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05)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05화
하늘 산맥 (11)
몸이 타오를 듯 뜨겁다.
세포 하나하나가 요동치는 게 느껴진다.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혈류가 몸을 돌아다닐 때마다 이제까지의 육체가 ‘다른 것’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낡고 연약한 세포 조직은 사라지고 그곳을 성흔의 마력으로 이뤄진 새로운 세포가 대체한다.
비유하자면 낡은 아파트의 내부를 리모델링하는 듯한 감각이랄까.
겉으로 보기엔 큰 차이 없었지만, 그 내부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게 육체의 재구성인가.’
9성에 도달한 각성자가 겪는다는 육체의 재구성.
세포 하나하나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감각은 오진으로서도 익히 경험해 본 적 없는 색다른 감각이었다.
[육체의 재구성으로 인해 사용 가능한 ‘흑천’의 힘이 대폭 증가합니다!]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
흥미로운 얘기였지만, 당장은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지금 흑천의 힘을 사용할 일은 없었으니까.
“후우.”
낮은 숨을 토해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활시위를 당기듯 뒤로 젖혔던 오른팔을 거칠게 휘둘렀다.
콰자자자작!
단순한 주먹질 한 방에 푸른 뇌전이 해일처럼 쏟아져 나오며 전방을 휩쓸었다.
“크아아아아아!”
베히모스는 푸른 뇌전의 해일에 휩쓸리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진을 향해 돌진했다.
하늘 산맥의 지배자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강맹한 모습이었지만.
“어디, 이번에는 ‘다리’ 쪽도 한번 써볼까?”
오진은 푸른 뇌전으로 변한 왼쪽 다리를 들어 올려 거칠게 발을 굴렀다.
잔잔한 호숫가에 돌덩이를 집어 던진 듯 대지가 출렁이며 뇌전이 솟구쳐 올랐다.
“쿠어어어어!”
황소처럼 우직하게 돌진하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갑작스럽게 발아래에서 솟구친 뇌전을 피하지 못한 베히모스가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베, 베히링?”
전투를 지켜보던 펠리스의 입에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분노한 베히모스에 의해 오진이 갈가리 찢겨 죽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오진의 몸 일부가 뇌전으로 바뀌더니 전황이 순식간에 뒤집혀 버렸다.
“저, 저건 대체 뭐냥?!”
따지듯 베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의 아이야….]그곳에는 긴장이 풀렸는지 털썩 땅에 주저앉는 여신의 모습이 보였다.
베가는 축축해진 눈가를 손으로 닦으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펠리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베가를 바라봤다.
“…이럴 줄 알고 있던 거 아니었냥?”
[알고 있던 건 아니니라.]베가는 나지막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본녀의 아이를 믿고 있었을 뿐.]오진이라면.
그녀가 알고 있는 역천의 별이라면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야말로 가장 찬란하게 타오를 거라고.
[…항상 그대는 본녀의 믿음을 이뤄주는구나.]이제는 베히모스를 오히려 밀어붙이기 시작한 오진을 바라보며 베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라면 이미 몇 번을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9성이라는 벽을 넘으며 다시 일어서다니.
이 얼마나 갸륵하고, 기특한 모습인가.
[…….]이제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베가는 얼굴을 붉힌 채 멍하니 오진을 바라봤다.
찬란히 빛나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아니.
알 수 없는 건 아니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애써 무시하고 있을 뿐.
“너 설마…?”
펠리스가 뭔가를 눈치챈 듯 입을 쩍 벌렸다.
“미, 미치기라도 한 거냥? 자신의 아이한테 그런 감정을 품다니!”
자유분방해 보이는 성격과 달리 의외로 고지식한 면이 있는 걸까.
펠리스는 먹던 음식 속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는 걸 본 듯한 눈빛으로 베가를 노려봤다.
“하! 아까 아이를 위해 율법을 어기니 뭐니 했던 것도 다 시커먼 속내 때문이냥?”
펠리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날카롭게 베가를 노려봤다.
최근에 와서는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 성좌들 사이에선 자신의 아이에게 사사로운 감정을 품는 건 터부시되는 일이었다.
인간 사회로 비유하면 근친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시간이 흐르며 성좌들의 인식도 점차 변해갔지만, 아득한 과거에 성소에서 추방당했던 펠리스의 입장에선 그 변화를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구나.]베가는 씁쓸한 표정으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원래라면 세계의 명운이라거나, 대의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이 북극성의 성좌가 지닌 의무이건만.
자신은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율법을 어기고 소멸할 각오를 새기고 있었다.
“한심하다냥! 어떻게 성좌가 자신의 아이와 맺어질 생각을…!”
[한심하다는 건 본녀도 알고 있느니라.]이런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마음처럼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더구나.]두근거리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린 채.
직녀성의 여신은 뜨거운 눈으로 자신의 아이를 응시했다.
“…미, 미쳤다냥.”
펠리스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베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펠리스를 돌아봤다.
성좌의 삶은 길다.
지금은 검은 별이 되어버린 고양이자리의 성좌라 하더라도, 언젠간 이런 감정들에 대해 알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리라.
“흥! 천마님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냥!”
펠리스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니라.]왜냐하면.
[천마는 본녀의 아이의 손에 죽을 테니.]베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펠리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흐냥?!”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려 했던 펠리스가 갑자기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는 다급히 베히모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 베히링!”
베가와의 대화에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베히모스는 바닥에 처박혀 쓰러진 채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 일어나라 베히링!”
성령은 성좌의 영혼 일부를 지니고 있었다.
성령이 죽게 된다면 성좌로서도 큰 타격을 입게 되리라.
하지만 펠리스의 애탄 부름에도 베히모스는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아, 하아.”
오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베히모스를 향해 걸어갔다.
