 고혹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속삭였다.
“제 몸은… 훔쳐보셔도 괜찮답니다?”
설탕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
이사벨라는 오진의 목덜미를 가볍게 핥으며 검지 끝으로 오진의 가슴을 살살 간질였다.
“수작 부리지 말고 빨리 와, 이년아.”
“앗! 어, 언니!”
하은에게 붙들린 채 질질 끌려가는 이사벨라.
[기다리거라!]베가 또한 목욕 수건(원래는 손수건이지만)을 챙기며 뽈뽈뽈 날아갔다.
오진과 리아크만 남은 집 안.
시끌벅적한 여인들이 모두 사라지니 꽤나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애송이.”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리아크.
“응?”
“네놈은 회귀했을 때… 기회가 다시 한번 주어졌을 때, 두렵지는 않았나?”
갈등에 찬 목소리.
오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낡은 나무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리아크에게 시선을 옮겼다.
깊은 고민에 빠진 그의 눈빛에선 평소와 같은 패기는 보이지 않았다.
“예전 일 때문에 그런 거야?”
굳이 회귀자가 아니더라도.
리아크의 상태가 마경에 들어오면서부터 쭉 이상했다는 걸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원인이 뭔지까지도.
“…그래.”
“너답지 않은 고민이네.”
“시, 시끄럽다 애송이! 네가 뭘 안다고…!”
“알지.”
리아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네가 회귀자기 때문이냐?”
“굳이 회귀자가 아니라도 알았을 거야. 네가 뭘 망설이는 건지는.”
리아크는 자신의 본심을 숨기는 데 지나치게 서툴렀다.
“아까 두렵지는 않냐고 물었지?”
회귀한 적은 없지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던 적은 있었다.
“당연히 두렵지. 무서워 미칠 것 같지.”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면.
또다시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게 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깐.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정론이군.”
“뻔하다고 틀린 말은 아니지.”
오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리아크는 떨리는 눈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어떻게….”
고개를 숙인 채.
쥐어짜듯 말한다.
“어떻게, 넌 그럴 수 있는 거냐.”
오진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자신에게 처참하게 두들겨 맞고, 짓밟히면서도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던 그의 모습.
죽음에 이를 정도의 상처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창을 쥐었다.
“대체, 어떻게….”
오진과 데네브의 사도와의 전투를 떠올린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는데.
굳이 사서 고통받을 필요도, 이유도 없을 텐데.
그는 피범벅이 된 채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는 몸으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
“참아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오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픈 건 견디면 돼. 무서운 건 참으면 돼.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나만 버티면 괜찮으니까.”
그딴 건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까지 그의 삶에는.
참는다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만 가득했었으니까.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네 몸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겠다는 거냐.”
“내 몸까지 신경 쓰면서 소중한 걸 지키는 건 힘들더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 숙인 리아크의 머리 위에 툭, 손을 올렸다.
“넌 어떻게 할래?”
“…….”
리아크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발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나는… 과거 수인족을 이끌었던 ‘칸’이었다.”
“알고 있어.”
레오루와 대화를 나누는 리아크의 모습을 보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마인족들의 침입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채 패배해 버리고 말았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며 흐느껴 울던 늑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 고집 때문에… 늑대로 살겠다는 같잖은 신념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동족이 죽었는지 아나?”
“…….”
“모두, 모두 죽었다.”
가족이었던 이들이.
연인이었던 이들이.
동료였던 이들이.
모두.
자신의 뒤를 따르다 죽었다.
“살아남은 동족들도 굶주림과 공포에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지.”
은빛 갈기 부족의 삶은 한눈에 보더라도 비참했다.
다 쓰러져가는 낡은 오두막에 모여 살며.
굶주림과 공포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한 번만….”
고개를 떨군 리아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한 번만… 고집을 꺾었으면 됐다.”
훨씬 더 많은 동족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남겨진 동족들의 삶이 이토록 비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 한 번만 무릎을 꿇었어도!”
