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38)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38화
검은 하늘 (2)
일행에게 돌아온 오진은 카시아에게 들은 정보를 전했다.
현재 천마가 니플헤임에 봉인되어 있다는 것부터 한 달 후에 봉인을 풀기 위한 의식이 치러진다는 것까지.
“의식… 이라고요?”
“하, 한 달?”
천마의 봉인이 풀리기까지 고작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소식에 하은과 이사벨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리아크가 오진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대체 그런 정보를 어디서 얻은 거냐, 애송이?”
“데이모스의 시체를 뒤져보니 이런 게 있더라고.”
오진은 품속에서 통신용 성유물을 하나 꺼냈다.
성유물에 마력을 흘려 넣자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봉인 의식과 관련된 지령이 흘러나왔다.
데이모스에게 의식에 쓰일 공물이나 성유물의 지원을 명령하는 내용의 지령.
물론 통신용 성유물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사전이 오진이 녹음해둔 가짜 지령이었지만, 여기서 솔직하게 뱀자리 여왕에게 의식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 그럼 큰일 난 거 아냐? 한 달밖에 남은 시간이 없는 거잖아?!”
“의식을 막아야지.”
천마가 봉인을 풀고 기어 나오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 막을 생각이냐?”
“일단 모을 수 있는 만큼 전력을 긁어모을 생각이야.”
수인족과 용인족의 도움이 필요했다.
오진 일행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하나의 ‘왕국’을 습격하기엔 숫자가 너무 부족했으니까.
“나도! 나도 착한 사람 도와줄게!”
백무강이 번쩍 손을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합니다 어르신.”
“응! 나만 믿어!”
가슴을 쿵쿵 치며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데네브의 성검을 빼드는 백무강.
이번 일로 인해 데네브의 성검이라는 강력한 성유물까지 되찾았으니 백무강은 오진이 기대했던 기상의 전력이 되어 주리라.
백무강이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으니 남은 건 용인족과 수인족들에게 이번 계획을 전하고 협력을 구하는 것뿐.
“드래고니안 왕국은 여기서 그나마 가깝다고 쳐도… 문제는 칸 왕국인데.”
한 달이라는 제한된 시간.
그 시간 안에 칸 왕국의 전력까지 긁어모으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하나는 하늘 산맥의 길을 알고, 넘을 수 있을 것.
둘은 칸 왕국까지 일주일 안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른 다리를 지닐 것.
셋은 뜬금없이 나타나서 니플헤임을 쳐들어가야 한다고 해도 수인족들이 흔쾌히 힘을 빌려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지닐 것.
일행 중에서 그런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인재는 딱 한 명뿐이었다.
“리아크 씨밖에… 없네요.”
“끄응.”
리아크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뛰어난 감각으로 한 번 지나가 본 길을 완벽히 기억하며, 빠른 기동력과 동시에 전직 ‘칸’이라는 강력한 영향력까지.
칸 왕국의 수인족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리아크만 한 적격자는 없었다.
“후우, 알겠다. 내가 가도록 하지.”
“혼자 괜찮겠어?”
“흥,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애송이?”
리아크는 콧방귀를 끼며 같잖다는 눈빛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오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일단 성소로 돌아가 있어. 화산 밖으로 빠져나가면 부를 테니까. 아, 베가한테도 이번 일 전해주고.”
“알겠다.”
리아크의 몸에서 은빛 빛무리가 번쩍이더니 이내 허공에 흩어지듯 사라졌다.
“우리도 짐 챙기고 밖으로 나가자.”
“오지니 너 몸은 괜찮아? 후유증이 아직 좀 남아있다며.”
“아직 다 나은 건 아닌데 그래도 움직이는 데는 지장 없어.”
사실 조금만 움직여도 피로가 밀려오는 터라 며칠 더 성안에서 푹 쉬고 싶었지만.
천마의 봉인을 푸는 의식이 치러지기까지 고작 한 달 남짓이 남은 상황에서 태평하게 쉬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누나가 업어줄까?”
“업길 뭘 업어.”
“왜, 이래 봬도 누나 힘세다?”
하은이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각성자라고 해도 고위 각성자인 이상 오진 한 명을 업는 것 정도야 가뿐하겠지만.
“됐네요, 이 아줌마야.”
하은의 등 뒤에 업혀 이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뭔가 말로 형용하기 힘든 자괴감이 차올랐다.
오진의 칼 같은 거절에 하은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쯧, 혀를 찼다.
“가면서 우리 오지니 빵댕이나 좀 주무르려고 했다니.”
뭔 소릴 하는 거야 이 누나는.
“농담이야 짜샤.”
하은은 낄낄 웃으며 오진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될 테니까.”
하은 나름대로 오진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한 건가.
방법이야 어쨌든 효과는 있었다.
오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하은을 바라봤다.
겉으로야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를 가장하며 실없는 농담을 치고 있었지만.
