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0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09화
빛바랜 약속 (1)
여러모로 폭풍 같은(?) 일이 벌어졌던 그 날 이후 3일이 흘렀다.
오진 일행은 하늘 산맥에서 빠져나와 드래고니안 왕국으로 향하는 기다란 협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안개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하은이 포효를 내지르듯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베히모스가 죽었다고 해도 하늘 산맥을 뒤덮고 있는 안개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길을 찾는데 시간이 꽤 소모되고 말았다.
“이제 이쪽 길로 쭉 가기만 하면 되는 거죠?”
“응. 지도에서 본 대로라면.”
오진은 레오루가 그려줬던 지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하은이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베가는 그 이후로 계속 성소에 있는 거야?”
“어… 그건.”
오진은 헛기침을 흘리며 하은의 시선을 피했다.
그날의 일이 있었던 후, 베가는 성소 안에 콕 틀어박힌 채 모습을 비치지 않고 있었다.
“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요.”
하긴.
자신의 취향이 일행들 앞에서 적나라하게 까발려졌으니 아무리 베가라고 한들 견딜 수 없었으리라.
“당분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부르지 말자.”
“예, 그렇게 해요.”
어차피 당장은 드래고니안 왕국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니 베가의 도움이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오진 씨.”
이사벨라가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오진의 팔을 끌어안았다.
찰싹 몸을 밀착한 채 요염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이사벨라.
“제 엉덩이도 팡팡 때려주시면 안 되나요?”
“…그런 취향 아니라니까 진짜.”
베가 때문에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딜 뻔했지만, 기본적으로 오진에겐 엉덩이를 때리며 즐거워하는 독특한 성향은 없었다.
“후훗. 글쎄요? 어떨까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더욱 몸을 밀착하는 이사벨라.
‘이러니 베가가 성소 안에 틀어박히지.’
오진은 한숨을 내쉬며 협곡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3일 전 사건 이후 베가와 함께 리아크도 성소에 틀어박힌 터라(베가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오진이 선두를 맡게 되었다.
‘사냥개자리의 성흔.’
감각을 끌어올린 채 뽀삐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르릉!”
“천천히 가자.”
뽀삐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나름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이동했다지만 일단 하늘 산맥 영역을 벗어난 덕분에 이동 속도 자체는 꽤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내리 쉬지 않고 달렸을까.
“아따, 안개랑 마수 놈들 없으니까 이제 좀 살 것 같네.”
하은이 시시덕거리며 오진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처음엔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그녀였지만, 몇 시간 동안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자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오늘은 이쯤에서 야영할까?”
슬슬 해도 지고 있고 근처에 몸을 담글만한 적당한 계곡도 발견했다.
한시라도 빨리 용인족들의 왕국에 도착해야 한다지만 잠도 안 자고 강행군을 할 수는 없었다.
“오키, 그럼 텐트부터 치자!”
뽀삐의 등에서 내린 오진 일행은 평소 하던 대로 공터를 만들고 텐트를 쳤다.
“나 그럼 잠깐 담탐 좀!”
텐트 설치가 마무리된 후.
하은이 손을 휘휘 저으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하은이 자리를 피해 연초를 태우는 사이, 이사벨라가 다가와 물었다.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걸까요?”
“글쎄. 지도상으로 보면 그리 멀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주변에 보이는 건 그랜드 캐니언을 연상시키는 듯한 거대한 협곡뿐.
‘왕국’이라 불릴 만큼 인공적인 구조물들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일단 좀 더 찾아봐야지.”
하늘 산맥을 넘어온 덕분에 어느 정도 시간 여유가 생겼다.
“네. 그렇게 해요. 아, 저는 슬슬 저녁 식사 준비할 테니 언니 좀 불러와 주실래요?”
“엉.”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초를 태우러 간 하은을 찾았다.
사냥개자리의 성흔을 활성화한 후 연초 냄새를 따라가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연초를 태우고 있는 하은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피고 있었어?”
“윽.”
