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13)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13화
빛바랜 약속 (5)
“아니… 그.”
하은은 갑자기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린 켈리온이 부담스럽다는 듯 고양이처럼 오진의 등 뒤에 몸을 숨겼다.
일단 용인족들이 왜 그렇게 자신에 대해서 과하게 반응하는지는 그녀도 이해했지만.
갑자기 난생처음 보는 이들이 우르르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며 구세주니, 용의 처녀니 떠들면서 일족의 명운을 구해달라고 하는데 당황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부탁드립니다.”
켈리온은 하은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용신이 기나긴 잠에 빠진 이후.
드래고니안 왕국은 점차 멸망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태생부터가 용을 섬기기 위해 태어난 그들이다.
여왕개미를 잃은 개미들이 죽어가는 것처럼, 그들 또한 ‘용’이라는 중심을 잃고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희에겐…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켈리온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용의 가호와 지식이 없으면 용인족들은 제 육체 안에 잔류해 있는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만다.
카일루스가 있던 시절에는 용자리의 성흔으로 폭주하는 마력을 어떻게든 억눌렀지만.
그가 죽은 지금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용인족들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잠든 용신 외에는 없었다.
“지난 백 년간… 셀 수 없는 용인족들이 마력의 폭주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기억한다.
떠올린다.
밝게 미소 짓던 소녀가, 힘차게 뛰어놀던 소년이, 용맹하게 무기를 휘둘렀던 청년이, 지혜롭게 왕국을 이끌어줬던 노인이.
죽었다.
폭주하는 마력을 제어하지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치며.
“저, 저는… 그 모든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깨어나지 않는 용신을 기다리며, 찾아오지 않는 구원을 부르짖었다.
“…….”
오진은 흐느껴 우는 켈리온을 내려다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용인족들이 마인족들의 공격에 허무하게 당했던 게 이런 이유였던 건가.’
마인족의 군세가 강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애초에 용인족의 왕국은 백 년에 걸쳐 점차 그 힘을 잃고, 쇠약해지고 있었다.
마인족이 한 거라고는 죽어가는 환자의 입에서 산소 호흡을 억지로 떼어낸 것뿐이었다.
“다른 용들은 없는 겁니까?”
오진은 마경에 오기 전 싸웠던 천주룡을 떠올리며 물었다.
용인족을 구원하기 위해 용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다면 굳이 그게 용신이어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용들은….”
쓴 약을 씹어 삼키듯 켈리온은 입술을 짓씹었다.
늙은 얼굴을 뒤덮은 주름이 슬픔에 일그러졌다.
“이미 대부분이 죽었다네. 살아 있다고 해도 레어에 숨은 채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지.”
“…이미 대부분이 죽었다고요?”
“그렇다네.”
용들은 그 존재만으로 완성된 강력한 종족이었다.
하나하나가 전략 병기나 다름없는 괴물들을 대체 누가 멸망까지 몰고 갔단 말인가.
“천마일세.”
또 너냐.
모래자갈을 씹듯 불쾌한 감각이 입안에 퍼졌다.
오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마인족이 받들어 모시는 악신… 천마가 용들을 죽였다네.”
“직접 죽인 겁니까?”
고개를 젓는 켈리온.
천마가 직접 죽인 게 아니라면.
“‘뱀’을 시켜서 죽였다고 들었네.”
“…….”
카시아 콜그란데.
천마에게 구원받은 후 그의 ‘거짓말’에 의식을 지배당해 꼭두각시가 되었던 여인.
‘마경에 있는 동안 그런 일을 하고 다녔던 건가.’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천마의 꼭두각시로 사는 동안 자신의 손에 셀 수 없는 피를 묻혀왔다고.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설마 그녀의 손에 묻은 질척한 핏물 중 용들의 피까지 섞여 있었을 줄이야.
“…….”
문뜩 카시아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둠이 내려앉은 병원 옥상.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슬픈 눈으로 속죄를 하기 위해 떠나겠다고 말했던 여인.
아득한 자괴감과 자책감 속에서.
오로지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갈망만을 간직한 채.
