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3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34화
보물찾기 (13)
데이모스가 죽은 후.
황금의 기사들을 비롯한 지하 도시의 마인들을 다급히 갱도 밖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공’이 죽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이 새끼들이 어딜 튀려고?!”
“얌전히 죽으렴?”
물론 그들이 다급히 꽁무니를 뺀 결정적인 이유는 하은과 이사벨라의 눈부신 활약 덕분이었다.
용안, 용의 심장, 용신의 영혼까지 삼위일체의 힘을 손에 넣으며 단순한 화력만 놓고 보면 11성에 도달한 각성자와 맞먹는 힘을 지니게 된 하은과 오진의 피 덕분에 10성 끝자락에 서서 이제 11성을 바라보고 있는 이사벨라.
초인적인 힘을 지닌 두 여인의 합공에 황금의 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하 도시들의 마인들이 모두 후퇴한 후.
붙잡혀 있던 샐러맨더들을 풀어준 오진 일행은 텅 빈 데이모스의 성 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야, 진짜 어디 하나 안 번쩍거리는 데가 없네.”
하은이 짧은 탄성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찻잔이나 촛대 따위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오진에게 다가왔다.
“오지나 이거 좀 챙겨갈까?”
“챙겨서 뭐 하게.”
“팔아야지! 여기 안에 별의 마력도 깃들어 있다며?”
지구로 돌아가 황금을 판매한다면 엄청난 거금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만.
“됐어. 딱히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돈이야 굳이 황금을 팔지 않더라도 먹고 살기는 충분할 정도로 있었다.
“이야… 내가 살다 살다 오지니 입에서 돈이 필요 없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악착같이 돈을 모으던 시절 오진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거야 누나 때문에 모았던 거고.”
하은이 몸을 회복한 이상, 더 이상 돈은 필요 없었다.
“그, 그러냐?”
괜스레 얼굴을 붉히며 뺨을 긁적이는 하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훈훈한 분위기 속 이사벨라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천권성님은 어디 계셔요?”
“아마 방에 계실 거야.”
백무강을 떠올리자 오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잠깐 같이 보러 갈까?”
“그래. 슬슬 밥도 먹어야 하니까.”
오진과 하은, 이사벨라는 백무강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헤, 헤헤.”
백무강은 손때가 묻은 꼬질꼬질한 편지 봉투를 손에 쥔 채 헤실헤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착한 사람! 착한 사람 왔구나!”
침대에 누워있던 백무강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오도도 달려왔다.
“몸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어르신?”
“팔, 아직 잘 움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프지는 않아!”
데이모스에게 짓밟혔던 팔을 들어 올리며 환히 웃는 백무강.
“다행이네요.”
오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방 안을 살폈다.
방바닥 구석에 나뒹굴고 있는 데네브의 성검이 보였다.
초라하게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성검을 보자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성검이 보물이 아니었다니.’
처음 백무강이 성검을 보고 자신의 보물이라 소리쳤을 때 느꼈던 위화감.
어딘가 맞물리지 않았던 톱니바퀴가 이제야 맞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성검 따위는 필요 없는 거였어.’
그에게 중요했던 건 성좌에게 하사받은 성검보다, 그 성검의 검자루 안에 보관하고 있던 꼬질꼬질한 편지 봉투뿐이었다.
‘검자루 안이 비어있을 줄은 몰랐지.’
일반적인 검이었다면 검자루 안에 비어 있을 리가 없었지만.
데네브의 성검의 경우 검자루 ‘안쪽’까지 술식을 새겨 넣기 위해 안에 빈 공간이 따로 존재했다.
‘직접 만든 데네브나 어르신이 아니었으면 안에 빈공간이 있는지도 몰랐겠지.’
오진도 시험 삼아 성검을 쥐어봤지만, 검자루 안이 비어 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무게와 균형감을 보여줬다.
신물이라 불리는 성검인 만큼 아마 사용자에 맞춰 무게와 균형이 세세하게 보정되는 것이리라.
“어르신, 성검을 저렇게 내버려 두면 나중에 데네브 님에게 혼나시는 거 아닙니까?”
“아! 까, 깜빡했다!”
백무강은 퍼뜩 몸을 돌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성검을 곱게 침대 위에 올려놨다.
“이, 이거 비밀이야? 데네브 님한테 이르면 안 된다?”
“예, 약속하겠습니다.”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무강에게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말하려고 했을 때.
“저… 할부지,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우응? 응응! 물어봐!”
“그거 편지 봉투 있잖아.”
손때가 묻은 꼬질꼬질한 편지 봉투에는 한 가지 위화감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
“왜… 안 열어 본 거야?”
손때가 가득 묻은 편지 봉투의 입구는 한 번도 열어본 흔적 없이 굳게 닫혀 있었다.
“…….”
헤실헤실 웃고 있던 백무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멈춰있던 그는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그대로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미소를.
“나, 할멈한테 나쁜 짓 많이 했어.”
그러니까.
“할멈 나한테 화 많이 났을 거야.”
겁에 질린 동물처럼 움츠러든 목소리.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편지 봉투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편지.
몇 번을 열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차마 열어 볼 수 없었다.
“안 좋은 말… 쓰여 있을 거야.”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자신을 향한 증오로 가득 차 있을까 봐.
그녀와 함께 지냈던 삶이 부정당할까 봐.
“그래서… 열어보면 안 돼.”
