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0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02화
하늘 산맥 (8)
[우문(愚問)이로구나.]베가는 펠리스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거문고자리의 성흔을 이어받은 유일한 사도 옆에 직녀성이 함께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거문고자리의 사도…?”
펠리스의 시선이 오진을 향했다.
“너, 북극성의 사도였냥?”
살갑게 다가왔던 전과는 달리 선명한 적의가 느껴지는 목소리.
오진은 언제든 단탈리안을 뽑을 수 있도록 오른팔을 뒤로 슬쩍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실망했다냥! 오랜만에 집사로 삼고 싶은 인간을 찾았는데 하필 북극성의 사도였다니!”
분하다는 듯 앞발을 내려찍으며 사납게 이를 드러내는 펠리스.
그녀는 질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베가를 찌릿 노려보더니 손톱을 세워 신경질적으로 땅을 긁었다.
“당장 거문고자리의 성흔을 포기하고 내 집사로 와라냥!”
이젠 아예 막무가내로 나오겠다는 건가.
고양이자리의 성좌가 질투심이 강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상식까지 없을 줄은 생각 못 했다.
오진이 단탈리안을 뽑아 들며 뭐라 한 마디 내뱉으려고 했을 때.
[…지금 본녀의 아이에게 거문고자리의 성흔을 포기하라고 하였느냐?]서릿발이 휘몰아치는 듯 차가운 목소리.
처음 베가를 만났을 때처럼 감정이 닳아 없어진 것 같은 무기질적인 눈빛이 펠리스를 향했다.
“흐, 흐냣?!”
싸늘한 살기를 느낀 펠리스가 털을 바짝 곤두세우며 뒷걸음질 쳤다.
베가는 물러서는 펠리스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을 이었다.
[본녀의 아이가 뭐가 아쉽다고 거문고자리의 성흔을 버리고 고양이자리의 성흔 따위를 얻겠느냐?]“뭐, 뭐라고냥?”
[성소에서 추방당했다고 하나 그대 또한 한때는 성좌의 일원이었을 터.]무기질적이었던 눈빛에 조롱의 빛이 감돌았다.
[북극성이 지닌 권위에 어딜 감히 위성 따위가 대들려 하느냐?]“…….”
펠리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고 지껄였냥?”
[본녀의 아이는 감히 위성 따위가 넘볼 아이가 아니라 했느니라.]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깐깐한 재벌집 시어머니와 같은 말투.
여기서 ‘이 도둑고양이가!’라고 소리쳐 주면 에피소드 하나 뚝딱 나올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오진은 베가와 펠리스 사이를 돌아보며 쯧, 혀를 찼다.
‘이건 말로 해결하긴 글렀구만.’
펠리스도 펠리스였지만.
이번에는 베가가 필요 이상으로 흥분한 탓이 컸다.
과거 성소에서 추방당해 ‘위성’으로 격하된 펠리스의 입장에서 지금 베가의 말은 말 그대로 역린을 건드리는 말이었을 테니.
‘거문고자리의 성흔을 포기하라는 말에 너무 열이 올랐나 보네.’
베가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막무가내로 나오는 펠리스의 태도에 오진 자신도 꽤나 열이 올라 있었고, 애초에 침착하게 대화를 나눈다고 펠리스가 들어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차라리 이럴 땐 아싸리 도발을 해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것도 좋은 전법이리라.
“리아크, 이사벨라, 누나.”
펠리스가 베가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오진은 나지막이 일행을 돌아봤다.
“아까 내려가는 길 봐뒀지? 내가 신호하면 그쪽으로 쭉 달려가.”
“저 떼껄룩 새끼는 가만히 두게?”
“어차피 의체일 텐데 싸워서 뭐 하려고.”
그리고 펠리스가 이곳에 있는 만큼 근처에 베히모스가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 안개 속에서 성령과 싸우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싸운다고 해도 우선 안개를 빠져나가는 것부터.”
“예. 그렇게 해요.”
