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06)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06화
막간–여신의 일탈 (1)
“크으으….”
혈관 안으로 뾰족한 바늘이 흘러 다니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차올랐다.
신음을 흘리며 힘겹게 눈을 떴다.
“오, 오지나!”
저 멀리서 하은의 목소리와 함꼐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괘, 괜찮아? 응? 괜찮은 거지?”
“흐, 흔들지 마.”
“아.”
하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진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널찍한 텐트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어디야?”
“아직 하늘 산맥이야.”
“내가 있는 곳은 어떻게 찾은 거야?”
베히모스의 둥지가 하늘 산맥 어느 쪽에 박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짙게 깔린 안개 때문에 찾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쪽에 안개가 갑자기 막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더라고.”
“아.”
그러고 보니 베히모스가 마지막 돌진을 하기 전에 안개를 흡수했었지.
“그리고 베가가 도와줬어.”
“베가가?”
“응. 하늘에 대고 약간 신호탄? 같은 걸 계속 쏴주더라고.”
“그렇구만. 누나 쪽은 어땠어? 거기도 마수 엄청 몰려 있었잖아.”
“뭐… 여기는 벨라가 아주 빡돌아서 다 죽여 버렸어.”
순간 피에 젖은 채 줄기줄기 살기를 흩뿌리고 있는 이사벨라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소름이 퍼졌다.
아마 펠리스도 이사벨라의 눈 뒤집힌 모습을 봤다면 꼬리를 말고 도망치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너 혼자 베히모스를 쓰러뜨린 거야?”
“그렇지 뭐.”
“…그 기술, 썼어?”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채 가늘게 어깨를 떠는 하은.
오진은 피식 웃으며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풀어 왼쪽 가슴에 새겨진 성흔을 그녀에게 보여줬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꼭지를 보여주고 지랄이야?!”
“아니. 성흔을 보라고 성흔.”
“우리 오지니 꼭지쓰가 귀엽긴 하네.”
콕콕.
“찌르지 말고 이 미친 누나야.”
“그럼 핥아줄까?”
“아니.”
나 정신 나갈 것 같아.
“운 좋게 9성이 되면서 이길 수 있었어.”
“그럼 그 기술은 안 쓴 거지?”
“엉.”
“…휴우.”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을 풀려 가슴을 쓸어내리는 하은.
걱정했던 게 다 해결됐다는 듯 한껏 풀어진 표정을 지은 하은이 물에 적신 수건을 들어 정성스럽게 오진의 몸을 닦아줬다.
“진짜… 누나 걱정시키지 말라 했지?”
“미안.”
“뭐, 이번 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니까 그냥 넘어가 줄게.”
펠리스가 성역까지 사용하며 오진을 베히모스의 둥지로 납치해 갈지 어찌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아, 그러고 보니 그 건방진 고양이 새끼는 어딨어?”
“돌아갔어.”
돌아간 곳이 성소가 아니라 다른 곳이겠지만.
“아으! 하여간 다음에 만나면 그 새끼 중성화부터 시켜 버릴 거야!”
하은이 서슬 퍼런 살기를 흘리며 까득 이를 갈았다.
오진은 씩씩 화를 내는 하은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화를 내주는 모습이,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사벨라는?”
“근처에 남은 마수들 없나 둘러보러 갔어. 곧 돌아올 거야.”
“나 기절한 지 얼마 정도 지났는데?”
“하루 정도?”
상처가 컸던 던 것에 비하면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육체의 재구성 덕분인가.’
괜히 9성 이후 각성자부터 ‘고위 각성자’라고 따로 분류하는 게 아니라는 듯, 신체 능력이 전반적으로 껑충 상승한 게 느껴졌다.
신체 능력뿐일까.
오진이 지닌 비대한 마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았던 마력 회로 또한 도로 공사를 한 듯 넓어져 있었다.
‘그래도 지닌 마력 양에 비하면 많이 좁긴 하지만.’
그건 오진의 마력 회로가 좁은 게 아니라 오진 본인이 지닌 마력 양이 다른 각성자들과 비교해 비상식적일 정도로 많은 탓이었다.
“확실히 9성에 도달하니까 다르긴 하네.”
“그치? 육체의 재구성이라는 게 좀 사기적이긴 하더라고.”
이미 오진보다 앞서 10성에 도달했던 하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아니 야, 근데 너 8성일 때도 막 10성도 후려 패고 다니지 않았냐?”
대체 그러면 9성에 도달한 지금은 얼마나 강해졌단 말인가.
“10성 중에서도 완전 초입만 이긴 거지. 이사벨라랑 알렌 상대로는 못 이겼지.”
“…초입이고 뭐고 8성인데 10성을 이겼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확실히 이제까지 오진은 자신보다 1~2성이 높은 각성자들을 상대로도 싸워 이겨왔다.
“그럼 너 지금 벨라보다 강해진 거 아냐?”
“글쎄… 그건 아닐걸?”
9성에 도달했다고 해도 이제 막 초입을 밟은 수준이었다.
아무리 빠른 스포츠카를 구매했다고 해도 운전자의 실력이 형편없으면 제 성능을 발휘하기 힘든 것처럼.
육체의 재구성을 통해 한층 육체가 강해졌다고 해도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그 시간이 많이 없다는 건데.’
