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35)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35화
막간 – 조우 (1)
데이모스와 황금의 기사들을 격퇴한 지 사흘이 흘렀지만.
오진 일행은 아직 영지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데이모스의 성에 남아있었다.
하은과 이사벨라의 경우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축복의 후유증이 남은 오진과 한쪽 팔이 짓이겨진 백무강이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으음.”
창문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빛무리에 오진은 눈을 떴다.
지하에 만들어진 도시인 만큼 당연히 해가 뜨는 건 아니었지만, 정해진 시간이 되면 천장에 설치된 성유물이 빛을 뿜기 때문에 마치 아침이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 일어나셨나요 오진 씨?”
귓가를 간질거리는 달콤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그의 팔을 베고 누운 이사벨라가 배시시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황금을 녹여 만들어낸 듯한 백금발과 눈꽃처럼 새하얀 살결, 붉은빛으로 빛나는 도톰한 입술이 시선을 훔쳤다.
팔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과 귀를 간질이는 숨결에 오진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여긴 왜….”
“쉿, 언니가 깰지도 몰라요.”
언니?
“후으음. 오지나아.”
옆을 바라보니 반대쪽 팔을 베고 누운 하은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오진은 팔을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는 하은을 바라보며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같이 오진 씨를 깨우러 왔다가 너무 곤히 자고 계셔서 잠깐 옆에 누웠어요. 언니는 그새 다시 잠들어 버렸고요.”
두 사람이 방에 들어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잠들어 버린 건가.
확실히 축복의 후유증이 크긴 큰 모양이었다.
“끄응. 몇 시야? 꽤 오래 잔 거 같은데.”
“앗, 잠시만요.”
이사벨라가 몸을 일으키려는 오진의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바짝 다가왔다.
하아.
달뜬 숨을 내쉰 이사벨라가 목덜미를 날름 핥았다.
간질거리는 감촉과 함께 날카로운 송곳니가 목덜미를 파고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크읏.”
송곳니가 파고들었음에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렬한 쾌감이 전신에 퍼졌다.
오진은 신음을 억누르며 전신을 뜨겁게 달구는 쾌락을 견뎠다.
“후음. 꿀꺽, 꿀꺽.”
두, 세 모금 정도 피를 마신 이사벨라가 목덜미에서 떨어졌다.
흰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친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침에 마시는 오진 씨의 피는 더 각별하네요.”
“그게 그렇게 모닝커피 한 잔 때리는 느낌으로 말해도 되는 거야?”
“후훗. 요즘엔 이게 없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 느낌이에요.”
그 정도면 중독인 것 같은데.
“맞아요. 전 중독됐어요. 피뿐만 아니라, 오진 씨의 모든 것에.”
“어, 음.”
“왜요?”
“아니, 방금 그 대사는 좀….”
많이 오글거리네.
“읏! 바, 방금은 피를 막 빨아서 머리에 너무 열이 올라서 그랬어요!”
“전 중독됐어요….”
“오, 오진 씨!”
되짚어 생각해 보니 꽤나 오글거리는 대사였다는 걸 자각한 건지 이사벨라는 얼굴을 붉히며 오진의 가슴을 퍽퍽 주먹으로 때렸다.
“아으… 아침부터 뭐야 시끄럽게 쓰리.”
옆자리에서 곤히 자고 있던 하은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누나, 누나. 방금 벨라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엉? 뭐라 했는데?”
“꺄아아악! 머, 멈추세요! 당장!”
이사벨라가 비명을 지르며 오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오진은 낄낄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자서 그런가 배고프네.”
“…오진 씨는 오늘 밥 없어요.”
“아니, 왜.”
내가 말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몰라요.”
이사벨라는 단단히 삐졌는지 콧바람을 뿜으며 방문을 쿵, 닫고 나갔다.
“뭐야? 아까 뭐라 했는데 저래?”
