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37)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37화
검은 하늘 (1)
“하아.”
갑작스러운 카시아의 습격(?)에서 벗어난 후.
오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에 깃들어 있는 마력을 잃은 채 빈 껍데기만 남은 보물들 위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냅다 오진을 덮친 게 미안한지 머리칼을 검지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카시아를 바라봤다.
“말씀드린 대로에요. 여기서 천마님의 기척이 느껴져서 착각했어요.”
천마와 자신은 똑같은 흑천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천마의 기척’이라고 딱 구분 짓는 것을 보면 오진이 지니고 있는 흑천에 반응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즉.
애초에 천마가 일부러 자신의 기척을 흘려 그녀를 이쪽으로 유도했다고 생각하는 게 맞으리라.
“이제까지 천마의 뒤를 쫓고 있었던 거야?”
그녀가 마경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경에서 뭘 하며 돌아다니고 있는지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정확히는 천마님의 의체, 죠.”
“의체?”
“예. 천마님 본신은 지금 율법의 제약으로 인해 니플헤임에 봉인되어 계시거든요.”
“봉인되어 있다고?”
그래서 자신을 직접 만나러 오지 않고 무의식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접근한 건가.
“예. 뭐, 저도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오래되지 않았지만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카시아.
오진이 왕국들을 돌아다니는 사이 그녀에게도 여러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왜 그 의체를 쫓아서 죽이려는 건데?”
“그래야 천마님의 봉인이 풀리는 걸 조금이라도 더 늦출 수 있으니까요.”
봉인이 풀리는 것을 늦춘다, 라.
천마에게 들었던 ‘조만간 다시 볼 수 있다’는 말이 머리를 스쳤다.
“이미 세 번 정도 찾아 죽였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어버렸네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카시아.
‘아까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꼭꼭 숨어 있을 줄 알았다고 한 건가.’
천마는 카시아를 피해 숨는 대신, 오진을 노리도록 유도한 것이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봉인을 풀기 위해서.
“봉인이 풀리기까진 얼마 정도 남았어?”
“그건 저도 정확히 몰라요. 다만 최근 니플헤임의 마인들의 움직임을 보면….”
“얼마 남지 않았겠구나.”
조만간 다시 보자, 라는 말을 직접 했을 정도니.
천마의 봉인이 풀릴 날은 머지않았으리라.
“…예.”
카시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진은 고개를 숙인 채 씁쓸히 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왜… 천마의 봉인이 풀리는 걸 막고 있던 거야?”
새하얀 설원 속.
죽어가는 그녀를 구원한 존재는 천마였다.
물론 그녀를 구원한 이유는 율법의 제약으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대신해서 방해되는 존재를 제거할 꼭두각시가 필요했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입장에선 천마는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어머, 오진 씨가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카시아는 짓궂게 웃으며 오진에게 바짝 다가왔다.
“말씀해주셨잖아요. 오진 씨가 제 새로운 천마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
분명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카시아가 그 말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카시아는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쿡쿡, 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에요. 이건 제 나름의… 속죄, 에 가깝죠.”
속죄.
그녀가 천마에게 정신을 지배당하고 있던 사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는 익히 들은 바 있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죽여왔어요.”
셀 수 없는 피를 손에 묻힌 채 살아왔다.
비록 그것이 온전한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해도,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카시아.”
“후훗. 저도 알고 있어요. 제가 하는 짓이 가증스러운 짓이라는 걸.”
속죄를 한다고 해도 그녀가 무수한 생명을 앗아갔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저 자기 위로에 불과한 행동.
천마의 지배가 풀리고, 공허해진 빈자리를 속죄라는 편리한 방법으로 채우고 있을 뿐이다.
오진은 어딘가 잘 못 건드리면 부서져 버릴 듯 위태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카시아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며 살 필요 없어.”
손에 피를 묻힌 건 아니었지만.
남의 속여 고혈을 빨아먹으며 살아온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행동이 떳떳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변명할 생각도 없다.
다만.
“속죄만 하며 살아가기에는 너무 괴롭잖아.”
가증스러우면 어떤가.
이기적이라는 이유로 벌을 받기엔,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기적으로 살아간다.
“조금 더 뻔뻔하게 살아도 괜찮아. 뭐, 나중에 뒤져서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거고.”
“…….”
카시아는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 몰랐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떴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콩닥거리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조금 더 뻔뻔하게 살아도 된다고 말해준 사람은.
“정말… 괘씸한 분이네요, 오진 씨는.”
“아니 대체 뭐가.”
“너무 괘씸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꽁꽁 묶어놓고 벌을 주고 싶을 정도예요.”
“뻔뻔하게 살라는 말은 취소할게.”
역시 사람이 지은 죄가 있으면 벌을 받아가며 살아야지.
“후훗. 농담이에요.”
카시아는 짓궂게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진짜 이사벨라의 언니긴 언닌가 보네.’
웃는 모습이나 짓궂은 말투가 이사벨라와 판박이였다.
“그래서, 이젠 어쩔 거야? 계속 천마의 의체를 쫓으려고?”
“아뇨, 아무리 의체를 죽인다고 해도 결국 천마님의 봉인은 풀릴 거예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한 달 후에 니플헤임에서 큰 의식이 치러진다고 해요.”
“의식?”