수련 시간을 늘려야 하나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을 때쯤.
찌익!
“오, 오진 씨!”
텐트 지퍼를 열 정신도 없었는지 그대로 입구를 손으로 찢어버리며 들어온 이사벨라가 와락 오진에게 안겨 왔다.
“흐윽… 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이사벨라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여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좀 진정이 됐는지 이사벨라가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몸은 괜찮으신 것 맞죠? 서, 설마 그 기술을 사용하신 건… 그리고 그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고양이는 어디로 갔나요?”
우다다다다 질문을 퍼붓는 이사벨라.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하은에게 했던 대답을 그대로 들려줬다.
“휴우.”
이사벨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늘 산맥처럼 솟은 두 봉우리가 크게 출렁였다.
크흠.
헛기침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이 짜식이 일어나자마자 뭐 하는 짓이야?”
하은이 눈을 찡그리며 오진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찌릿한 고통을 참으며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베가는? 성소로 돌아간 거야?”
“아뇨. 밖에 계셔요.”
“그래?”
안에서 벌어진 소란을 들었다면 자신이 깨어났다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이사벨라처럼 베가도 눈물을 뿌리며 들어올 거라 생각했던 오진은 괜히 섭섭한 감정을 느끼며 다시 매트에 누웠다.
“많이 피곤하신가요?”
“엉. 좀 졸리긴 하네.”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나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만 떠들었음에도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이사벨라는 잽싸게 오진 몸 위에 침낭을 덮어주며 머리 쪽에 앉아 이마를 쓰다듬었다.
“오진 씨가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드릴게요.”
“아니 뭐 3살 먹은 애도 아니고.”
“자장가를 불러드릴까요?”
됐네요, 이 아가씨야.
“후훗. 농담이에요. 저랑 언니는 나가볼 테니 편하게 쉬세요. 아, 찢어진 입구는 일단 방수천으로 덮어둘게요.”
“부탁해.”
오진은 텐트 밖으로 나가는 연인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눈을 감았다.
짙은 피로가 몰려들며 의식이 점차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 * *
[읏?!]베가는 텐트 밖으로 나오는 하은과 이사벨라를 먼 곳에서 바라보며 도망치듯 몸을 피했다.
근처 나무 위로 올라가 앉은 베가는 발아래로 보이는 오진의 텐트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하아.]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
은발의 여신은 분홍빛 입술을 매만지며 가늘게 손을 떨었다.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입술의 감촉.
과거 기절한 오진에게 포션을 먹여주기 위해 입술을 겹친 적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입술을 겹친 적은 처음이었다.
‘몹쓸 짓을 했구나.’
끓어오르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잠든 오진과 입술을 겹쳐 버리고 말았다.
오진은 물론 그의 연인인 하은과 이사벨라에게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수치스러운 짓을 한 셈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가슴의 두근거림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불씨가 지펴진 감정은 점차 커다란 불길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댔다는 배덕감.
이제껏 오진과 살갑게 지내는 하은과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내심 서운했던 감정이 한 번에 확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러면 안 되거늘.’
하지만 감정이 어디 그렇게 생각한 대로 움직이겠는가.
입술 끝에 남은 감촉을 끊임없이 되새길 때마다 점차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
한껏 부풀어 오른 감정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녀의 가슴 속을 뱅뱅 돌아다녔다.
전에는 어떻게 했더라.
-언니의 마음이 가득 담긴 응원! 위로! 격려! 그런 걸 해주면 되는 거지!
순간 스피카의 외침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으음.]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베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응원도, 격려도 해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잠든 오진에게 몹쓸 짓을 해놓고 무슨 응원과 격려를 해준단 말인가.
차라리 벌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벌?]순간, 베가의 머리를 스치는 기억.
마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오진에게 엉덩이를 두들겨 맞았을 때의 기억이 무심코 떠올랐다.
[크, 크흠!]베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오르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치심이 한가득 끓어올랐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가슴이 콩닥콩닥 뛰게 만드는 감정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이성이 충돌했다.
감정과 이성의 치열한 갈등.
베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오진이 잠든 텐트를 내려다봤다.
‘본녀가 지은 죄가 있지 않으냐.’
죄를 지었으면 체벌을 받아 마땅한 법.
‘하, 한 번만… 한 번만 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순간 하은과 이사벨라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둘은 나의 아이와 맺어지지 않았더냐.’
자신은 그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가슴 속에 품은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데.
그 둘은 그런 자신 앞에서 매번 애정을 과시하지 않았던가.
[이건 두 아해가 잘못한 것이니라.]베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감정이 ‘변명’이라는 아주 좋은 탈출구를 발견하고는 한껏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저 본녀의 잘못에 대한 벌을 받는 것뿐이니라.’
결코 이를 통해 오진과 맺어진다거나 억누른 감정을 전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그래, 하룻밤의 ‘일탈’.
이번을 마지막으로 오진에 대한 감정을 말끔히 정리하기 위해 하는 일일 뿐이다.
우우우우웅!
찬란한 은빛이 몸을 휘감으며 작은 인형 크기에 불과했던 베가의 몸이 원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조심스럽게 날아오른 여신은 텐트 입구에 쳐진 방수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잠든 오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으으으.]어째서일까.
벌써부터 엉덩이가 따끔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