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93)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93화
막간-연회 (3)
“괜찮으신가요?”
하은을 재워두고 개울로 향하니 세수를 마친 이사벨라가 있었다.
그녀는 한결 또렷해진 눈빛으로 토사물 범벅이 된 오진을 바라보며 쿡, 웃음을 흘렸다.
“…웃어?”
시큼한 토사물에 뒤범벅이 된 오진이 날카롭게 이사벨라를 쏘아봤다.
이사벨라는 최대한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가를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더니, 이내 배를 부여잡으며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가 좀 과음을 한 모양이네요.”
“좀이 아니던데.”
오진은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개울가로 다가가며 이사벨라의 상태를 살피니 하은에 비해 훨씬 멀쩡한 모습이었다.
근데 두 사람이 같이 마셨는데 하은만 저렇게 떡이 될 정도로 취했다는 건….
“…설마 네가 맥인 거야?”
“어머, 그럴 리가요? 연회 분위기가 너무 좋다 보니 언니가 좀 흥분해서 마신 거겠죠.”
앙큼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이사벨라.
오진은 끄응 침음을 삼키며 토사물에 범벅이 된 셔츠를 벗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상체.
알렌이나 이우혁처럼 훤칠한 키는 아니었지만, 장인이 섬세하게 조각한 듯 선명한 식스팩이 돋보이는 몸이었다.
“…꿀꺽.”
달빛 아래 드러난 오진의 상체를 바라보며 꼴깍 침을 삼키는 이사벨라.
그녀는 어딘가 간지럽다는 듯 허벅지를 베베 꼬았다.
“어, 언니는 좀 어때요?”
이사벨라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듯 오진에게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자고 있어.”
“흐응. 내일 일어나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네요.”
“너무 놀리진 말고.”
내가 놀릴 테니까.
“셔츠 주세요. 제가 빨아드릴게요.”
“됐어. 내가 할게.”
이사벨라에게 토사물 범벅이 된 셔츠를 씻게 할 수는 없었다.
오진은 개울가에 쪼그려 앉은 채 찰박찰박 셔츠를 빨았다.
세제 같은 걸 챙겨올 정신은 없었기에 대충 물로만 행군 후 셔츠를 넓게 펼쳐 돌 위에 올려놨다.
“나는 그럼 좀 씻을게.”
몸에 묻은 토사물을 가리키며 슬쩍 눈짓을 보내는 오진.
이제 나 씻을 테니 먼저 가 있으라는 의미가 담긴 눈짓이었지만.
“그럼 제가 씻는 거 도와드릴게요.”
이사벨라는 오히려 먹잇감을 포착한 맹금류처럼 눈을 빛내며 오진을 향해 쪼르르 다가왔다.
“아니 뭔 씻는데 도움까지….”
“오진 씨도 아직 몸이 다 회복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녀의 말마따나.
성좌의 축복은 베가만이 아니라 오진에게도 꽤나 큰 부담을 줬다.
개천을 사용한 이후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태는 아니지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건 사실.
“아니면… 저와 같이 들어가긴 싫으신 건가요?”
슬픈 눈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이사벨라.
오진과 같이 개울가로 들어가기 위한 악어의 눈물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무심코 가슴이 철렁일 정도로 실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끄응.”
예전이라면 몰라도 이제 이사벨라까지 연인으로 받아들인 마당에 딱히 거절할 변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알았어. 아, 대신 옷은 입고 들어가자.”
아까처럼 술에 취한 수인족들이 개울가로 올 위험이 있었다.
“네!”
이사벨라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오진을 따라 개울 안으로 들어왔다.
얼음장 같은 온도의 물이 두 사람의 몸을 차갑게 식혔다.
“와 씨. 진짜 개차갑네.”
오진은 몸에 묻은 하은의 흔적(?)을 닦아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각성자기 때문에 더위나 추위에는 어느 정도 견딜 수 있긴 하지만, 차갑다는 감각 자체는 그대로 남아있는지라 꽤나 고통스러웠다.
“전에는 언니가 물을 데워줬는데 말이죠.”
“그 물을 데워줄 사람 때문에 여기 오게 된 거지만 말이야.”
전격으로도 물을 데울 수 있긴 하지만.
이사벨라까지 개울가 안에 들어와 있는 마당에 전격을 쓸 수는 없었다.
“그럼… 이러면 되지 않을까요?”
이사벨라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오진을 가슴을 끌어안았다.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따스한 살결의 감촉.
“자, 잠깐.”
“움직이시면 안 돼요, 오진 씨.”
이사벨라는 오진의 허리를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더하며 더욱 몸을 밀착했다.
믿기 힘든 부드러움과 함께 따스한 온기가 퍼졌다.
“어머?”
따스함을 넘어 뜨거움을 뿜어내고 있는 오진의 특정 부위를 살짝 내려다보는 이사벨라.
그녀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밀착한 몸을 살짝 위아래로 움직였다.
“크윽!”
