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21)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21화
막간-Caelus Benedictio
“후우.”
단상 뒤에 있던 오진은 손에 쥔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됐네.’
어느 정도 확신은 있었다.
용신의 영혼에 의지가 깃들어 있지는 않다고 하나, 그 안에 담긴 힘은 진짜였으니까.
수십 미터에 달하는 불의 날개를 보면 자연스럽게 ‘용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누나는 용자리 성흔의 각성자니까.’
용안과 용자리 성흔, 그리고 전에 백두산에서 얻은 용의 심장과 용신의 영혼까지.
‘이 정도면 용신 되기 번들 세트 같은 느낌이지.’
무슨 엑조디아 팔다리를 모으는 것마냥 용과 관련된 힘을 모두 하은이 가져갔는데 못 속이면 그것도 문제가 있었다.
조건이야 이미 충분히 갖춰져 있었고.
하은의 부족한 연기력은 오진이 대신 용신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걸로 커버쳤으니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켈리온의 도움도 있었고.’
용인족의 장로인 그가 직접 나서서 바람잡이 역할을 맡아준 덕분에 의심의 눈초리도 거의 받지 않았다.
이 정도로 좋은 조건들이 겹쳐 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건 사기꾼 실격이다.
“뭐, 어쨌든 이걸로 다 해결됐네.”
용인족들은 삶의 희망을 얻었고.
하은은 용신의 힘을 손에 넣게 됐다.
그뿐인가?
하은을 믿고 따르는 수천, 수만 명의 세력이 생긴 셈이니 이보다 완벽한 결말은 없으리라.
‘누나한테 부족한 게 전위였으니까.’
수천의 용인족 전사들이 그녀를 지킨다면 하은이 지닌 강력한 화력을 백 프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이득을 봤다고 해도 좋으리라.
‘남은 건 용인족들의 마력 폭주를 제어하는 방법인데.’
지금까지는 그래도 용자리 성흔으로 어떻게든 억제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점점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용인족들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도 누나의 용안이 있으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용안의 힘의 용의 마력을 제어하는 것.
용신의 영혼도 제어할 수 있었는데 고작 용인족 안에 깃든 마력을 제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자네 말대로 잘 해결된 것 같군.”
단상 뒤에 숨어 있던 오진에게 켈리온이 다가왔다.
거짓말을 한 게 마음에 걸리는지 착잡한 눈빛이었지만, 전보다 한결 밝아진 표정이었다.
“예, 이제 용인족에게 살아갈 희망이 생기게 되겠죠.”
비록 예전처럼 용신의 직접적인 보살핌은 받을 수 없겠지만.
그들은 용신의 보살핌 속에서 벗어나 노예가 아닌, ‘용인족’이라는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당장은 용신의 역할을 그냥 누나가 대체한 느낌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도 바뀌지 않을까.
아니, 바뀌어야만 할 것이다.
언제까지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마경은 녹록한 세계가 아니었으니까.
“인제 와서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네.”
켈리온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가요?”
“카일루스 님의 예언 말일세.”
용안을 지닌 여인이 용인족들을 구원할 거라는 예언.
물론 용신이 깨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가 남긴 예언은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았는가?
“우리가 생각했던 구원과는 좀 달라졌지만… 그래도 저토록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게 카일루스 님이 예언했던 진짜 구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켈리온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연회장 밖으로 우르르 달려나가는 용인족들을 바라봤다.
용들을 받들어 모시기 위해서 태어난 용인족이라는 종족.
그들이 노예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스스로 한 걸음 내디딘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오진은 감상에 젖어 있는 켈리온을 보며 피식 웃었다.
“뭐, 그렇게 생각하면 얼추 맞아떨어지긴….”
우뚝.
오진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
그래.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그의 예언은 얼추 맞아떨어진다.
지나칠 정도로.
어색할 정도로.
정확하게.
“장로님. 카일루스가 남긴 예언이 정확하게 뭐라고 했죠?”
“응? 처음에 말하지 않았나?”
켈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용안을 지닌 여인이 잠든 용신을 깨워 용인족을 구원할 거라는 예언이었네.”
그중에 빗나간 건 ‘잠든 용신을 깨운다’는 것뿐.
나머지는 켈리온의 말마따나 얼추 맞아떨어졌다.
‘잠깐만.’
머리가 뜨겁다.
오싹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퍼졌다.
“장로님… 용신이 잠들게 된 이유는 뭐였습니까?”
“마인족과의 전투에서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하셨기 때문이라고 했다네.”
“그 말을 한 건 누구였는데요?”
“카일루스 님이시지. 그분은 최후의 전쟁에서 마지막까지 용신님과 함께 싸워주셨다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전쟁 한복판에서 너무 많은 힘을 사용했다고 ‘잠들’었다니.
“…그렇다면 용신의 영혼을 영혼석에 옮겨 담은 것도.”
“물론 카일루스 님이시지.”
“…….”
끼릭, 끼릭.
어긋나 있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감각.
오진은 뜨거워진 이마를 부여잡으며 까득 이를 갈았다.
왜.