이제껏 얼마나 많은 피를 그 가녀린 손에 묻혀왔을까.
오진은 카시아를 그렇게 만든 천마의 존재를 떠올리며 까득 이를 갈았다.
달콤한 거짓말로 남을 속여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
‘그게 네 방식이냐.’
실로.
‘권오진’다운 방법이지 않은가.
“…….”
씁쓸한 맛이 입 안에 번졌다.
묵직한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 가슴이 무거웠다.
“뭐… 그럼 그 용신이라는 놈을 내가 깨워만 주면 된다는 거지?”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하은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켈리온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그렇습니다! 용의 처녀님께서 지니신 용안의 힘만 있다면 용신의 영혼을 그 육신에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켈리온의 눈동자 희망이 깃들었다.
“용신님만 깨어나신다면 왕국을 뒤덮은 마인족의 군대도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근데 그 용신의 영혼이라는 게 어디 있는데?”
“용신님이 잠들어 있는 레어에 영혼석이라는 거대한 결정체가 있습니다.”
“그럼 그걸 찾아서 가져가면 되는 거야?”
“굳이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켈리온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영혼석은 잠든 용신님의 바로 옆에 있으니까요. 그곳까지만 무사히 도달하면 그 뒤는 바로 용안의 힘을 통해 영혼을 용신님의 육신으로 이끌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방법 자체는 지극히 간단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레어까지 어떻게 도착하냐는 건데.”
오진은 마인족과 마수 무리가 배회하고 있던 드래고니안 왕국 내부의 모습을 떠올렸다.
얼핏 보이는 마인족의 숫자만 백여 명 이상.
마수 무리는 천 단위를 넘어 만 단위에 가까웠다.
“용신의 레어는 어디에 있습니까?”
“왕국 가장 안쪽에 숨겨져 있다네. 강력한 결계로 보호되고 있어 마인족 놈들이 침입하지는 못했을 걸세.”
자신에 찬 표정으로 말하는 켈리온.
“가시는 방법은 알고 계십니까?”
“내가 괜히 이제까지 용인족들을 이끌었겠나. 용신님의 레어가 있는 장소는 당연히 알고 있네.”
“…레어의 위치를 알고 있는 다른 용인족은 없습니까?”
“없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레어의 위치는 장로들에게만 비밀리에 전승되어 왔다네.”
그렇다면 레어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건 켈리온뿐이라는 건가.
“혹시 지도 가지신 거 있습니까?”
“왕국 지도 말인가?”
“예.”
“잠시만 기다리게.”
켈리온이 목제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가볍게 얹었다.
푸른 빛무리가 반짝이며 테이블 위에 마력으로 이뤄진 지도가 펼쳐졌다.
‘지도를 이런 식으로 보관해둔 건가.’
확실히 머릿속에 직접 지도를 보관해두는 것만큼 안전한 건 없었다.
“레어가 있는 곳이 정확히 어느 쪽이죠?”
“이쪽이라네.”
켈리온이 말한 대로 협곡 전체를 깎아 만든 도시의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다만 여길 찾아가도 레어는 발견할 수 없을 걸세.”
“결계 때문입니까?”
켈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가서 결계를 풀어야지만 레어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네.”
즉, 켈리온 자신이 레어의 입구를 열 수 있는 열쇠라는 건가.
지도를 내려다보던 오진이 가늘게 눈을 떴다.
‘정면으로 뚫기는 힘들어.’
용인족들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마인족의 군대에 고작 10일도 채 버티지 못하고 처참하게 멸망했다는 걸 생각하면 용인족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정면 돌파는 불가능했다.
“몰래 잠입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요?”
옆에 서서 같이 지도를 살피던 이사벨라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걔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감시를 뒀을 텐데.”
만약 오진 혼자서 잠입하는 거라면 ‘흑막’을 사용한 채 들어가면 된다.
하지만 켈리온과 하은까지 같이 가야 한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용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뿐이네요.”
이사벨라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이 뭔지는 굳이 그녀의 입을 통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적진의 주요한 거점에 진입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
효과적이지만,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방법.
“이건 미끼를 쓸 수밖에 없겠네.”