“오키. 그럼 냅다 튀면 되는 거지?”
오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셌다.
펠리스가 베가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소리치려는 찰나.
“지금!”
오진 일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늘 산맥 밖을 향해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일행 중 유일하게 작전에 관해 설명 듣지 못한 베가는 도망치는 오진 일행을 따라오지 못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베가는 성소로 돌아갔다가 다시 오면 되니까!’
베가가 소환되는 위치는 그녀가 건네준 은색 펜던트 주변.
그리고 그 펜던트는 지금 오진의 목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일행과 떨어진다고 해도 다시 성소로 돌아갔다가 오면 베가와 만날 수 있었다.
“이쪽이다 애송이!”
선두에선 리아크가 짙은 안개 사이를 빠르게 질주했다.
서로의 몸을 묶은 와이어가 팽팽해질 정도로 거리가 벌려졌을 때.
사락, 사락, 사라라라락!
안개 너머의 수풀이 크게 요동치며 무언가 빠른 속도로 몰려드는 게 보였다.
“어딜 도망치려고 그러냥!”
저 멀리서 펠리스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오지나! 그때 봤던 거미 새끼들이야!”
“제길.”
펠리스가 뭔가 수를 써뒀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반응할 줄이야.
“제가 포위를 뚫을게요!”
이사벨라가 손톱으로 손목을 길게 그으며 앞으로 내밀자 핏빛 폭풍이 몰려드는 마수들을 휩쓸었다.
순식간에 수백 마리에 달하는 마수들의 몸이 갈가리 찢겨나가며 길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애송이, 숫자가 너무 많다!”
순식간에 몰려든 수백, 수천 마리의 마수 무리가 다시 길을 막아섰다.
처음 상대했을 때보다 몇 배 되는 숫자의 마수들.
거미 마수만 있는 게 아니라 처음 보는 마수들도 섞여 있었다.
‘하늘 산맥에 있는 마수란 마수들은 죄다 몰려온 건가.’
오진은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짙게 깔린 안개와 사방을 포위하고 있는 마수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내가 위쪽에서 길을 알려줄게! 그쪽으로 가!”
“오, 오지나!”
오진은 일행과 연결된 와이어를 나이프로 끊어내고 뇌흔 밟기를 사용해 높이 날아올랐다.
‘직녀성의 사냥개!’
파지지직!
푸른 뇌전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주변을 포위하고 마수 무리의 움직임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안개 때문에 감각이 둔화된 상태긴 했지만, 흑천의 구름처럼 완벽하게 모든 감각들을 차단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쪽에 마수가 덜 몰려 있는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오른쪽으로 100미터! 그다음에 왼쪽으로 꺾어서 달려!”
“예!”
이사벨라가 앞으로 달려 나가며 양팔을 넓게 펼쳤다.
핏빛으로 이뤄진 칼날이 사방으로 쏟아지며 앞으로 가로막은 마수들을 무차별적으로 쓸어버렸다.
“불이여!”
하은도 질 수 없다는 듯 연초를 꺼내 마수 무리를 향해 겨눴다.
해일처럼 거대한 불길이 마수들을 덮쳤다.
“이쪽이다!”
하은과 이사벨라에 비해 다수를 상대하는 능력은 많이 떨어지는 리아크는 길잡이 역할을 자처하며 오진이 지시해준 방향대로 일행을 이끌었다.
“오지나! 너도 빨리 내려와!”
“알았어!”
오진은 뇌흔 밟기를 해제하고 바닥에 착지했다.
일행과 합류한 오진은 몰려드는 마수들을 쓸어버리며 리아크의 뒤를 따랐다.
이대로라면 무리 없이 포위를 빠져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때.
“도망칠 생각 말라 했다냥!”
펠리스의 외침이 다시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우우우우웅!
검은빛 아우라가 넓게 펼쳐 나가며 일정 범위를 원형으로 뒤덮었다.
‘이건.’
오진도 몇 번 본 적 있었던 광경.
“미친… 성역을 쓴다고?”