하필 ‘잠든 용신을 깨운다’는 예언만 빗나갔던 걸까?
‘잠든 용신을 깨울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면?’
아니.
애초에 용신이 ‘잠든’ 것부터가 그의 의도였다면?
‘그렇다면 카일루스의 정체는….’
오진은 입술을 짓씹었다.
한 가지 더, 걸리는 게 있었다.
“그 인간 예언자의 이름이… 뭐라고 했죠?”
“카일루스. 카일루스 베네딕토 님일세.”
카일루스 베네딕토.
“…베네딕토.”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오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연회장 밖으로 다급히 달려갔다.
뒤에서 켈리온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빌어먹을…!”
왜 미리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왜 더 빠르게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오진이 대연회장을 나가 달려간 곳은 그와 하은, 이사벨라가 함께 묵고 있는 집이었다.
마인족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그나마 멀쩡하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집.
콰앙!
거칠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놀란 표정의 이사벨라가 보였다.
“무, 무슨 일 있으신가요?”
이번 사기극에서 딱히 맡은 역할이 없었던 그녀는 얌전히 집에서 오진과 하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진은 가쁜 숨을 내쉬며 이사벨라를 바라봤다.
“베네딕토라는 단어 들어봤어?”
“베네딕토요?”
“응.”
초등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그조차 어디선가 얼핏 들어본 기억이 나는 단어라면, 어렸을 적부터 영재 교육을 받아온 이사벨라라면 분명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있으리라.
“가톨릭에서 자주 쓰는 단어네요.”
“가톨릭?”
“예. 예전 교황 이름도 베네틱토였어요.”
이사벨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Benedictio’라고 적었다.
“라틴어로 ‘은총’이라는 뜻이에요.”
“…….”
등골을 타고 번지는 질척한 불쾌감.
오진은 주먹을 부서지라 움켜쥔 채 말을 이었다.
“카일루스는?”
“음. 카일루스도 라틴어라고 하면….”
이번에 수첩에 적은 것은 ‘Caelus’라는 단어.
“아! ‘하늘’이라는 뜻이네요!”
카일루스 베네딕토.
Caelus Benedictio
하늘, 은총.
하늘의 은총.
“…하은.”
하.
오진의 입술 사이로 나른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어깨를 들썩였다.
“언니가 왜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사벨라.
그녀는 모르겠지.
‘하은’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을.
세상에서 그걸 알고 있는 건 오진과 하은, 둘뿐이었다.
‘아니.’
한 명 더 있지.
그걸 ‘세 명’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미안, 잠깐 나갔다 올게.”
“오, 오진 씨?”
문을 박차고 나갔다.
사냥개자리의 성흔을 활성화해 하은이 있는 곳을 찾았다.
“아악! 놔! 놔 이것들아! 나도 일할 수 있다고오!”
“쉬, 쉬셔야 합니다, 무녀님!”
용인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하은.
오진은 먼발치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벽에 등을 기댔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한 실소를 흘렸다.
하늘의 은총이라니.
“…누나가 알아주기라도 바랐던 거냐.”
아니면 단순한 자기만족이었을지도 모르지.
“너는 왜….”
왜 그런 짓을 했냐, 는 물음을 이어가려다 문뜩 과거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별빛이 쏟아지는 옥상.
그곳에서 나눴던 소녀와의 약속을.
가슴에 아로새긴 맹세를.
-내가 누나를 지켜줄게.
그래.
괜한 감수성에 취해 그런 말을 내뱉었었지.
“하.”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지킨다는 게 꼭 직접 나서서 지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 자신이 강해지는 것도.
수천, 수만의 추종자를 만들어 그녀를 따르게 만드는 것도.
넓게 보면 ‘지킨다’라는 행위 안에 속하게 되니까.
“대체 그걸 위해 몇 명을…!”
벼락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백 년 전 용신을 잠들게 만든 게 자신이라면.
이 모든 게 하은을 위한 한낱 사기극에 불과했다면.
그가 깨어날 거라는 예언 하나를 믿고 그 아득한 시간을 견뎌 왔던 용인족들은 뭐가 된단 말인가.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누나.
하은에게 내뱉었던 말이 머리를 돌려 자신을 향한다.
몇 명을 속이던 그딴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진실처럼 보이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니까.”
오진은 까득 이를 갈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알 수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너는, 나였으니까.
나는, 너였으니까.
* * *
쿠르륵, 쿠륵.
검은 먹구름이 끈적한 타르처럼 형태를 바꾼다.
그 형체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육체.
어린아이가 뒤죽박죽 진흙을 주무르는 것처럼 계속해서 육체가 무너지고, 재생되고를 반복한다.
“크흐.”
시간을 역행한 대가.
별의 순리를 거스른 죗값은 독처럼 그의 몸을 잠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 하하.”
그는 나지막이 웃음을 터트렸다.
초마다 그 형태를 바꾸는 검은 먹구름 속에서 푸른 귀화가 번뜩인다.
“잘… 들어갔네.”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선물이 제 주인을 찾아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검은 먹구름 사이로 메마른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 약속… 지킨, 거다?”
그런데.
누구랑 한 약속이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