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01)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01화
하늘 산맥 (7)
“…뭐야 이건 또?”
하은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말하는 고양이라니.
물론 이제껏 말하는 고양이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기괴한 외형의 생명체를 여럿 만나왔지만.
평소에도 흔히 볼 수 있는 고양이가 사람처럼 말을 하는 광경은 단순히 생김새가 어떻고의 문제를 넘어선 기괴함이 느껴졌다.
특히 말하는 고양이가 나타난 곳이 마경의 3대 금지 중 하나인 하늘 산맥이라면 더더욱.
“으응?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냥?”
“아뇨, 잘 들립니다.”
오진은 검은 고양이를 살피며 침착하게 말했다.
존댓말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는 잠깐 고민했지만.
눈앞의 존재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대뜸 반말부터 내뱉을 수는 없었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펠리스라고 한다냥.”
“…펠리스라면.”
“고양이자리의 성좌라고 하면 알겠냥?”
오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앞의 검은 고양이를 바라봤다.
‘성좌라고?’
베가처럼 의체 상태로 현신한 건가.
성좌라고 할 만큼 거대한 힘이나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할 차례다냥.”
검은 고양이는 느긋한 걸음으로 오진에게 다가왔다.
“너는 누구냥?”
“…권오진이라고 합니다.”
“인간이냥?”
“예.”
“흐응. 마경에서 인간을 보는 건 엄청 오랜만이다냥.”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오진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도는 펠리스.
분명 이사벨라와 하은도 같이 있건만, 유독 오진에게만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너, 좋은 냄새 난다냥.”
오진에게 바짝 다가온 펠리스가 폴짝 허벅지 위로 뛰어올랐다.
허벅지 위에 올라탄 펠리스가 흔히 ‘꾹꾹이’라고 불리는 동작으로 오진의 배를 꾹꾹 누르며 왼쪽 가슴 가까이에 코를 가져다 댔다.
“성좌님께서는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이 산맥은 내 성령이 지배하는 영역이다냥. 내가 있는 게 이상한 일이냥?”
그녀의 말마따나, 성령이 있는 곳에 성좌가 같이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질문의 핵심은 왜 여기에 네가 있냐는 게 아니라,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접근했냐는 것.
오진은 말을 바꿔 다시 물었다.
“제가 알고 싶었던 건 저를 찾아오신 이유에 대해서입니다.”
“아항. 그 말이었냥.”
펠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진의 가슴을 꾸욱 눌렀다.
“아까 산맥 입구에서 소란이 벌어진 걸 봤다냥.”
거미 마수들과 싸웠던 일인가.
“굳이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아주아주 좋은 냄새가 풍겨서 한 번 와봤다냥.”
좋은 냄새라.
‘흑천인가.’
천마는 ‘위성’으로 격하되어 성소에서 추방당한 성좌들에게 힘을 줘 ‘검은 별’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성좌들에게 줬다는 힘이 흑천과 연관이 있다면.
펠리스가 오진에게 흥미를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사벨라랑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
그녀도 처음 오진을 만났을 때 ‘좋은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졸졸 따라다닌 적이 있었다.
지금 문제는 그 대상이 각성자가 아닌 성좌라는 것.
심지어 이번 하늘 산맥을 넘기로 했을 때 가장 경계했던 베히모스의 주인이 바로 펠리스였다.
“킁킁. 역시 좋은 냄새다냐~”
펠리스는 한껏 늘어진 목소리로 연신 오진의 냄새를 맡았다.
“근데 인간이 하늘 산맥에는 왜 온 거냥?”
한껏 냄새에 취해 오진의 허벅지 위에서 뒹굴고 있던 펠리스가 물었다.
“드래고니안 왕국으로 가려 합니다.”
“흐응. 용인족의 왕국 말이냥?”
“예.”
“거길 왜 가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서 좋은 꼴 보기는 어려울 거다냥.”
“이유가 뭐죠?”
혹시 드래고니안 왕국에 대해 좀 아는 게 있나 싶어 물어보려고 했지만.
“말하기 귀찮다냥.”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는 고양이답게 바로 대답을 피해버렸다.
