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17)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17화
빛바랜 약속 (9)
찬연히 타오르는 불꽃.
넓은 공동을 가득 메우고 있던 불꽃이 회오리치며 하은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윽!”
하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거대한 마력의 해일이 그녀의 몸속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크윽!”
“무, 무슨 열기가!”
오진과 치열하게 전투를 이어가고 있던 마인족들은 하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열기에 신음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누나!”
오진은 다급한 표정으로 불꽃을 흡수하고 있는 하은을 향해 달려갔다.
치이이이익!
하은에게 다가갈 때마다 가공할 열기에 피부가 타들어 가는 게 느껴졌다.
“켈리온…!”
‘예언’과는 달라진 전개에 오진은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켈리온을 노려봤다.
당연하지만 이번 작전을 짰을 때 켈리온이 배신할 위험도 염두에 뒀다.
그럼에도 작전을 감행했던 것은 지난 며칠 동안 켈리온을 차분히 살펴본 결과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진이라고 해서 모든 거짓말을 한 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의심 가는 대상을 며칠에 걸쳐 철저하게 조사했음에도 거짓말을 파악하지 못한 적은 없었다.
‘켈리온은 우릴 속인 게 아니야.’
그렇다면 대체 이 상황은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왜… 어째서?”
켈리온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용신의 영혼을 흡수하고 있는 하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카일루스의 예언대로라면 용안을 지닌 여인이 용신을 잠에서 깨워야 했다.
하지만.
용신의 영혼을 해방한 지금에도 굳게 닫힌 용신의 눈꺼풀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저 눈을 뜨지 않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쿠륵, 쿠르르륵.
잠든 용신의 몸이 공동을 가득 채운 열기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코에서 주기적으로 내뿜어지던 숨결은 끊겼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힐 듯한 위압감도 옅어졌다.
그래.
용신 칼레이오스는, 지금 죽어가고 있었다.
“이러면 예언이랑… 다르지 않습니까?”
뭔가가 잘못됐다.
흩어진 퍼즐을 짜 맞추니 전혀 엉뚱한 그림이 나와 버린 격이다.
“칼레이오스 님….”
켈리온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죽어가는 용신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치이이익!
살점이 타들어 가는 고통.
머리가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용신 칼레이오스.
노예에 불과한 용인족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왕국에 남았던 용.
다른 용들에게 손가락질당하면서도 끝까지 용인족들을 포기하지 않았던 자비로운 신.
마인족의 대군이 몰려왔을 때였나.
이미 백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때 칼레이오스와 나눴던 대화는 아직 선명하게 그의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다급한 경고에 칼레이오스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을 버리고 도망치셔야 합니다!
영생을 산다는 용만큼은 아니었지만, 용인족의 수명도 만만치 않게 길었다.
켈리온은 백 년 전 마인족이 쳐들어왔던 당시에도 용인족을 이끌고 있었다.
당시 켈리온은 왕국을 버리고 남은 생존자들과 함께 도망치기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곳은 너희들의 삶의 터전이 아니더냐.
칼레이오스의 대답은 단호했다.
용이라는 고귀한 존재로 태어난 그가, 그들을 받들어 모시기 위해 태어난 용인족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어리석은 용이었다.
왕이 신하를 지키겠다며 검을 뽑고 전장으로 향하는 격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할지도 모르지.
용과 용인족의 관계는 왕과 신하의 관계처럼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신하가 없으면 왕은 존재할 수 없지만, 용인족이 없다고 해도 용은 존재할 수 있다.
용들에게 있어서 용인족은 편리하게 부려 먹기 좋은 노예에 불과했다.
그런 무가치한 존재를 위해.
어째서 그는 목숨을 걸었을까.
-너희들은 노예가 아니다.
켈리온의 의문에 칼레이오스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 칼레이오스의 자랑스러운 자식들이자.
백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흘러도.
-더없이 소중한 보물이니라.
빛바래지 않는 그 말을.
“어째서… 어째, 서… 눈을 뜨지 않으십니까.”
켈리온의 뺨을 타고 흘러낸 눈물이 열기에 증발한다.
용안을 지닌 여인이 그를 찾아왔을 때.
드디어 용신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리란 희망에 부풀었건만.
“용안만 있으면… 눈을 뜨실 수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희망은 절망의 가장 큰 조미료라 했던가.
희망의 빠져나간 자리에 짙은 절망이 차올랐다.
켈리온은 혼을 잃은 듯 공허한 눈동자로 점차 녹아 사라져가는 용신의 육신을 바라봤다.
한 걸음, 두 걸음.
살을 태우는 열기 속에서 죽어가는 용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의 전신이 화상에 뒤덮여 갔을 때.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어깨를 붙잡은 손이 켈리온을 당겼다.
켈리온은 실 끊어진 목각인형처럼 뒤로 쓰러졌다.
“…제길.”
오진은 하은의 몸속으로 흡수되는 불길을 바라보며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혼이 빠져나간 듯한 켈리온의 반응을 보니 그가 이런 상황을 의도한 게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누가 이런 상황을 의도했는지보다, 지금 상황이 하은에게 해가 되는지 아닌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누나!”
불길에 휩싸여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하은을 불렀다.
거대한 마력의 해일에 의식을 잃기라도 한 걸까.