“아니 뭐, 그냥 요즘 내 피가 더 맛있어졌다 하더라고.”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진짜 하루 종일 쫄쫄 굶을 것 같다는 생각에 대충 말을 돌렸다.
“흐응… 진짜 그렇게 맛있나?”
하은은 오진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지나. 나도 네 피 한번 마셔보게 칼로 목 좀 그어봐.”
“무슨 미친 소릴 하는 거야.”
목을 긋긴 왜 그어.
“아니, 살짝만 그으라는 거지 짜식아 무슨 호러 영화처럼 냅다 그으랬냐?”
“됐네요 이 사람아.”
손바닥으로 하은의 엉덩이를 한 대 철썩 때리며 기지개를 켰다.
“끄응.”
축복의 후유증 때문일까.
평소보다 훨씬 오래 잠을 잤음에도 영 몸이 찌뿌둥했다.
“몸은 좀 어때?”
“아직 찌뿌둥하네.”
“으이구, 그러게 누가 그렇게 함부로 도핑하래?”
성좌의 축복을 가지고 도핑이라니.
아니, 사실 효과만 보면 좀 비슷하긴 하지만.
“아 참, 아까 보니까 똥강아지 왔더라?”
“리아크가?”
“엉.”
지독한 유황 가스 때문에 잠시 성소로 피신해 있던 리아크가 이번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하긴, 영지 안에는 정화 장치가 있으니까.’
정확히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오진도 알 수 없으나.
원래라면 지독하기 그지없어야 할 영지 안의 공기는 마치 시골 산골짜기에 내려온 것처럼 맑고 청량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밥 먹으러 가자, 누나.”
“엉. 잠만 머리 좀 정리하고.”
허리까지 내려온 붉은 머리칼을 묶은 하은이 오진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아! 착한 사람! 잘 잤어?!”
기다란 복도를 걷다 보니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응응! 아주 잘 잤어!”
손에 쥔 편지를 펄럭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백무강.
하은이 씨익 웃으며 백무강에게 다가갔다.
“얘기 들었어 할부지. 드디어 편지 읽어봤다며?”
“응! 오진이 도와줬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백무강의 모습에 하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저렇게 들떠 있는 모습을 보니 다행히 편지 안에 나쁜 말은 적혀 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하은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백무강의 어깨를 쿡쿡 팔꿈치로 찔렀다.
“어디, 어디, 뭐라 적혀 있었어? 막 부끄러운 말 적혀 있던 거 아냐?”
“그건… 헤헤, 비밀!”
“아 왜~ 알려줘도 되잖아 할부지.”
“안 알려줄 거야!”
고개를 도리도리 젖는 백무강과 그의 뒤를 쫓으며 집요하게 편지 내용을 물어보는 하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
오진은 백무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이라고 편의상 부르고 있지만 무도회를 열어도 될 법한 화려한 홀에 도착하자 식사를 준비하는 이사벨라와 그녀의 곁에 앉아 있는 리아크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일어났나, 애송이.”
“엉. 언제 왔어?”
“몇 시간 전에 왔는데 네놈이 세상모르고 퍼질러 자고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리아크는 쯧쯧 혀를 차며 ‘전사는 어쩌고’로 시작되는 지루한 잔소리에 발동을 걸었다.
오진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아아, 됐고. 무슨 일로 왔어?”
“끄응. 베가 님이 네놈의 상태를 좀 확인해 보라고 보내셨다.”
베가가 시켜서 온 거였냐.
“베가는 좀 어때?”
소리를 차단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성역도 쓰고 마지막엔 축복까지 썼으니 제법 타격이 있을 것이다.
“뭐, 네놈이 걱정할 정도의 상태는 아니다.”
“다행이네.”
“그래도 한동안은 현신하지 못하실 거다.”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 앉았다.
오늘의 메뉴는 간단한 냉동 돈가스.
그냥 꺼내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러 튀기기만 하면 되는 간편한 요리였다.
‘이게 또 근데 냉동치고는 퀄리티가 괜찮단 말이지.’