“그보다 좋은 냄새를 맡았더니 배가고프다냥. 먹을 걸 준비해라냥.”
“…….”
진짜 고양이가 따로 없네.
갑자기 나타나 뜬금없이 먹을 걸 내놓으라는 뻔뻔한 행동에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성좌를 상대로 쓴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거 한번 드셔보실래요?”
고양이가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오진은 배낭에서 참치 통조림을 하나 꺼냈다.
“이건 뭐다냥?”
통조림 캔을 처음 보는 건지 동그랗게 눈을 뜨며 코를 킁킁거렸다.
“아무 냄새도 안 난다냥. 먹을 것 맞냥?”
“여기 입구를 이렇게 따면 됩니다.”
오진은 통조림 캔을 따서 펠리스에게 내밀었다.
펠리스는 꼬리를 곤두세우며 귀를 쫑긋거렸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냥!”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할 것처럼 재빠르게 통조림 캔에 달려든 펠리스가 우적우적 참치를 먹었다.
펠리스가 참치캔을 먹는 사이 오진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쩔 생각이신가요?
라고 묻는 듯한 이사벨라의 눈빛.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생각해 둔 것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진은 탐욕스럽게 참치 통조림을 먹어 치우고 있는 펠리스에게 참치 통조림을 하나 더 따주며 물었다.
“펠리스 님은 하늘 산맥의 지형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으응? 당연히 알고 있다냥.”
우물우물 참치 통조림을 먹으며 대답하는 펠리스.
그녀는 순식간에 참치 통조림 한 캔을 먹어 치운 후 오진이 새롭게 따준 참치 통조림까지 먹기 시작했다.
오진은 알루미늄 캔까지 통으로 씹어먹을 기세로 참치 통조림을 먹고 있는 펠리스를 내려다보며 가늘게 눈을 떴다.
‘잘하면 안내인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늘 산맥의 지형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건 물론 펠리스와 같이 다니면 베히모스에게 습격당할 걱정도 없었다.
‘문제는 저 제멋대로인 고양이를 어떻게 구슬리냐인데.’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지는 않을 것 같았다.
“너, 마음에 들었다냥! 내 집사가 되라냥!”
참치 통조림을 남김없이 먹어 치운 펠리스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오진의 허벅지 위에 폴짝 올라탔으니까.
오진은 예전 사기꾼 시절에 주로 사용했던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허벅지 위에 올라탄 펠리스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입에 기름이 묻었네요.”
“으응? 그러냥?”
“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손수건을 꺼내 펠리스의 입가를 정성스럽게 닦아줬다.
펠리스는 기분 좋다는 듯 그르릉거리며 오진의 허벅지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아 누웠다.
“배도 부르고… 냄새도 좋고. 행복하다냥.”
“펠리스 님은 이곳에서 쭉 혼자 계셨던 겁니까?”
“베히링이랑 같이 있었다냥.”
베히링이 베히모스를 말하는 건가.
“뭐, 같이 있었다고 해도 실제 하늘 산맥에서 살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됐다냥.”
“얼마 안 되셨다고요?”
“예전에는 이렇게 의체 상태로도 현신할 수 없었다냥.”
아.
그러고 보니 율법의 제약이 약해지기 전에는 의체 상태로 현신이 가능했던 건 베가 정도밖에 없었지.
‘그럼 다른 검은 별의 성좌들도 펠리스처럼 의체 상태로 현신할 수 있게 된 건가.’
꽤나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검은 별의 성좌들은 그들에게 힘을 준 천마를 따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일단 베가처럼 의체 상태로는 큰 힘을 발휘 못 하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성좌가 아닌 성령은 상대적으로 율법의 제약을 덜 받으니까.
“끄응! 간만에 잘 쉬었다냥!”
30분 정도를 더 오진의 허벅지 위에 뒹굴었을까.
펠리스가 만족했다는 듯 폴짝 점프해 내려갔다.
“드래고니안 왕국으로 간다고 했냥?”
“예, 그럴 생각입니다.”
“그럼 내가 안내해 주겠다냥.”
먼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안내해 주겠다니.
이런 횡재가 다 있냐,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으응?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냥. 거짓말 아니다냥.”