오진이 입술을 짓씹으며 침음을 삼켰다.
‘리아크가 하나, 리아크가 둘, 리아크가 셋.’
필사적으로 드넓은 초원을 뛰노는 리아크를 머릿속으로 떠올렸지만 한 번 달아오른 몸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참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누가 올지 모르잖아.”
“후훗. 하긴, 만약 오진 씨의 몸을 다른 년이 보기라도 한다면 죽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니 죽이긴 왜 죽여.
“가만히 있으세요.”
살짝 떨어진 이사벨라가 상냥한 손길로 오진의 몸을 씻겨주기 시작했다.
섬세한 손길이 닿을 때마다 오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사벨라는 그런 그의 반응을 즐기듯 쿡쿡 웃음을 흘리며 이미 토사물이 씻겨나간 몸을 몇 번이나 꼼꼼하게 닦았다.
“슬슬 다 씻긴 것 같네.”
“잠시만요.”
몸을 일으키려는 오진을 붙잡으며 이사벨라가 다시 몸을 밀착했다.
오진의 가슴에 뺨을 가져다 댄 그녀는 성흔이 새겨진 왼쪽 가슴에 귀를 붙였다.
두근, 두근.
심장이 맥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안정돼요.”
“심장 소리가?”
“네. 오진 씨가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거든요.”
배시시 미소 짓는 이사벨라.
그녀는 오진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살며시 눈을 감았다.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두 사람.
이사벨라는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뜨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뭐가?”
“전에 오진 씨한테 거짓말해서요.”
또 그건가.
그 일이 있은 뒤로 귀에 딱지가 들 정도로 들었던 사과였다.
“괜찮다니깐 이제. 뭐, 결과적으로 잘 해결되기도 했고.”
“…….”
이사벨라는 위로하듯 등을 토닥이는 오진의 손길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오진 씨… 저, 살면서 이렇게 행복해질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검은 별의 성흔을 왼쪽 가슴에 새기게 된 이후.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전부터.
내심 행복해지길 포기하고 있었다.
산산이 조각난 희망의 파편을 두 손 가득 움켜쥔 채 흐느껴 울던 나날.
그러던 중, 그와 만났다.
조각난 희망의 파편 사이에서 행복을 싹틔워줄 사람을.
“전부 오진 씨 덕분이에요.”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오진이 말대로라면 전생의 자신은 마르코 패밀리에게 붙잡혀 죽었다고 하지만.
만약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과연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희망에 가득 부푼 나날을 보낼 수 있었을까?
‘아니.’
모두 오진 덕분이다.
자신의 삶은 오진을 만난 그날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렇기에.
“오진 씨는… 제 모든 것이에요.”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리라.
몸도, 마음도, 영혼조차 모조리 그에게 바치리라.
“…이사벨라.”
“하음.”
가슴에 귀를 대고 있던 이사벨라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올리며 오진과 입술을 겹쳤다.
달빛만이 내리쬐는 고요한 개울가.
이사벨라는 거머리처럼 오진에게 찰싹 몸을 붙인 채 탐하듯 그의 혀를 빨았다.
“헤헤.”
긴 입맞춤 후 배시시 웃으며 떨어지는 이사벨라.
“…….”
오진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이건 너무 정도가 심하지 않은가.
“에라, 모르겠다.”
“오, 오진 씨?”
오진은 이사벨라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풍만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를 한가득 움켜쥐며 끓어오르는 충동을 폭발시키려고 했을 때.
“오진 님!”
“어디 계십니까! 여기 오셔서 한잔하시죠!”
“위대한 전사의 무용담을 듣고 싶습니다!”
저 멀리서 오진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치 없는 똥강아지들이네요.”
이사벨라가 살기 어린 눈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찌릿 노려봤다.
무시하기엔 점차 가까워져 오는 목소리.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오진에게서 떨어졌다.
“돌아갈까요?”
“…그래야겠네.”
이성을 되찾은 오진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개울에서 나왔다.
일단 오두막으로 돌아가 젖은 옷을 갈아입은 오진은 고래고래 소리치며 자신을 찾는 은색 갈기 부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사벨라에게도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봤지만, 그녀는 오두막에 남아 곯아떨어진 하은을 보살피겠다 말했다.
그렇게 오진 혼자 찾아간 마을의 중심.
가장 성대하게 연회가 열리고 있는 곳에는 얼큰하게 취한 채 시끌벅적 떠들고 있는 수인족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오셨습니까!”
“위대한 전사가 왔다!”
“칼리케를 쓰러트린 전사!”
은색 갈기 부족들은 오진이 오자마자 눈을 빛내며 우르르 그에게 달려들었다.
“자자, 다들 마음은 알지만 일단 진정해라.”
부나방처럼 모여드는 은색 갈기 부족들을 막아선 레오루.
레오루는 커다란 술잔에 콸콸 술을 담아 오진에게 내밀었다.
“우선 한잔하시죠.”
“감사합니다.”