입맛을 다시며 돈가스가 튀겨지길 기다리고 있을 때.
“맛있게 드세요 오진 씨.”
이사벨라가 방긋 미소 지으며 오진의 접시 위에 까맣게 탄 무언가를 올렸다.
‘뭐야 이거.’
석탄인가?
“저… 이사벨라 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드셔주실 거죠?”
“…….”
아무래도 당분간 제대로 밥 먹긴 그른 것 같네.
* * *
“어디 그럼.”
식사(?)를 마친 후 오진은 데이모스와의 격전이 치러졌던 황금의 보고에 내려왔다.
보고 안에는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오진은 데이모스가 모아왔던 보물들을 한곳에 모았다.
그중 대부분이 전투의 여파로 인해 부서지거나 으깨져 있으니까.
‘아직 안에 깃든 마력은 남아 있어.’
스마트폰이 망가져도 그 안에 배터리는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성유물로서의 기능은 고장 났지만 그 안에 깃든 마력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진의 시선이 쓰러진 데이모스의 시체로 향했다.
데이모스가 죽은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그의 시체에서는 강대한 성흔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걸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지.”
오진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보고의 문을 굳게 닫았다.
보고를 지키고 있던 수십 겹의 결계는 전투의 여파 속에서 망가지지 않은 상태니 열쇠의 역할을 하는 성유석이 없다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리라.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꼼꼼하게 확인한 오진은 보고 한가운데 서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흑천.’
꾸르르륵.
오진의 몸에서 검은 먹구름이 뿜어져 나와 안개처럼 주변을 뒤덮었다.
흑천에서 흘러나온 먹구름은 이제껏 데이모스가 모아왔던 수백, 수천 가지의 성유물들 안에 깃든 마력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크윽.”
용맥을 흡수했을 때와 비슷할 정도로 거대한 마력의 격류가 몸속으로 밀려들었다.
‘이거 상상 이상인데?’
순수한 마력의 양만 놓고 보면 하은이 흡수했던 용신의 영혼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마력.
물론, 양만 무식하게 많을 뿐이지 질적으로 따지면 용신의 영혼보다 한참 모자라겠지만.
‘아직 메인디쉬도 안 먹은 상태란 말이지.’
데이모스가 모아온 성유물은 에피타이저에 불과했다.
꾸르르륵.
성유물 안에 깃든 마력을 모조리 먹어 치운 검은 먹구름은 설탕에 달려드는 개미 떼처럼 데이모스의 시체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아.”
데이모스의 마력이 몸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천마의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까.
성유물 안에 깃든 마력과는 다른, 어딘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마력이 심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쿠르르르르르륵!
전신의 모공을 통해 검은 먹구름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소용돌이치는 흑천의 구름.
맑은 방울 소리와 함께 눈앞에 푸른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흑천의 열 번째 개화.
심장에 웅크려 있던 검은 하늘이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흑천이 십성개화(十星改化)에 도달했습니다!]이번엔 또 무슨 기억이 흘러들어올까 생각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을 때.
[각성자 이신혁의 기억 일부가 전승됩니다!]쿠륵, 쿠르르르륵.
소용돌이치던 검은 먹구름이 마치 발작을 일으키듯 흩어지고 뭉치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뭐야?’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눈살을 찌푸렸을 때.
[확인되지 않는 힘이 전승에 개입합니다.] [오류 발생.] [전승이 취소됩니다.]“크으으으윽!”
치지지지지직!
시야가 뒤틀리며 암전한다.
눈을 뜬 곳은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어둠.
“뭐야… 여긴?”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을 때.
“이렇게 직접 얘기하는 건 처음인가?”
어둠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도 익숙한, 지나칠 정도로 친숙한 목소리가.
“너는….”
오진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르륵.
어둠 속에서 푸른 귀화가 타올랐다.
“알고 있잖아?”
검은 먹구름 속에서 걸어 나오는 자신과 똑같은 외모를 지닌 청년.
“나는, 너다.”
천마는 오진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