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16)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16화
빛바랜 약속 (8)
‘온다.’
가까워지는 발소리.
오진은 움켜쥔 창에 힘을 더하며 성흔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푸른 뇌전이 사납게 타오르며 맹수의 울음소리를 흘렸다.
“쓰읍.”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사냥개자리의 성흔을 활성화했다.
들려오는 발소리는 다섯.
이사벨라의 뒤를 쫓는 도중 잠깐 레어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모양인지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곧 우르르 몰려오겠지.’
왕국 내에서 벌어진 소란의 목적이 용신의 레어였다는 것이 확실해졌으니 이사벨라의 뒤를 쫓고 있던 병력들이 모두 레어 쪽으로 몰려드리라.
‘최대한 빠르게.’
마인족이 쌓이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용신을 깨우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그렇다면.
“하아.”
파직, 파지지지직!
창끝에 푸른 뇌전이 응축한다.
날뛰는 맹수를 억지로 우리 안에 가둬두듯 창끝에 맺힌 뇌전이 사나운 굉음을 흘렸다.
나선형의 통로 너머로 달려오는 마인족의 모습이 보였다.
콰앙!
거칠게 발을 구르며 창을 쥔 팔을 한계까지 뒤로 당긴다.
이미지하는 것은 밤하늘을 가로 짓는 유성(流星).
응축되어 있던 푸른 뇌전의 줄기가 폭발하듯 뿜어진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듯, 한계까지 뒤로 젖혔던 팔을 앞으로 내지른다.
그리고.
투척.
콰자자자자작!
굉음을 터트리며 날아간 뇌전의 창이 앞장서 달려오는 마인족의 머리통을 관통했다.
“조심…!”
앞장서 달려가던 마인족의 머리가 터져 나가는 것을 본 다른 마인족이 기겁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의 경고가 채 끝까지 이어지기 전에.
씨이이이잉!
여섯 줄의 와이어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와이어를 타고 흘러든 뇌전이 전신에 퍼졌다.
목구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끔찍한 비명.
살갗이 타들어 가는 메케한 냄새가 공동 안에 퍼졌다.
“크윽!”
뒤따라오던 마인족 하나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화르르륵!
검은 화염이 검날에 맺혔다.
검을 뽑아 든 마인족은 창을 던져버리며 맨손이 된 오진을 향해 사납게 달려들었다.
폭발하듯 휘둘러지는 검격.
검은 화염이 거칠게 타오르며 끔찍한 열기를 뿌렸다.
굶주린 맹수가 사냥감을 물어뜯듯 검은 화염이 넓게 퍼지며 오진을 뒤덮었다.
‘모래시계자리의 성흔.’
순간.
세상이 멈췄다.
슬로우 모션 비디오를 튼 것처럼 느릿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오진은 차분하게 마인족의 움직임을 살폈다.
다시 가속하는 세계.
넓게 펼쳐진 검은 화염이 오진을 덮쳤다.
‘좌하단.’
넘어질 것처럼 몸을 낮췄다.
뜨거운 화염이 등 거죽을 태우며 지나갔다.
완벽하게 화염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허업!”
솟구치듯 숙였던 몸을 들어 올리며 마인족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목이 붙잡힌 마인족의 눈동자가 부릅뜨였다.
오진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충전.”
마인족의 머리에 응축되는 뇌전.
마인족의 입에서 곧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몸을 펄떡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퍼석.
뇌전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머리가 터져나가며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남은 건 두 마리.’
쏟아지는 핏물 너머로 달려드는 마인족의 모습이 보였다.
양쪽으로 갈라져 빠르게 접근하는 두 명의 마인족.
한쪽을 향해 머리통이 터진 채 죽은 마인족의 시체를 집어 던졌다.
포탄처럼 쏘아지는 동족의 시체에 잠시 주춤하는 사이, 반대편에 있던 마인족이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 먹물을 칠한 듯 흑염(黑炎)이 타올랐다.
천마의 힘이 깃든 불꽃.
마인족들이 사용하는 검은 화염은 불이 붙은 대상의 살을 불태우는 것은 물론 마력과 생명력까지 갈취한다고 한다.
오진이 반사적으로 쏘아낸 뇌전이 검은 화염에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뇌전을 흡수한 흑염이 한층 거세게 타올랐다.
마치 ‘흑천’을 불꽃으로 승화시킨 듯한 화염.
“죽엇!”
검은 화염으로 뇌전을 모조리 흡수한 마인족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외쳤다.
거세게 타오르는 화염이 오진을 향해 쏟아졌다.
‘흡수라.’
오진은 픽 웃으며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오른팔 팔꿈치 아래로 푸른 뇌전이 응축되며 팔 전체가 뇌전으로 변했다.
“이것도 흡수할 수 있겠어?”
“무슨….”
푸른 뇌전으로 변한 주먹이 검은 화염을 후려쳤다.
폭발하듯 터져 나온 뇌전 줄기가 검은 화염을 갈가리 찢어발기며 다가오는 마인족의 몸을 덮쳤다.
“크아아아아아!”
뇌전에 휩싸인 채 미친 듯이 몸을 비트는 마인족.
오진은 순간 푸른 뇌전으로 변했던 팔을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며 몸을 돌렸다.
뇌신체(雷神體).
예전이라면 사전 작업이 길고 한 번 사용할 때마다 후유증이 너무 심해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던 기술이었지만.