성역(星易).
성좌의 권능으로 이뤄진 공간.
물리 법칙은 물론 삶과 죽음의 순리까지 뒤틀어버리는 절대의 영역이 오진을 집어삼켰다.
‘이 정신 나간 고양이가!’
율법의 제약이 없는 성소라면 모를까.
성소 밖에서 성역을 쓰게 되면 어떤 대가가 뒤따르게 되는지 모를 리 없을 텐데.
북극성의 성좌인 베가만 하더라도 무려 백 년 동안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제약에 걸리게 됐다.
그보다 현저히 격이 낮은 펠리스라면 이 자리에서 존재 자체가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큰 제약을 받게 되리라.
“크윽!”
오진은 강하게 몸을 잡아끄는 힘을 견뎌내며 성역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흥! 소용 없다냥!”
어느새 바로 뒤까지 다가온 펠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오진 씨!”
“오지나!”
이사벨라와 하은이 펠리스의 성역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오진에게 달려왔지만.
“읏!”
“제, 젠장! 와이어가!”
미리 몸에 묶어두고 있던 와이어가 서로 엉키는 탓에 아주 살짝 발걸음이 늦춰지고 말았다.
1초 만에 와이어를 끊어내고 오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지만.
우우우우웅!
이미 펠리스가 펼친 성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난 뒤였다.
물론.
그 안에 집어 삼켜진 오진과 함께.
* * *
“크으.”
오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며 눈을 떴다.
짙은 안개가 깔린 숲.
하늘 산맥인 건 확실했지만, 방금 전까지 있던 공간은 아니었다.
‘공간 이동한 건가.’
어디로, 라는 의문이 머리를 스치기도 전에.
[나의 아이야!]펜던트가 빛나며 베가가 나타났다.
오진이 생각한 대로 성소로 돌아갔다가 다시 현신한 것 같았다.
[괘, 괜찮으냐? 다친 곳은 없느냐?!]빠르게 날아온 베가가 오진의 얼굴을 더듬었다.
오진은 허둥지둥하는 베가를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다친 곳은 없으니까.”
[하아. 다행이구나.]조금 머리가 진정됐는지 베가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긴….]“여긴 우리가 머물고 있는 ‘둥지’야”
안개 너머로 펠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가는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펠리스를 향해 일갈했다.
[서, 성역을 쓰다니!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게냐!]“흥! 내가 뭐 아무 생각도 없이 성역을 쓴 줄 알아?”
콧방귀를 뀌며 어깨를 으쓱이는 펠리스.
“그분의 힘이 있으면 공간을 살짝 이동시키는 정도의 권능은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그분의 힘이라니.
“…천마를 말하는 거냐?”
펠리스가 적이라는 게 확실해진 이상 존칭을 사용할 이유는 없었다.
“어머? 알고 있었냐?”
능청스럽게 웃으며 입가를 비틀어 올리는 펠리스.
오진은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찌푸렸다.
검은 별의 성좌와 천마와 연관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성역’을 율법의 제약을 받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성역까지 사용해서 날 여기로 끌고 온 이유는 뭐지?”
“아까 말하지 않았냥?”
펠리스가 눈을 빛내며 오진의 몸을 위아래로 핥듯이 바라봤다.
“널 내 집사로 만들겠다고.”
“…….”
이 미친 고양이가.
오진은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려는 걸 억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사도가 될 생각은 없는데?”
“후후. 과연 언제까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냥.”
숨겨둔 한 수가 있다는 듯 여유롭게 미소 짓는 펠리스.
그리고 그녀의 숨겨둔 ‘한 수’는 생각보다 빠르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쿵, 쿵, 쿵.
안개 너머로 들려오는 묵직한 발소리.
“크르르르르.”
영혼을 옥죄는 듯한 섬뜩한 울음소리가 안개 너머로 들려왔다.
아직은 안개에 가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보지 않아도 안개 너머의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베히모스.”
하늘 산맥의 지배자가 짙은 안개를 헤치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