오진이 다가오자 하은이 아직 반 이상 남아있는 연초를 다급히 비벼껐다.
“아깝게 쓰리 왜 피다 말아?”
“아니 그….”
머뭇거리며 시선을 돌리는 하은.
“남자들은 담배 피우는 여자 별로 안 좋아한다길래.”
어디서 또 그런 요상한 소문을 들어서는.
“인제 와서 숨겨도 의미 없지 않아? 내가 몇 년을 누나랑 같이 있었는데.”
“아니 뭐… 그래도 직접 피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좀 느낌이 다르달까.”
하은이 뻘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요즘 담배 피울 때마다 어딘가 멀리 가 있더니 그런 이유 때문인가.
“난 좋던데.”
“엉? 지, 진짜?”
뭔가 섹시하다고 해야 하나.
모델처럼 큰 키에 사나운 눈매를 지닌 하은이 연초를 태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약간 갱스터 같은 느낌이 들어서 꽤나 잘 어울렸다.
“연초 냄새는 싫지만.”
“윽.”
싱글벙글 담뱃갑에서 연초를 한 대 꺼내려던 하은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짧은 한숨을 내쉰 하은이 연초를 도로 담뱃갑에 집어넣었다.
“오지니, 잠깐 여기 와서 앉아봐.”
하은이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밥 먹자고 부르러 왔는데.”
“이제 막 준비 시작한 거잖아? 한 10분 정도는 시간 있겠지.”
“그렇긴 하지.”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은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은이 고양이처럼 잽싼 동작으로 오진의 허벅지를 베고 드러누웠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엔 아름다운 별들이 수놓고 있었다.
“오지나.”
“응?”
“베가도 너한테 마음이 있는 거겠지?”
“…그건.”
오진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자신이 무슨 러브코미디에 흔히 나오는 눈치 없는 남자주인공도 아니고 베가가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닐 거야.”
“아니라고?”
“마음이 있다고 해도 모성애 쪽에 가깝겠지.”
“모성애라….”
하은 스스로도 그게 말이 되지 않는 말이란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 일단 그런 걸로 하자.”
그녀라고 해서 독점욕이 없는 건 아니다.
이사벨라를 받아준 지 얼마 됐다고 베가까지 냉큼 받아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베가한테는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그와의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둘만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네.”
“옛날?”
“왜, 원장 피해서 보육원 옥상으로 가서 자주 이렇게 누워 있었잖아.”
“아아. 기억난다.”
대머리 원장을 거짓말로 한 바탕 골려준 날이면 꼭 옥상으로 숨어들고는 했었지.
하은은 낄낄 웃으며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옛날 기억들을 하나둘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네 이름 가지고 원장이 뭐라 놀렸다가 빡쳐서 싸웠던 것도 기억나냐? 그 원장 새끼 얼굴에다가 걸레를 집어 던졌잖아.”
“당연히 기억나지.”
“캬! 그때 원장 새끼 표정 존나 웃겼었는데!”
당시에는 ‘오진’이라는 이름에 꽤나 큰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놀리면 불처럼 화를 내고는 했었다.
뭐, 그것도 인제 와서 생각해 보면 고작 이름 따위에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나 싶었지만.
어렸을 때는 자신을 버린 부모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름의 뜻이 ‘더러운 먼지’였다는 사실이 그 어떤 것보다도 더한 절망처럼 느껴졌었다.
“그러고 보니 누나는 그때부터 내 이름을 일부러 뭉개서 불러줬었지.”
지금 되짚어 생각해보면 뭣도 모르는 어린아이치고 꽤나 섬세한 배려였지 않은가.
‘오진’과 ‘오지니’.
발음을 살짝 뭉개는 것 말고는 별 차이도 없었지만.
당시 이름 자체에 큰 트라우마가 있었던 그에게는 그 사소한 차이가 더없이 크게 느껴졌었다.
“어때? 누나 센스 죽이지 오지나?”
