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9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99화
하늘 산맥 (5)
[허, 헛것이 아니니라!]자신을 무시한 채 침낭 쪽으로 걸어가는 오진을 보며 버럭 소리쳤다.
오진의 고개가 녹슨 기계처럼 끼기긱 옆으로 돌아갔다.
“…진짜 베가라고?”
부릅뜬 두 눈에 서린 경악의 빛.
베가는 히끅 딸꾹질을 하며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헛것이 맞느니라! 그대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다!]뭐 어쩌라는 거지.
“대체 이런 옷은 어디서…?”
백무강의 집에 개나 고양이 귀 같은 건 있었지만 바니걸처럼 매니악한 코스튬 복장은 없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머리에 쓴 토끼 귀가 달린 머리띠도 백무강의 집에 있던 정교한 모형과는 달리 한눈에 가짜인 게 티가 나는 단순 코스프레용 장신구였다.
[그, 그게….]터질 듯이 뺨을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이는 베가.
[스, 스피카에게 빌렸느니라.]“…처녀자리의 성좌한테?”
처녀자리의 성좌라는 여신이 왜 이런 몸의 라인이 훤히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복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처녀자리가 아니라 치녀자리였나?’
아니, 그래.
백번 양보해서 스피카가 바니걸 옷을 가지고 있었다고 치고, 그걸 베가가 빌려서 입을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대를… 으, 응원해 주고 싶었느니라.]“응원?”
[스, 스피카가 그랬느니라! 이 옷을 입으면 그대의 힘이 두 배, 세 배는 강해질 거라고!]“…….”
아니 이 정신 나간 성좌가 우리 여신님한테 대체 뭔 말도 안 되는 헛소릴 지껄인 거야?
바니걸 복장을 보면 힘이 두 배, 세 배 늘어난다고?
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진짜.
아무리 우리 여신님이 이쁘다고 해도 그렇지 남자가 그렇게 단순한 생물인지 알아?
고작 바니걸 복장을 봤다고 힘이 나게?
[그, 그래서… 어떻느냐? 힘이 나느냐?]“응. 존나 힘이 나.”
지금이라면 칼리케 뚝배기도 깰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로구나.]베가가 안도에 찬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스피카에게 옷을 받을 때만 해도 과연 이걸 입는다고 오진의 힘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 그의 눈을 보니 다행히 효과는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웬 응원?”
아무리 그래도 야심한 새벽에 텐트 안에서 바니걸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는 건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그, 그냥 갑자기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었느니라.]홀로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감정을 스피카에게 들키게 되어 이렇게 됐다는 걸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이건 어디까지나 내 아이를 응원해 주기 위한 일이니라.’
절대 그를 유혹하기 위해서 이런 파렴치한 복장을 입은 게 아니다.
오진도 자신의 입으로 직접 힘이 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하은과 이사벨라가 수인족으로 변장했을 때도 꽤 기뻐했었구나.’
설마.
베가의 머리에 아찔한 상상이 스쳤다.
[나의 아이야.]“응?”
[그대는 호, 혹시… 동물에게 흥분을 느끼는 게냐?]“예?”
뭐요?
[수, 숨길 필요 없느니라!]“숨기긴 뭘 숨긴다는 거야.”
[본녀는 그대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느니라!]“아니.”
뭔 소리 하는 거야 이 여신님.
[하지만 본녀의 토끼 모습을 보고 힘이 난다고 하지 않았더냐!]“그게… 그런 게 아니라.”
대체 어디부터 베가의 오해를 풀어야 할지 머리가 아득해졌다.
[전에도 하은과 이사벨라가 수인족으로 변장한 모습을 지금처럼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았더냐!]“그건 누나랑 이사벨라라서 그런 거고.”
[그러고 보니 전에 티비에서 ‘털 박이’라는 뒤틀린 욕망을 지닌 존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느니라!]어떤 미친 새끼가 티비에서 그딴 말을 지껄인 거야.
“동물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뭐냐. 동물의 흉내를 내는 게 좋다고 할까, 아니 그렇다고 지금 흉내를 내달라는 말이 아니라.”
다시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오르려는 베가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그러니까… 그.”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씌워진 끔찍한 오명을 씻어낼 수 있을까.
인간 사회에 대한 지식이 절망적으로 부족한 그녀에게 동물 귀와 꼬리가 지닌 매니악한 매력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오진은 자세한 설명은 포기하겠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토끼가 아니라, 베가 네가 좋아서 힘이 난 거야.”
[…뭐, 뭐라?]흠칫 어깨를 떨며 동그랗게 눈을 뜨는 베가.
그녀는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이며 오진의 시선을 피했다.
[그, 그런 게냐?]“엉.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취향은 없어.”
[크흠! 그대가 하는 말이니 믿겠느니라!]연신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히는 여신님.
흥분이 가시고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살며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참으로 한심스럽구나.]“아니 진짜 나 그런 취향 아니라니까.”
너무 억울해.
[그, 그대에게 한심스럽다고 말한 게 아니니라!]“엥?”
그럼 누가 한심스럽단 말인가?
[이런 것밖에 그대에게 해줄 수 없는 본녀가 한심스럽다는 말이었느니라.]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젓는 베가.
분명 심각한 분위기긴 한데.
바니걸 복장을 입고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이런 것 정도밖에 없다고 하니까 자꾸 엄한 상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런 말 하지 마.”
[하나….]“이번만 해도 축복이 없었으면 칼리케를 이길 수 없었을 거야.”
그건 칼리케와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굳이 축복이 아니라고 해도 항상 도움이 되고 있어.”