오진은 밥그릇만 한 술잔에 담긴 술을 원샷으로 들이켰다.
화끈한 알코올 향이 목구멍을 타고 전신에 퍼졌다.
“크하하! 역시 위대한 전사님은 다르구만!”
“휘이이익!”
“이 정도는 돼야 그 칼리케를 쓰러트릴 수 있지!”
화끈하게 술을 들이켜는 오진의 모습에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내지르는 은색 갈기 부족원들.
평소 독주를 즐겨 마시지 않는 오진은 속이 울렁거리는 불쾌함을 느꼈지만.
‘여기선 분위기에 어울려 줘야지.’
마인족이라는 강대한 적과 싸워본 오진의 입장에서 수인족과 친분을 쌓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꼴랑 다섯에 불과한 오진 일행이 앞으로 마인족과 싸워나가기 위해서는 수인족의 전력이 필수 불가결했으니까.
“위대한 전사님은 장막 너머의 세계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소문으로는 끔찍한 악마들이 바글거리는 곳이라 들었는데….”
오진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인 수인족 전사들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들이 좋아할 만한 얘기를 들려줬다.
“여러분의 왕국과 마찬가지로 제가 살던 세계도 한 차례 큰 위협을 겪었습니다.”
뭐, 전사와 힘을 숭배하는 수인족들이 가장 듣고 싶은 얘기가 뭐겠는가.
오진은 최초의 균열이 생기고 마수들이 해일처럼 범람했을 시절의 얘기를 적당히 살을 붙여가며 설명했다.
“역시! 그런 척박한 곳에서 살아남아야 전사님처럼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거군요!”
“마수에 대항해 일어선 별의 힘을 이어받은 전사들이라니… 감동적인 얘기입니다.”
친분을 쌓기에는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고 하지 않던가.
오진은 지구를 침략했던 마수를 마인족에 대입해 설명하며 그에 맞서 싸운 각성자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냈다.
그렇게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무렵.
“안주가 다 떨어졌군요.”
레오루가 빈 접시를 들며 몸을 일으켰다.
“간단하게 먹을 과일이라도 좀 가져오겠습니다.”
“족장님! 그런 건 레오를 시키면….”
“하하. 아이들은 슬슬 잘 시간이지 않은가?”
레오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안주를 가지러 가기 위해 잠깐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레오루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응? 저거 리루 아냐?”
“어서 자러 가지 않고 거기서 뭐 하는 게냐?”
먼발치에 숨어 있는 리루를 은색 갈기 부족원들이 발견했다.
자기 몸집만 한 술통 옆에 쪼그려 앉아 힐끔힐끔 이쪽을 훔쳐보고 있던 리루가 폴짝 뛰어오르며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 그게….”
오진을 바라보며 우물쭈물 말을 더듬는 리루.
“리루 너도 전사님의 무용담을 듣고 싶은 게냐?”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젓는 리루를 보며 수인족 전사 하나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이리 와서 앉아보거라.”
“…예.”
리루가 쪼르르 달려와 술자리에 앉았다.
리루의 어깨에 팔을 올린 수인족 전사가 오진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리루는 어떠십니까?”
“예?”
어떻긴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전사님의 아내분들에 비하면 아직 새파란 애송이지만… 미래가 아주 창창한 아이입니다.”
“하하! 살아생전 족장님의 아내가 마을 최고의 미인이었거든요!”
술에 취한 아저씨들이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 지금 오진 오빠한테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리루가 대경한 표정으로 투닥투닥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수인족 전사가 리루의 귀에 속삭였다.
“그럼 이대로 손만 빨면서 지켜볼 셈이냐?”
“하, 하지만.”
리루는 사과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푹 고개를 숙였다.
“오, 오빠한테는 이미 아내분들이….”
“위대한 전사에겐 그만큼 많은 암컷이 따르게 되는 법이지.”
은근한 목소리로 리루를 부추기는 수인족 전사.
“우리 마누라가 나랑 결혼하기 전에 했던 말이 있는데….”
수인족 전사는 리루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들은 리루가 제 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며 외쳤다.
“그, 그런 말을 어떻게 해요?!”
“크흐흐! 일단 한 번 해보라니까? 수컷이라면 백이면 백 다 넘어올 게다!”
대체 무슨 말이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오진도 꽤나 술이 들어간 탓에 무슨 말을 했는지 들리지 않았다.
“지, 진짜죠…?”
“그래. 나도 그 말에 코가 꿰여서 지금…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후회를 곱씹는 유부남.
리루는 힐끔 오진을 훔쳐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기 오빠….”
“응?”
오진에게 다가온 리루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저, 저, 오빠의 암캐가 되고 싶어요!”
“…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리루의 입에서 나온 폭탄 발언에 오진의 머리가 새하얗게 불탔을 때.
쨍그랑!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라고?”
그곳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던 레오루는 온데간데없이 야차처럼 흉악한 살기를 내뿜는 늑대 한 마리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오진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