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36)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36화
막간 – 조우 (2)
나는, 너다.
어둠 속 울려 퍼지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숨이 턱 막혀온다.
“…천마.”
오진은 떨리는 눈으로 거울에 비친 듯 자신과 똑같은 외모를 지닌 청년을 바라봤다.
아니, ‘거울에 비쳤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 좀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외모 자체는 흡사했지만,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아예 달랐으니까.
짙은 피로에 찬 눈동자.
인간이라는 조각이 극한으로 마모되면 아마 저런 형태를 띠고 있지 않을까.
인간이 아닌 인간의 형상을 한 인형과 마주한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 이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쪽팔리게 천마가 뭐야, 천마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는 청년.
“그렇다고 오진이라고 부르긴 좀 그렇잖아?”
“하긴, 구분 지을 게 필요하긴 하지.”
천마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의자라도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앉았다.
“너도 앉지?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고개를 까딱이며 턱으로 반대편을 가리키는 천마.
오진은 혼란스러운 심정을 감추며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차라도 한 잔 내오지 그래?”
“여긴 네 무의식의 공간이야. 필요하면 네가 만들면 될 텐데.”
“만드는 법을 몰라서 말이지.”
“그래?”
천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손을 튕겼다.
어둠으로 가득 차 있던 공간에 테이블과 함께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이 만들어졌다.
오진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역시, 내 무의식에도 개입할 수 있는 건가.’
자신의 무의식 속인 데도 아무렇지 않게 물건을 만들어내는 천마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천마는 테이블 위에 찻잔을 후루룩 한 모금 마시며 피식 웃었다.
“나도 자주 썼었지, 그 방법.”
“…무슨 방법?”
“쓸데없는 말을 하면서 상대방을 떠보는 것.”
탁. 테이블 위에 내려둔 찻잔이 스르륵 사라졌다.
“사실은 너도 만들 수 있지?”
“…하.”
오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천마의 반대편에 앉았다.
딱.
가볍게 손을 튕기자 사라졌던 찻잔이 다시 만들어졌다.
천마는 예상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쯧.’
얕은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다면 괜히 간 볼 필요 없이 직설적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내 무의식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데이모스에게 손을 좀 써뒀거든.”
“내가 놈의 시체를 흡수하면 흑천에 개입할 수 있도록?”
“정확해.”
그렇다면.
수십 년 전 데이모스가 천마에게 힘을 받은 그 순간부터 자신이 데이모스를 죽여 흡수할 걸 예상했다는 건가.
“너라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어. 아니, 여기선 ‘나’라고 해야 하나?”
천마는 실소를 흘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오진은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드래고니안 왕국에도 그딴 짓을 해둔 거냐?”
“드래고니안 왕국?”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은 천마.
“아아, 그래. 약속…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잠깐, 누구랑 했던 약속이었지?”
“……?”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천마의 모습에 오진은 가늘게 눈을 떴다.
저 표정.
어디서 본 기억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직접 ‘해본’ 기억이 있었다.
“설마… 기억을 잃어버린 거냐.”
“…….”
굳게 입을 다문 천마.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으니까.”
“대체 얼마나 많은 기억을….”
“아아,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나지막이 고개를 젓는 천마.
“가장 중요한 건, 잊어버리지 않았으니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
그 둘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서까지 내 의식에 침입한 이유는 뭐지?”
“그냥 한 번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을 뿐이야.”
“얘기?”
“그래, 달라진 미래에 내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거든.”
천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오진을 바라봤다.
“이번에 직접 얘기해 보고 안심했어.”
“안심했다니?”
뭘 안심했다는 말인가?
“미래가 달라졌어도, 결국 너는 나라는 걸.”
과거가 변했더라도.
현재가 뒤집혔더라도.
미래가 비틀렸더라도.
너는.
나였다.
“글쎄, 나는 좀 생각이 다른데 말이지.”
오진은 날카로운 눈으로 천마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너랑 달라.”
정확히는, 달라져야 했다.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이상 미래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뭐, 너랑 내가 같으면 내 몸을 네가 뺏어가기라도 할 생각이냐?”
천마의 정체에 대해 깨달았을 때.
그의 목적이 뭔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 바로 그가 자신의 육체를 빼앗아 하은을 차지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천마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자신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간절하게 바라던 미래의 모습이었을 테니까.
“응? 푸흡! 하하하하!”
무엇이 그리 웃긴 걸까.
천마는 배를 잡고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렇다면 네 목적이 뭔데?”
하은의 행복을 바라는 거라면.
‘천마’라는 존재 자체만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글쎄?”
얘기해줄 생각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천마.
“뭐, 어차피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천마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슬슬 시간이 다 돼가네.”