“이제… 끝이다.”
파지지지직!
뇌신의 팔에서 사나운 푸른 뇌전이 타올랐다.
“멈춰라냥!”
펠리스가 다급히 오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진은 펠리스를 무시한 채 뚜벅뚜벅 베히모스를 향해 걸어갔다.
“머, 멈추라고 했다냥!”
[멈추라고 말만 한들 누가 멈추겠느냐?]조용히 펠리스를 향해 날아간 베가가 팔짱을 끼며 펠리스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자신의 아이를 구하고 싶다면 성역을 써서 구하면 되지 않으냐?]“그, 그건.”
펠리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마의 힘으로 율법의 제약을 약화할 수 있다고 하지만 성역을 연달아 두 번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능’은 했다.
그 대가로 존재가 소멸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율법의 제약이 두려운 게냐?]“…….”
베가는 입을 꾹 다문 채 분노에 몸을 떨고 있는 펠리스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아까 전에 자신에게 뭐라고 말했더라.
기억을 되짚으며 차가운 조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 이익!”
펠리스는 한껏 찡그린 얼굴로 베히모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를 향해 걸어가는 오진의 앞을 가로막은 채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움직이지 마라냥! 한 걸음 더 움직인다면… 성역을 사용하겠다냥!”
“…….”
베히모스를 향해 걸어가던 오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성역을 사용하겠다고?”
“그렇다냥!”
“존재가 소멸할지도 모르는데?”
“흐, 흥! 베히링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냥!”
“…….”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짓말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흔들리는 눈빛에서, 높아진 목소리에서, 머뭇거리는 표정에서.
펠리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거, 거짓말 아니다냥!”
“그래?”
그렇다면.
“어디 한번 막아봐.”
한탄 사도를 지키기 위해 존재의 소멸까지 각오하며 성역을 펼치는 정신 나간 성좌는, 오진이 알고 있기로는 베가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파지지지직!
오른팔에 맺힌 푸른 뇌전의 격류가 베히모스를 향해 쏟아졌다.
“아, 안 된다냥!”
펠리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끝까지 성역을 사용하는 일은 없었다.
“크르르르….”
베히모스의 숨소리가 점차 옅어지더니 이내 뚝 끊어졌다.
“베, 베히리이이이잉!”
펠리스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베히모스에게 달려갔다.
성령이 죽은 영향일까.
펠리스의 몸이 점차 희미해지며 사라져가고 있었다.
“두, 두고 봐라냥! 집사고 뭐고 너는 나중에 꼭 죽여 버리겠다냥!”
살기를 뿌리며 오진을 노려보는 펠리스.
[해볼 수 있으면 해보거라.]그런 펠리스의 앞에 베가가 내려앉았다.
[그때는 본녀의 힘으로 그대를 막을 테니.]설사.
그 대가로 자신의 존재가 소멸한다 할지라도.
“…허, 헛소리다냥! 결국 너도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못 할 거다냥!”
[그렇게 생각하느냐?]베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렇다면 거문고자리의 이름에 맹세하겠느니라. 본녀의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본녀의 존재가 소멸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아이를 구하겠노라고.]“…지, 지금 설마 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거냥?”
별의 이름을 건 맹세.
성좌에게 있어서 이건 허울뿐인 맹세가 아니었다.
맹세를 어기가 되면 성좌로서의 힘이 일부 소멸하고 ‘격’이 떨어지게 된다.
만약 저 맹세를 어기게 되는 순간.
더 이상 베가는 ‘북극성’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
그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베가는 태연하게 별의 이름을 건 맹세를 입에 담았다.
“두, 둘 다 제정신이 아니다냥!”
펠리스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시는 보지 말자냥!”
방금 전에 한 복수 예고는 어디에 팔아치웠는지 펠리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점차 희미해지던 의체의 몸이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다.
“…베, 가.”
긴장이 풀린 걸까.
오진은 풀썩 그 자리에 쓰러졌다.
[괘, 괜찮으냐?]베가는 재빠르게 본신의 모습으로 형태를 바꾼 후 쓰러지는 오진을 붙잡았다.
중간에 육체의 재구성이 이뤄진 덕분일까, 생각보다 상처는 심하지 않았다.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했던 가슴의 상처도 아물었고, 물어뜯겼던 팔다리도 재생되어 있었다.
[으음?]베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재생된 오진의 팔다리를 바라봤다.
아무리 9성에 도달해서 육체의 재구성이 이뤄졌다 한들 잘려 나간 팔다리가 재생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크윽.”
[아, 자, 잠깐 기다리거라. 포션을 먹여주겠느니라.]오진의 슬링백 안에서 포션을 꺼낸 베가는 조심스럽게 병을 기울여 그의 입에 흘려 넣었다.
“고마… 워.”
포션의 진통 효과가 시작된 건지 오진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베가는 잠든 오진의 머리를 허벅지 위에 올린 채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대를 도와주지 못했구나.]베가는 슬픈 눈으로 오진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잘근 입술을 깨물며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두근, 두근.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게 느껴졌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올랐다.
[마음을 억누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북극성의 성좌가 한낱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토록 가슴앓이할 날이 오다니.
드넓은 신전에서 홀로 고독을 곱씹고 있을 때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의 아이야.]잠든 오진을 향해 속삭인다.
[본녀는 그대를 사랑하느니라.]꾹꾹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목소리에 담는다.
물론, 이 목소리가 그에게 닿을 일은 앞으로 영영 없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억누르고 있던 마음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행복한 감정이 차올랐으니까.
[편히 쉬거라, 나의 아이야.]베가는 오진의 이마에 입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멈칫.
이마에 닿으려던 입술이 갑작스럽게 멈췄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베가는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옮겼다.
잠든 그의 입술이 있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