백무강은 편지 봉투를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렸다.
“…….”
하은은 어떤 위로조차 그에게 하지 못한 채 안타까운 눈으로 백무강을 바라봤다.
비단 하은만이 아닌 방 안에 있던 오진도, 이사벨라도 차마 백무강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편지 안에 무슨 말이 적혀 있을지는, 그들도 알 수 없었으니까.
오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백무강의 손에 쥐어진 편지를 바라봤다.
‘5년을 혼자 수발들었다고 했던가.’
백무강의 아내가 죽은 건 지구에 ‘최초의 균열’이 나타나기 직전.
즉, 백무강이 아직 데네브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때였다.
아내가 불임인 탓에 둘 사이엔 따로 자식도 없었기에, 치매에 걸린 백무강을 홀로 보살폈다고 한다.
‘그러다가 병에 걸려 어르신보다 먼저 죽었고.’
듣기만 해도 입 안이 씁쓸해지는 이야기였다.
“아, 시, 식사 준비됐는데 식사부터 하실래요? 좋아하시는 만두도 있어요.”
“와아! 만두! 나 만두 먹을래!”
어색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깬 건 이사벨라였다.
백무강은 언제 움츠러들었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물우물. 헤헤. 만두 맛있다!”
“천천히 드세요.”
그렇게 식사가 끝난 후.
오진 일행은 성 안에 남아도는 방으로 흩어져 각자 시간을 보냈다.
“하아.”
방으로 돌아온 오진은 한숨을 내쉬며 창가 앞에 앉았다.
산 안에 만들어진 성이라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 칙칙한 화강암밖에 없었지만.
“…….”
어째서일까.
편지를 끌어안은 채 겁에 질려 있던 백무강의 모습이 쉽사리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하은이나 이사벨라인가 싶어서 방문을 열었지만, 예상외로 문 앞에 서 있던 건 백무강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부탁이 있어.”
부탁?
“이거.”
백무강은 손에 쥔 편지 봉투를 오진에게 내밀었다.
“…대신 봐줄 수 있어?”
떨리는 눈으로 오진을 바라보는 백무강.
오진은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받아들며 물었다.
“열어보면 안 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응, 맞아.”
백무강은 슬픈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서 많이 생각했어.”
보물을 잃어버린 후.
얼마나 많이 후회했던가.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을 영영 알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마나 겁에 질렸던가.
“봐야 해.”
이번에 보지 않으면 언제 또 언제 보물을 잃어버릴지 몰랐다.
“하, 하지만. 조금 무서워.”
“그래서 제가 대신 봐달라는 겁니까?”
“응. 착한 사람, 믿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전 중국어를 읽을 줄 모릅니다만….”
대화를 주고받는 거야 통역 장치를 쓰면 가능했지만.
글까지 읽을 수는 없었다.
“우리 할멈, 한국 사람. 할멈도 한자 잘 몰라서 편지, 한국어로 적혀 있을 거야.”
“…그렇습니까?”
오진은 손에 쥔 꼬질꼬질한 편지 봉투를 내려다봤다.
어째서일까.
가벼운 편지 한 장이 들어있을 뿔일 텐데도, 더 없이 봉투가 무겁게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백무강이 자신에게 대신 봐달라는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수도 없이 고민했을까 생각하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으, 응. 부탁할게.”
백무강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긴장에 찬 표정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오진은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서 나온 곱게 접힌 종이 한 장.
설원처럼 새하얀 종이 위에는.
‘이혼 동의서’라고 적힌 딱딱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
숨이 틀어막히는 감각.
오진은 편지에, 아니 서류에 적힌 글귀를 보고 입술을 짓씹었다.
“이 편지는… 아내분이 직접 건네주셨습니까?”
“우응? 아냐. 우리 할멈 일 나갔다가 쓰러져서 다시 못 일어났어.”
“그럼 이 편지는….”
“할멈 옷 주머니에 들어있었어.”
그러니까.
애초에 이건 ‘편지’ 따위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치매에 걸린 남편을 몇 년이고 돌봐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아픈 몸을 이끌고 일터에 나갔을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다면 더더욱 지옥 같았으리라.
아무리 남편을 사랑한다고 해도, 세상에는 사랑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다.
괴로웠겠지.
고통스러웠겠지.
모든 걸 포기한 채, 도망치고 싶었겠지.
‘세상에는… 참아서 해결되지 않는 일들뿐이니까.’
세상은 영화가 아니다.
삶은 드라마와는 다르다.
끝없는 고통과 절망을 꿋꿋하게 견디며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뭐, 뭐라고 적혀 있어?”
두 눈을 질끈 감은 백무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진은 손에 쥔 서류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답했다.
“어르신과 만나서 행복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서류 위를 손으로 훑으며 변형을 사용했다.
검은 먹구름이 서류 위에 적힌 글자를 지우며 새롭게 글자를 만들어냈다.
“저, 정말? 정말이야?!”
퍼뜩 눈을 뜬 백무강이 오진의 손에 쥐어진 편지를 낚아채 갔다.
“헤, 헤헤.”
주름진 눈가를 타고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제껏 읽어보지 못했던 편지를 소중히 품속에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헤헤, 정말… 정말 다행이다.”
흐느껴 우는 백무강을 바라보며 오진은 씁쓸히 웃었다.
“…예, 다행입니다.”
진실이란 너무 써서, 때로는 거짓말이란 조미료가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