거문고자리의 성흔이 9성에 올라서면서 경지가 상승한 지금 신체의 일부를 자유롭게 뇌신의 것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처럼 사전 작업 없이 약식으로 사용하게 되면 지속시간이 몇 초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지.’
주먹질 한 방으로 폭뢰 수십 방을 사용한 것 같은 미친 뇌전을 쏟아부을 수 있는데 지속시간이 짧다고 불평할 순 없었다.
“미, 미친.”
남은 마인족 한 명이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한 동족들.
척후병에 불과한 그들이 무슨 마인족 간부처럼 강대한 힘을 지닌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마인족’이었다.
천마의 힘을 이어받은 최강의 종족.
한 명, 한 명이 수백의 전사를 상대할 정도로 강력한 종족이 바로 마인족이거늘.
대체 저 괴물의 정체가 뭐기에 이토록 마인족을 압도할 수 있단 말인가.
“하, 항복하겠다.”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두 손을 들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정면으로 싸워 저 괴물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항복한다고?”
“그, 그래.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다! 제, 제발 목숨만은… 사, 살려다오. 내, 내가 도와준다면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갈 수도 있을 거다!”
마인족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흐음, 그래?”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오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하나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됐네.”
항복을 받아들인 건가.
오진은 팔짱을 낀 채 마인족에게 다가갔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마인족의 입꼬리가 씨익 비틀려 올라갔다.
분명 정면으로 저 괴물과 싸워 이길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뒤져라 인간!”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떨고 있던 마인족의 눈빛이 순간 돌변했다.
화르르르륵!
검은 화염이 손바닥 위에 사납게 타올랐다.
비록 무기는 바닥에 내던져 버렸지만, 마인족이 지닌 강력한 육체는 그 자체로 훌륭한 무기였다.
검은 화염에 휘감긴 주먹을 가깝게 다가온 오진에게 휘두르려 했을 때.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편이 좋아.”
“뭐?”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의문을 입에 담기도 전에.
“커헉!”
푸욱!
등을 파고든 창날이 심장을 꿰뚫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맨 처음 오진이 투척했던 창이었다.
“시선을 피하면 쉽게 거짓말이 들키거든.”
“어떻, 게…?”
피를 토하며 쓰러진 마인족에게 다가간 오진이 단탈리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협지에서 흔히 나오는 이기어검처럼 스스로 허공을 날아온 단탈리안이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후드득!
가볍게 창을 휘둘러 창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자, 자네.”
켈리온이 쩍 벌어진 입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아무리 레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온 척후병이라고 하지만 마인족 다섯을 이렇게 압도하다니.
카일루스의 예언에 나온 구세주가 하은이 아니라 오진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순간 머리를 스칠 정도였다.
“…….”
쓰러진 마인족들을 내려다보며 놀란 건 오진도 마찬가지였다.
‘9성이 되면서 많이 강해졌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이 정도로 강해졌을 줄이야.
신체 능력은 물론 뇌전의 위력이나 마력의 움직임, 거문고자리의 성흔을 활용한 기술까지 모두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지가 올라갔다.
‘이거 진짜 이사벨라랑 비슷해진 거 아냐?’
그런 오만한 생각까지 머리를 스칠 무렵.
타다다다다다닥!
다시금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에 들려왔던 발소리에 무려 10배에 달하는 소리.
‘제길.’
마인족의 본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한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네.”
고개를 젓는 켈리온.
오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단탈리안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들려오는 발소리는 오십.
아무리 그가 강해졌다고 한들, 방금처럼 쉽게 압도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나도 힘을 보태겠네.”
켈리온이 비장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오진처럼 여러 마인족을 상대로 압도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도 용자리의 성흔을 지닌 만큼 시간만 제대로 확보된다면 강력한 한 방을 퍼부을 수는 있었다.
“그럼 뒤를 맡기겠습니다.”
오진은 창을 쥔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곧 마인족의 본대가 레어로 우르르 들이닥쳤다.
쿠웅! 콰자자자작!
그렇게 시작된 치열한 혈전.
오진은 무려 오십에 달하는 마인족을 상대로 사납게 날뛰었다.
“아아악!”
“커헉!”
흩뿌려지는 피.
검은 화염과 푸른 뇌전이 뒤엉키며 강렬한 열폭풍이 일어났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공동이 뒤흔들렸다.
“하아, 하아!”
필사적으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던 오진의 입에서 단내 섞인 숨이 토해졌다.
켈리온이 힘을 보태긴 했지만.
역시 오십이나 되는 마인족과 정면으로 싸워 이기는 건 아무리 9성에 도달한 그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언제쯤…!’
초조한 눈으로 하은 쪽을 바라봤을 때.
파각!
하은이 손대고 있던 영혼석에 금이 가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영혼석에서 해방된 붉은 화염이 공동 전체를 뒤덮을 기세로 거세게 타올랐다.
“오, 오지나 끝났어!”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하은이 환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아.”
켈리온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드, 드디어… 드디어.”
용신이 깊은 잠에 빠진 이후.
얼마나 이 순간을 간절히 기다려 왔던가.
“위대한 용신이시여!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켈리온은 납죽 엎드린 채 머리를 조아렸다.
쿠르르르릉!
공동 전체가 뒤흔들리며 영혼석에서 해방된 불꽃이 춤을 추듯 공동 안을 배회했다.
그리고.
“어, 어? 뭐, 뭐야? 왜 이래 이거?”
춤을 추듯 허공을 배회하고 있던 불꽃이 잠든 용신이 아닌, 하은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