단 한 번만이라도.
늑대가 아닌, 개가 됐다면.
“그래서 걔들이 후회한다고 했던가?”
“…….”
리아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늑대라며 환히 웃고 있는 레오루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 내 탓이다.”
자신이 쓸데없는 신념을 가르쳤기에.
허황된 이상을 불어넣었기에.
그들은 자신을 원망조차 하지 못한 채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럼 리아크.”
오진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리아크를 바라봤다.
“지금 너는 개냐, 늑대냐?”
리아크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으려고 할 때.
콰앙!
“아우~! 개운하다!”
“역시 목욕하니 훨씬 산뜻하네요.”
[뽀송뽀송해졌느니라!]나갔던 세 여인이 집 안으로 돌아왔다.
“엥?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개울은 좀 어땠어?”
“드럽게 차가워서 내가 좀 뎁혔다.”
하은이 시시덕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은 오진의 허벅지 위에 턱 하니 발을 올렸다.
“어때? 이제 냄새 안 나지?”
“어디 보자. 한 번 확인해 볼….”
“진짜 맡지 말고 새꺄!”
하은이 눈을 찌푸리며 오진의 배를 걷어찼다.
“그나저나 오진 씨. 슬슬 식사하셔야 하지 않나요?”
“아, 좀 배고프긴 하네.”
생각해보니 마해의 숲을 빠져나온 이후 한 끼도 먹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사벨라가 배낭을 뒤져 식재료를 꺼냈다.
김시후가 선물해 준 배낭 안에는 공간 확장 기능은 물론 식재료를 상하지 않게 보관해주는 기능도 있었기 때문에 머나먼 마경 땅에 와서도 신선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게 가능했다.
“오늘은 파스타를 만들어드릴게요.”
“난 한식이 땡기는데.”
“어머, 그럼 언니가 만드실래요?”
“크흠. 로제 파스타로 부탁해.”
이사벨라는 냄비에 물을 올리고 야채들을 썰기 시작했다.
물론 이 낡은 오두막 안에 가스불처럼 편리한 기구는 없었지만, 그 부분은 하은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주방에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을 때.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와 함께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리루?”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가녀린 몸집의 수인족 소녀.
처음 봤을 땐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소녀는 목욕을 하고 나왔는지 뽀송뽀송해져 있었다.
“바, 밤늦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무슨 일이야?”
“그, 그게.”
리루는 손에 든 바구니를 만지작거리며 힐끔 오진 쪽을 바라봤다.
“과일을 좀 따왔어요.”
바구니 안에 들어있던 건 갓 따온 것처럼 싱싱한 과일.
겉보기엔 산딸기나 블루베리와 비슷하게 생긴 과일이었다.
“오, 오진 오빠 드시라고….”
살며시 뺨을 붉힌 채 힐끔힐끔 오진을 바라보는 리루.
“오지니만?”
“아, 무, 물론 다른 분들도 같이요!”
쫑긋 귀를 세운 리루가 다급히 말을 바꿨다.
“어머, 귀여워라. 오진 씨를 위해 과일을 따온 거니?”
이사벨라가 방긋 눈웃음을 지으며 리루에게 다가왔다.
한 손에는 식칼을 든 채.
“야, 야, 야! 잠깐만!”
기겁한 하은이 이사벨라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식칼을 낚아챈 하은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너, 너 인마 아무리 그래도 애한테….”
“언니도 참. 무슨 착각을 하고 계신 거예요? 요리 중이라 깜빡하고 들고 온 것뿐이랍니다?”
이사벨라는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고마워. 잘 먹을게.”
오진은 바구니를 받아들며 리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루의 뺨이 산딸기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예. 마, 맛있게 드세요, 오빠.”
바구니 안에 든 과일을 하나 집어 먹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 안에 퍼졌다.
“맛있네.”
“입에 맞으셔서 다행이에요.”
리루가 배시시 웃으며 꼬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아 참… 그리고.”
“응?”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리루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