남의 무의식 공간에 계속 남아있을 순 없는 모양인지 천마의 모습이 점차 검은 먹구름이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기다려, 아직 얘기 안 끝났어.”
멋대로 들어와 놓고 두루뭉술한 대답만 늘어놓은 채 돌아가려 한다고?
“더 있고 싶어도 슬슬 한계라서 말이지.”
“…너.”
“아 참, 그래도 선물을 하나 준비했으니까 지루할 틈은 없을 거야.”
선물을 준비했다고?
“…무슨 짓을 한 거냐.”
“직접 열어보기 전엔 알 수 없는 게 선물의 묘미 아니겠어?”
천마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손을 저었다.
“아쉬워하지 마. 어차피 조만간 다시 볼 수 있을 테니까.”
“그건 또 무슨….”
오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마의 몸이 완전히 어둠 속에 흩어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오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천마와의 조우.
처음 대화를 나눈 천마의 인상은 오진이 생각해왔던 그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멀쩡했어.’
전생에 세상을 멸망시켰다기에 정신 나간 광인일 거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가버렸다.
“여전히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일단 자신의 몸을 노리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믿을 수가 있어야지.’
상대방은 다름 아닌 ‘오진’ 아닌가.
솔직히 그의 입에서 나온 그 어떤 말도 믿을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업보가 터질 줄이야.”
양치기 소년의 상황이 딱 이러할까.
하도 밥 먹듯이 거짓말을 해대는 삶을 살아오다 보니 뭐가 진짜고 거짓말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 진짜라고 가정한다면.’
천마의 목적은 대체 무엇일까.
“…….”
고민을 이어가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하은의 행복만이 목적이라면 굳이 마경의 세력을 모아 지구를 쳐들어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확실한 건, 놈을 믿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거야.’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멀쩡해 보인다고 해서 순순히 그의 계획에 장단을 맞춰줄 수는 없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고 해도 그는 결국 ‘천마’였으니까.
한 세계를 멸망시켜버린, 헤아릴 수 없는 생명을 먹어 치운 괴물이었으니까.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오진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천마의 목적이 뭔지 알 수 없는 이상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선물이라.’
원래라면 ‘선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야 할 테지만.
그 앞에 ‘천마의’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는 순간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무슨 수작을 부렸을지 몰라.’
사라지는 척을 하고 실제로는 아직 남아있다던가.
아니면 흑천을 폭주시키거나 강제로 조종하는 수작을 부려뒀을 수도 있었다.
“후우.”
오진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그가 남기고 간 ‘선물’이라는 것을 찾았다.
흑천의 기운을 전신에 퍼트리며 무의식의 공간부터 육체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변화를 체크했다.
‘달라진 게 있긴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오진이 열 번째 개화하면서 흑천의 기운이 강해졌기 때문이지 천마의 수작처럼 느껴지는 변화는 없었다.
“뭐야 대체…?”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슬슬 나갈까.’
이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 홀로 남아있어봤자 더 이상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오진은 정신을 집중하고 가라앉아 있던 의식을 깨웠다.
주변을 둘러싼 어둠이 흩어지며 주변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쿠르르르르륵!
눈을 뜨니 검은 먹구름이 주변을 한가득 뒤덮고 있는 게 보였다.
안개처럼 보고를 뒤덮은 검은 먹구름을 다시 심장 속으로 갈무리했을 때.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굳건히 닫혀 있던 보고의 문이 터져나갔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해일처럼 쏟아져 나온 검은 그림자가 오진의 몸을 휘감았다.
“크윽!”
갑작스러운 상황에 오진은 재빠르게 성흔의 마력을 끌어올렸지만, 정체불명의 습격자가 한 발짝 더 빠르게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여기 계셨네요. 이번에는 좀 더 꼭꼭 숨어계실 줄 알았는데?”
날름거리는 기다란 혓바닥.
찬란한 백금발과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눈동자.
순식간에 오진을 제압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가녀린 체형의 여인이 팔을 들어 올렸다.
스르르르륵!
새하얀 손끝에 그림자로 이뤄진 뱀의 머리가 만들어졌다.
여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죽으세요, 천마 님.”
그림자 뱀이 입을 쩌억 벌리며 다가왔다.
“잠깐, 잠깐, 잠까마안!”
오진은 다급히 외치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 잘 못 봤어, 카시아!”
“…오진 씨?”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동그랗게 눈을 뜨는 카시아.
“어, 어라? 이상하다? 분명 여기서 천마 님의 기척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보며, 오진은 천마가 준비했다던 ‘선물’이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멀쩡했다고?’
헛소리.
천마는 오진이 처음 생각했던 대로,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