미끼를 통해 마인족들의 시선을 그쪽에 집중시킨 후 하은과 켈리온을 레어에 잠입시켜야 했다.
‘그렇다고 둘만 보낼 수는 없어.’
만약 하은이 용신의 영혼을 그의 육신으로 이끌고 있는 사이 공격이라도 당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켈리온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이상 그녀를 보호해줄 누군가가 반드시 같이 가야 했다.
‘내가 같이 가야 해.’
단순한 무력을 놓고 보면 아직 자신보다 이사벨라가 더 강하지만.
자신에게 흑천이라는 초월적인 힘이 있었다.
리스크는 있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하은을 더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는 건 자신이다.
문제는 자신이 빠져버리면 그만큼 ‘미끼’ 쪽이 위험하게 된다는 건데.
“미끼는 제가 할게요.”
이사벨라가 자진해서 손을 들었다.
“괜찮겠어?”
백 명이 넘는 마인족과 수만에 달하는 마수 무리를 상대로 미끼 역할을 하는 건 아무리 이사벨라라고 해도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예. 군대를 상대로 직접 싸우는 건 힘들겠지만, 시선을 끌고 도망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그래도 인원이 좀 더 필요한데.”
그녀가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사벨라 혼자서 한 도시 전체를 점령한 군대의 이목을 끄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도 힘을 더하겠네.”
켈리온이 굳은 결의가 담긴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오진은 그를 돌아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죽을 겁니다.”
이사벨라야 일신의 무력이 뛰어나니 마인족들에게 쫓겨도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용인족들은.
“운이 좋아 잘 도망친다고 해도 대부분 죽을 겁니다.”
“…….”
켈리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그는 주름진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죽음은 각오했다네.”
늙은 용인족은 왼쪽 가슴의 성흔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후후. 그래도 우리가 살아왔던 터전이지 않은가. 피를 흘려 지킬 수 있다면 그만한 영광이 없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켈리온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
각오를 다지는 늙은 용인족의 장로를 바라보며 오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단에 있어 살아온 터전이라는 건 그만큼 중요하다.
때로는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지켜야 할 정도로.
“피해자를 줄일 방법은 있습니다.”
“…무슨 방법인가?”
“미끼가 하나가 아니라, 더 많으면 되죠.”
오진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에서 세 곳을 가리켰다.
붙잡힌 용인족들이 묶여 있는 거대한 원형 건축물 주변이었다.
“총 세 곳에서 소란을 일으킬 겁니다.”
“그쪽이라면….”
“예. 여기에서 소란이 일어난다면 마인족들은 붙잡힌 용인족들을 구출하러 왔다고 착각하겠죠.”
그렇다면 그들의 병력은 용인족들이 붙잡혀 있는 건물 쪽으로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 상황에서 도시 중심이 아닌, 외곽 쪽으로 도망친다면 혼란은 더욱 커질 겁니다.”
마인족 입장에서는 소란을 일으킨 세력이 당연히 용인족들이 붙잡힌 건물로 와야 하는데 엉뚱한 곳으로 도망치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피해자는 생기긴 하겠지만, 적어도 살 가능성은 올라갈 겁니다.”
“하지만 성문에서 가까운 입구 쪽은 그렇다 쳐도 다른 두 곳은 왕국 안쪽인데… 여기로 어떻게 병력을 잠입시킬 생각인가?”
“그건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용인족의 희생 없이 적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방법 있었다.
“…고맙네.”
켈리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용신을 깨워주는데 도움을 주는 것도 모자라 용인족들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까지 생각해주다니.
만난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외지인의 배려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은가?”
“예.”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도와주는 건가?”
일족을 구원해달라고 부탁한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미끼 작전의 경우 사실 용인족들에게 떠넘기면 될 문제였다.
원래 목숨을 ‘갈아’ 넣으면 넣을수록 더 효과적인 게 미끼였으니까.
“…글쎄요.”
오진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문뜩, 눈물로 일그러진 카시아의 얼굴이 다시 머리를 스쳤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달라지고 싶은 건지도 모르죠.”
‘권오진’이라는 인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