“예. 아마 천마님의 봉인을 푸는 것과 관련된 의식이겠죠.”
한 달이라.
오진은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
전력을 완전히 가다듬기까지 못해도 몇 개월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은 시간이 고작 한 달뿐이라니.
“전 니플헤임으로 가서 그 의식을 막을 생각이에요.”
“혼자서?”
“어머, 오진 씨도 같이 가주실 건가요?”
장난스럽게 물어보는 카시아에게 오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같이 가야지.”
“…예?”
망설임 없는 대답에 오히려 당황한 건 카시아.
“니플헤임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계시죠?”
“뭐,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어떤 곳인지는 대충 들었어.”
마인족의 왕국.
마경 내에서 3대 금지라 꼽히는 장소를 합친 것보다도 몇 배는 더 위험한, 천마를 추종하는 자들이 모인 장소.
“아뇨, 오진 씨는 몰라요. 그곳이 얼마나 위험….”
“그래서, 위험하니까 천마의 봉인이 풀리는 걸 손 빨고 구경하고 있으라고?”
“…….”
카시아는 초조한 표정으로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무턱대고 혼자 갈 생각은 없어.”
이때를 위해서 계속 준비해 왔던 것 아닌가.
물론 아직 전력이 모두 갖춰진 건 아니었지만.
수인족과 용인족, 그리고 백무강이라는 강력한 전력까지 손에 넣었다.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할 정도는 아니다.
“하아, 정말 고집스러운 분이시네요. 새로운 천마님은.”
카시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래도 같이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왜?”
“오진 씨라면 몰라도 다른 분들은 ‘뱀’과 함께하길 꺼릴 테니까요.”
씁쓸한 목소리로 말하는 카시아.
“…….”
오진은 아무런 반론도 하지 못한 채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카시아와 니플헤임에 동행한다고 하면 불편함을 드러낼 사람은 많았다.
‘당장 누나만 해도 그렇고.’
당시 카시아는 천마에게 지배당한 상태였다고는 해도, 그녀의 손으로 직접 탐랑성을 죽인 전적이 있었다.
탐랑성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잠시나마 함께 살았던 하은의 입장에서 카시아를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전 제 나름대로 의식을 막기 위해 움직일게요.”
카시아는 방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참,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말해봐.”
“이번에 벨라는 빼고 가주실 수 없을까요?”
이사벨라를 빼고 가라니?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이사벨라는 일행 안에서도 개천을 사용한 오진을 제외하면 최고라 부를 수 있는 전력이었다.
애초에 그녀를 빼고는 니플헤임 왕국을 습격해서 봉인 의식을 저지한다는 계획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근데 왜 빼고 가라는 거야?”
“…….”
카시아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며 오진의 시선을 슬며시 피했다.
“만약 의식을 막는 데 실패해서 봉인이 풀리게 되면 그 일대 주변이 흑천의 기운으로 가득 찰 테니까요.”
“그게 무슨 문제… 아.”
오진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사벨라는 ‘검은 별’ 중 하나인 거머리자리 성좌에게 힘을 받은 각성자였다.
‘그리고 원래 위성이라고 불렸던 성좌를 검은 별로 만든 건 천마지.’
가족 계보로 비유하면 흑천이 조부모, 검은 별이 부모 정도 되려나.
즉.
자식과 부모 사이의 유전처럼 그녀의 안에는 이미 어느 정도 천마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 상태에서 천마가 봉인에서 풀려난다면.’
오진은 흑천의 특성 중 하나인 ‘지배’를 떠올렸다.
최악의 경우, 카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이사벨라가 천마의 꼭두각시가 될 위험도 있었다.
“그러면 너도….”
물론, 꼭두각시가 될 위험이 있는 건 같은 검은 별의 각성자인 카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후훗. 전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사는 건 익숙하니까요.”
“…….”
다시 천마에게 의식을 지배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의식을 막으러 가겠다는 건가.
“하아.”
마음 같아서는 이사벨라도, 카시아의 힘도 빌리지 않고 의식을 막고 싶었지만.
‘불가능해.’
포기하기엔 둘 다 너무나 큰 전력이다.
둘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의식을 막는다는 계획 자체를 포기하는 더 나을 정도로.
“일단 어떻게든 의식을 막아보자.”
만약 실패해서 천마의 봉인이 풀린다면.
“그때는 카시아, 네가 직접 이사벨라를 데리고 멀리 도망쳐 줘.”
“…알겠어요.”
카시아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럼 이만 가볼게요. 저랑 같이 있는 모습이 들키면 오진 씨도 곤란해지실 테니까요.”
검은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며 카시아가 몸을 돌렸다.
오진은 몸을 돌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의외네.”
“의외라뇨?”
“벨라랑 사이가 안 좋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걱정해 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
“읏…!”
당황한 표정으로 흠칫 어깨를 떠는 카시아.
“저, 전 그냥 그 아이가 계획을 망칠까 봐 빼고 가라고 한 거예요. 고집만 세고 욕심 많은 애니까 빠져야 할 때도 억지를 부릴 테니까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획 돌리는 카시아.
그런 말을 한 것 치고는 백금발 사이로 살짝 빠져나온 귓불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진은 멀어지는 카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다시 둘 사이가 좋아질 날이 오면 좋겠네.’
카시아와 이사벨라가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며, 오진은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