“…펠리스 님을 의심한 건 아닙니다.”
사실 의심하긴 했다.
갑자기 처음 만나는 성좌가 나타나서 길을 안내해주겠다고 하는데 냉큼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으니까.
“고양이자리의 이름을 걸고 너희들을 산맥 밖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맹세하겠다냥.”
펠리스가 하은과 이사벨라, 리아크, 마지막으로 뽀삐까지 돌아보며 말했다.
성좌에게 있어 ‘별의 이름’을 건 맹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오진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마음속에 남아있던 꺼림칙한 의심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감사합니다.”
“후후. 집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냥.”
펠리스는 기쁘다는 듯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앞장서 걸었다.
잠시 앞장서 걸어가는 펠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오진 일행이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애송이.”
리아크가 조심스럽게 오진 옆에 따라붙었다.
“네놈이 돌아가는 길은 외워두고 있어라. 나는 중간에 매복이 있는지 확인하겠다.”
“알았어.”
아무리 별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고 해도 펠리스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는 길목마다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흔적들을 남겼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던 걸까.
펠리스는 오진 일행을 데리고 산맥에서도 가장 낮은 봉우리의 산을 넘어 드래고니안 왕국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저기 안개 너머 길 보이냥?”
“아, 예. 보입니다.”
낮은 봉우리라고 해도 일단 높은 곳에 올라오자 저 아래로 안개에 뒤덮여 있지 않은 길이 보였다.
“저기로 쭉 가면 용인족들의 왕국에 도착할 수 있다냥.”
“…감사합니다.”
이렇게 순순히 길을 안내해 줄 줄이야.
계속 펠리스를 의심했던 게 살짝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너희가 가야 나도 마음 편하게 행복한 시간을 누리지 않겠냥.”
베히모스와 같이 지내는 시간이 그렇게 행복했던 걸까?
드래고니안 왕국의 정보나 천마에 대한 것 등 여러 가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언제 또 펠리스의 기분이 제멋대로 바뀔지 몰랐다.
‘여기선 그냥 얌전히 산맥부터 빠져나가자.’
펠리스의 도움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하늘 산맥을 돌파할 수 있게 됐으니 필요한 정보는 드래고니안 왕국에 가서 직접 구하는 게 더 좋으리라.
“빨리 가라냥.”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진이 꾸벅 인사를 하며 몸을 돌렸을 때.
“응?”
펠리스가 손톱을 세워 오진의 바지를 붙잡았다.
“넌 어디 가냥?”
어딜 가냐니.
여기까지 안내해 준 본인이 그걸 물어본단 말인가?
“…드래고니안 왕국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는 이제 내 집사가 되지 않았느냥. 다른 애들은 보내고 빨리 나랑 같이 놀러가자냥!”
“…….”
그래.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싶었다.
“아까 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응! 맹세했다냥! 집사랑 같이 온 애들을 산맥 밖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맹세했다냥!”
펠리스는 거추장스러운 방해꾼을 바라보듯 하은과 이사벨라, 리아크, 뽀삐를 돌아봤다.
“…하.”
절로 터져 나오는 헛웃음.
‘그러니까, 애초에 제 발로 길을 안내해 주겠다고 나선 것도 나랑 다른 애들을 한시라도 빨리 떨어트려 놓으려고 했던 거였군.’
이제야 제멋대로기 짝이 없는 고양이가 왜 순순히 길을 안내해 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는 이제 고양이자리의 성흔을 받고 내 집사가 되는 거다냥!”
펠리스는 한껏 기대에 부푼 목소리로 외쳤다.
오진이 뭐라 반론을 하기도 전에.
[그건 안 되겠구나.]오진의 주머니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베가가 날아오르며 펠리스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이 아이는 이미 거문고자리의 성흔을 이어받은, 본녀의 아이니라.]베가는 오진의 어깨 위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리고.
“거문고자리…?”
사납게 일그러지는 펠리스의 얼굴.
검은 고양이는 베가를 노려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부릅뜬 고양이의 눈동자에 새겨진 감정은.
“왜 북극성의 성좌가 여기 있는 거냥?”
더없이 질척한 질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