[……]베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오진의 뺨에 손을 올렸다.
[역시 그대는 상냥하구나.]보물을 쓰다듬듯 조심스럽게 뺨을 쓰다듬는 베가.
포근한 감촉과 함께 나른한 피로가 오진을 짓눌렀다.
“하암.”
[아, 그러고 보니 많이 피곤하구나.]“아니,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말이냐.]오진은 눈은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들 것처럼 반쯤 감겨있었다.
[여기 눕거라.]베가가 무릎을 탁탁 두드렸다.
“그건 좀….”
[어허. 누우라고 하지 않았더냐? 아니면 성좌의 말을 거스를 생각이느냐?]엄한 표정을 지으며 오진을 잡아당기는 베가.
안 그래도 몸을 짓누르는 피로에 시달리고 있던 오진이 그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베가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자 얇은 스타킹 너머로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래서야 오히려 잠이 깰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떼어놓으려고 했을 때.
[가만히 있거라.]베가가 살며시 오진의 머리를 눌렀다.
이사벨라처럼 ‘명령’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련만.
어째서인지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오늘 하루도 많이 무리하지 않았느냐. ]상냥한 손길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포근한 봄날 새가 날아와서 지저귀는 듯한 편안함.
수면제를 먹은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스르륵 눈이 감겼다.
베가는 눈을 감은 오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좋은 꿈 꾸려무나, 나의 아이야.]그날 꿈에는 토끼가 나왔다.
* * *
“저기가 하늘 산맥이야?”
뽀삐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숲을 빠져나온 오진 일행 앞에 거대한 산맥이 펼쳐졌다.
정확히는 ‘산맥’이라고 추정되는 형체가.
“왜 하늘 산맥이라고 불리는데 숲에서 봤을 때 코빼기도 안 보이나 싶더니.”
하은이 혀를 차며 산맥이라고 추정되는 형체를 올려다봤다.
뭐, 올려다본다고 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산맥 전체에 안개가 엄청 짙게 깔려 있네요.”
이사벨라가 눈을 찌푸리며 하늘 산맥 주변을 살폈다.
산맥 전체를 뒤덮은 짙은 안개.
마치 비행기를 타고 구름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희뿌연 안개가 산맥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하늘 산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막연하게 더럽게 높은 산봉우리들이 몰려 있어서 그렇게 불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곳이 ‘하늘 산맥’이라 불리는 이유는 바로 저 구름처럼 짙게 깔린 안개 때문인 것 같았다.
[이래서야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되는구나.]“뭐, 그건 리아크가 있으니까.”
짐승처럼 발달한 후각과 감각을 지닌 리아크라면 지금처럼 시야가 차단된 장소에서도 정확하게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아니, 이건 보통 안개가 아니다 애송이.”
“보통 안개가 아니라고?”
“기감을 활성화해봐라.”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무림인처럼 재주 좋게 기감을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지만.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건 있었다.
오진은 사냥개자리의 성흔을 활성화했다.
전신의 감각이 민감해지며 주변 지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려졌어야 했다.
“뭐야 이거.”
사냥개자리의 성흔을 활성화해 감각을 끌어올렸음에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시야는 고작해야 20~30여 미터.
산맥이라면 응당 존재해야 할 풀이나 나무의 냄새도, 벌레나 새의 울음소리도 없었다.
표현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구름 속을 유영하는 듯한 감각.
오진은 눈을 찌푸리며 주변에 짙게 깔린 안개를 바라봤다.
“이 안개가 감각을 차단하는 건가?”
“그런 것 같군”
“하.”
헛웃음이 흘러나올 정도로 최악의 환경이었다.
“백 년 전에는 이런 곳이 없었는데… 언제 생겼는지 모르겠군.”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리아크.
“애송이, 너도 하늘 산맥에 대해선 아는 게 없는 거냐?”
“레오루에게 들은 게 전부야.”
오진은 혀를 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개가 짙게 깔렸다고 해도 멀리서 보면 어느 정도 산맥의 윤곽이 보이긴 했다.
산맥이라는 이름답게 높은 봉우리의 산 옆으로 낮은 봉우리의 산이 계단처럼 이어져 있었다,
어차피 목적은 하늘 산맥을 넘어 드래고니안 왕국에 가는 거니 가장 낮은 봉우리 골라 넘으면 금방 넘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뭐가 낮은 봉우리인지 눈으로 봐서는 모르겠다는 건데.’
눈을 찌푸리며 산맥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사라라라락!
무언가 빠르게 바닥을 기어 다니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거뭇한 무언가가 오진을 향해 쏘아지듯 달려들었다.
“오진 씨!”
이사벨라가 재빠르게 손을 휘두르자 핏빛 칼날이 거뭇한 무언가를 관통했다.
“이건….”
크기는 1미터 정도 될까.
거미와 흡사하게 생긴 외형에 기괴하게 돌출된 턱을 지닌 마수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눈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원래라면 거미의 눈이 있어야 자리에 달팽이와 같은 흉측한 더듬이가 돋아 있었다.
사락! 사락! 사라라라라락!
한 마리가 끝이 아니라는 듯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짙게 깔린 안개 때문에 대체 몇 마리의 마수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오지나.”
감각을 차단하는 정체불명의 안개.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산봉우리와 오길 기다렸다는 듯 초입부터 몰려들기 시작하는 마수.
그리고 이곳에 서식하고 있다는 베히모스까지.
왜 하늘 산맥이 ‘금지’라 불리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냥 우리 돌아가면 안 될까?”
동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