“근데 이제는 굳이 그렇게 불러줄 필요 없는데.”
“익숙해져서 이게 더 편해.”
늘 그렇듯 혀 짧은 발음으로 이름을 뭉개 부르며 하은은 배시시 미소 지었다.
오진을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그를 ‘오지니’라고 부르는 건 자신뿐이 없었다.
남들은 왜 그렇게 부르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그렇기에 오진과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애칭 같은 느낌이라 뭔가 우쭐해지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그런 의미에서 누나 이름 뜻은 참 좋단 말이지.”
“하늘의 은총?”
“엉.”
‘하늘의 은총’을 줄여 하은.
이름의 뜻을 풀어 쓰면 ‘더러운 먼지’인 자신에 비해 얼마나 예쁜 이름이란 말인가.
“예전에 누나가 그런 말도 했었는데. 자기 이름 뜻처럼 ‘하늘의 은총’이 돼서 날 비춰주겠….”
“야야야야! 그만!”
끄아아악!
옛날 흑역사가 떠올랐는지 하은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아니, 씨벌 옛날에 그런 말을 어떻게 태연하게 씨불였던 거지?”
“한창 그럴 나이였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아무짝에 의미도 없는 이름 뜻을 중요하게 여기던 나이가 아니었던가.
“와 씨, 지금 생각하니 개쪽팔리긴 하네.”
“왜? 지금은 ‘하늘의 은총’이 돼서 날 비춰줄 생각은 없어진 거야?”
“야야, 그만하랬지.”
“아니 뭐, 솔직히 더러운 먼지보다는 훨씬 낫잖아.”
더러운 먼지라는 뜻의 오진.
하늘의 은총이라는 뜻의 하은.
둘 중 뭐가 더 나은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 이름을 지어준 부모라는 새끼들은 하늘의 은총을 내다 버리긴 했지만 말이지.”
하은은 쓴웃음을 지으며 슬며시 손을 들어 올려 오진의 뺨을 매만졌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네.”
“뭐가?”
“그 새끼들이 은총을 내다 버리지 않았으면 널 만날 일도 없었을 거 아냐?”
“…….”
부모에게 버림받은 사실을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은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 건가.
말로 표현 못 할 감격과 함께 무거운 죄책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과연 자신은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을까.
“새끼 또 쓸데없는 생각하고 있지?”
하은이 오진의 뺨을 쭈욱 잡아 늘였다.
“슬슬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진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던 하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는 오진의 팔을 잡아끌며 환하게 미소 짓는 하은.
방금 옛날이야기를 해서 그럴까.
환하게 미소 짓는 하은의 얼굴에 어린 소녀의 얼굴이 살짝 겹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물론 겹쳤다고 해도 정확히 옛날 그녀의 얼굴은 아니니라.
어린 시절 하은의 얼굴에 대한 기억들은 모조리 흑천의 먹구름 너머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엥? 뭐야? 왜 그렇게 울상을 짓고 있어?”
하은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오진에게 다가왔다.
“아냐, 아무것도.”
그녀는 자신이 어린 시절 그녀의 얼굴에 대한 기억들을 모두 잊어버렸다는 걸 모른다.
오진은 찢겨 나간 기억의 앨범을 다시 마음속 깊이 묻어둔 채 몸을 돌렸다.
“밥 먹으러 가자.”
“잠깐만.”
조심스럽게 팔을 잡아당기는 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살짝 발돋움한 하은이 입술을 겹쳐왔다.
새가 모이를 쪼듯 가벼운 키스.
“어때, 누나가 뽀뽀해 주니 좀 기운 나지?”
하은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오진의 엉덩이를 팡팡 때렸다.
“…하.”
오진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무거운 돌을 올려둔 것처럼 갑갑했던 기분이 확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도 참 성격 단순하구만.’
오진은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사벨라, 하은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하루일과가 된 수련을 마친 뒤.
피로에 전 몸을 이끌고 침낭에 누웠다.
“하늘의 은총이라.”
참으로 하은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