불길 속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빌어먹을.’
오진은 불길에 휩싸인 하은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가공할 열기가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 경고하는 듯 그를 밀어냈다.
“헛소리하지 마.”
타들어 가는 열기를 뚫으며 다시 한 걸음.
쿠르르륵!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걸어가며 ‘흑천’의 힘을 끌어올렸다.
‘흑천으로 불을 흡수하는 방법밖에 없어.’
용의 영혼에 깃든 거대한 마력이 하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는 이상.
그 힘을 자신이 대신 모조리 먹어 치우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하아.”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옅은 살가죽 너머, 맥동하는 심장 안에 잠들어 있는 검은 하늘.
흑천의 힘이 깨어나며 검은 먹구름이 뿜어져 나왔다.
흑천의 구름이 사납게 타오르는 불길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된다.’
흑천을 타고 불길 안에 담긴 마력이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하은에게 흘러 들어가는 불길을 대신 자신이 흡수할 수 있다는 건 희소식이었지만.
‘부족해.’
흡수되는 양이 터부니 없이 부족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불길 안에 담긴 마력이 지나칠 정도도 거대했다.
오진은 입술을 짓씹었다.
결국 남은 카드는 하나.
‘개천을 써야 해.’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를 지나는 자….”
오진은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린 채 나지막이 영창을 내뱉었다.
그때.
“오, 오지니 너 그 기술 쓸라는 거지?!”
불길 속에서 하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나 괜찮으니까 그거 쓰지 마!”
괜찮다고?
이런 거대한 마력을 몸에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괜찮을 수 있단 말인가?
“거짓말하지….”
“거짓말 아냐 새끼야! 너 남이 거짓말하는지 안 하는지 잘 구별하잖아!”
“…….”
그녀의 말마따나.
불길 속에서 들려오는 하은의 목소리는 생각 이상으로 ‘멀쩡’해보였다.
“잠만 이거 거의 다 끝나가니까 좀만 기다리고 있어!”
세상 전체를 불태울 것처럼 사납게 타오르던 불길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잠잠해진 불길 속에서 하은이 걸어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누나.”
불길 속에서 걸어 나온 하은은 인간이라기보단 용인족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목덜미와 뺨 일부를 뒤덮은 붉은 비늘.
뾰족한 귀와 파충류를 연상케 하는 세로로 찢어진 동공.
용인족의 모습으로 변한 하은의 몸 주위에는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신체 일부 자체가 ‘불’로 변해 있었다.
개천이나 뇌신체를 사용했을 때와 비슷하달까.
불꽃이 되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녀의 몸에선 가공할 열기가 사방에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와 씨, 갑자기 나한테 흡수돼서 식겁하는 줄 알았네. 이거 원래 이런 거야?”
하은은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눈에 녹아내리고 있는 용신의 몸이 들어왔다.
“어? 쟤, 쟤는 왜 죽어가고 있어?”
“모르겠어.”
“…나 때문이야?”
“…….”
오진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용신에게 갔어야 할 영혼이 하은에게 깃들면서 생긴 일처럼 보이긴 했지만.
애초에 왜 용신이 아닌 하은에게 영혼이 흡수됐는지를 알 수 없었다.
“잠깐만 화력 좀 조절할게.”
일단 용신의 몸이 녹는 걸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건지 하은이 사방에 뿜어지고 있는 불꽃을 몸속으로 갈무리했다.
공동 전체를 뜨겁게 달구고 있던 열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죽은 거야?”
한 번 끊어진 용신의 숨은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했던 콧구멍에서 주기적으로 뿜어져 나오던 화염조차 더 이상 뿜어지지 않았다.
용신 칼레이오스는.
용인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자비로운 신은.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다.
“아, 으. 아아…!”
켈리온은 반쯤 녹아버린 용신의 시체에 다가갔다.
“칼레이오스님…! 칼레이오스님!!”
결국 눈을 뜨지 못하고 죽은 신을 부여안은 채 오열했다.
서럽게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
하은은 착잡한 표정으로 울부짖는 켈리온을 바라봤다.
“하아, 하아!”
“뭐, 뭐야 방금 그 열기는?”
가공할 열기에 물러서 있던 마인족들이 다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이 아직 남아있었네.”
울부짖는 켈리온을 바라보던 하은의 시선이 마인족에게 향했다.
화르르륵!
그녀의 몸속으로 흡수됐던 불꽃이 다시 사나운 열기를 뿜어내며 타올랐다.
“오지나, 저놈들 내가 한 번 혼자 상대해 볼게.”
“괜찮겠어?”
오진과 싸우면서 숫자가 꽤 줄었다고는 하나 아직 서른에 가까운 마인족이 남아있었다.
예전 하은이었다면 감히 혼자 상대할 수 없는 전력이었지만.
“응, 괜찮을 것 같아. 지금이라면.”
하은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진을 뒤로한 채 마인족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하은.
한 걸음 옮길수록 그녀의 안에 흡수되어 있던 불길이 거칠게 타올랐다.
“제, 제길!”
“죽엿!”
가공할 열기에 머뭇거리고 있던 마인족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하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미, 미친 나 존나 세졌는데 오지나?”
서른에 달하는 마인족들이 잿더미가 되기까지는 채 10분조차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