평생을 그녀와 함께 살아온 오진에게는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누나.’
검은 하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그의 삶에 내려온 한 줄기 별빛.
더없이 소중하며, 한없이 사랑스러운 여인.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으리라.
‘너도, 마찬가지겠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청년을 떠올리며 오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뭐, 뭐야? 사람 부담시럽게 왜 그렇게 뚫어져라 봐?”
하은이 움찔 어깨를 떨며 뺨을 붉혔다.
오진의 눈빛에서 뭔갈 느낀 걸까.
기대감에 찬 표정으로 힐끔힐끔 그를 훔쳐봤다.
“아무것도 아냐. 슬슬 짐 챙기러 가자.”
“싱겁기는.”
기대감이 팍 식었는지 삐쭉 입술을 내밀며 방으로 돌아가는 하은.
오진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진 씨.”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찔.
이번엔 오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물론 하은과는 달리, 순수한 공포에 떨고 있는 거였다.
“잠깐 둘이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어, 응? 어어. 가능하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이사벨라의 뒤를 따랐다.
찰칵.
방 안으로 들어온 이사벨라는 문을 걸어 잠갔다.
“저기… 이사벨라 씨?”
혹시 저번처럼 하은에 대한 질투심이라도 폭발했나 싶어 긴장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을 때.
“아까 들으셨다는 정보, 언니한테 들으신 거죠?”
이사벨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오진의 예상과는 다른 말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중요한 지령을 통신용 성유물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사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진에게 성큼 다가온 이사벨라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오진 씨한테서 다른 여자의 냄새가 났어요.”
“…….”
아니 뭐, 개야?
오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이사벨라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전에 카시아도 똑같은 말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왜 이런 부분까지 자매가 비슷한 거야.’
수인족인 리아크조차 맡지 못한 냄새를 어떻게 귀신처럼 맡을 수 있단 말인가.
“언니와 만나신 거죠?”
“……하아. 맞아.”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오진이 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이사벨라가 분하다는 듯 발을 구르며 오진에게 바짝 다가왔다.
“어, 언니가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죠?”
그렇게 말하며 오진의 허벅지를 더듬는 이사벨라.
‘거긴 왜 더듬는 거야.’
오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 없었으니 걱정하지 마. 천마에 대한 정보만 알려주고 갔어.”
“…진짜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오진을 바라보는 이사벨라.
오진은 불에 덴 고양이처럼 긴장하고 있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카시아랑은 사이좋았던 거 아니었어?”
“예전에는 그랬지만….”
이사벨라는 말끝을 흐리며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마경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카시아와 마주쳤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면… 내가 가질까?
음흉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서 당당하게 오진을 빼앗겠다고 선언하던 카시아의 눈빛.
그녀의 모습에선 더 이상 과거의 상냥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카시아가 어렸을 때처럼 살갑게 다가왔다고 해도, 이사벨라의 입장에선 순순히 그녀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언니는… 오진 씨를 죽이려 했잖아요.”
“그건 천마한테 정신을….”
“알고 있어요.”
그때 카시아가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다고 해도, 그때 오진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진득한 살기가 치밀어올랐다.
오진은 복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는 이사벨라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쨌든 아무 일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예.”
뺨을 쓰다듬어 주자 살벌했던 이사벨라의 표정이 한껏 풀어졌다.
카시아가 이사벨라를 걱정해 줬다는 얘기를 전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이건 두 사람이 풀 일이지.’
이래저래 뒤엉켜버린 자매 사이였지만.
적절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다시 원래의 관계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가슴도 쬐깐한게… 가지기는 뭘 가져?”
돌아올 수… 있겠지?
“크흠. 슬슬 우리도 짐 챙기자.”
드래고니안 왕국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유를 부릴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식이 치러지기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
그동안 해야 할 준비는 산더미처럼 많았다.
* * *
검은 먹구름으로 가득 찬 공간.
“하아.”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아득한 어둠 속에서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짙은 피로에 가득 찬 눈빛.
메마른 미소가 사내의 입가에 지어졌다.
“그래도… 얘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
사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검은 먹구름 위에 몸을 뉘었다.
쿠르르르륵.
검은 먹구름이 다가와 그의 몸을 휘감았다.
“크윽…!”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리는 사내.
검은 먹구름에 휘감긴 그의 몸이 점차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물속에 잉크를 풀어 놓은 듯.
사내의 몸은 검은 먹구름에 점차 잠식되기 시작했다.
검은 먹구름에 잠식돼가며 방금 전에 만난 또 한 명의 ‘오진’을 떠올렸다.
‘만약 너처럼… 내게도 거문고자리 성흔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랐을까.’
사내의 입에서 나지막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인제 와서는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건물에 아무리 단단한 철근을 덧대본들 붕괴를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더.”
이제 봉인이 풀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사내의 입가에 마른 미소가 지어졌다.
“자… 이제 준비는 다 끝났어.”
쿠르르르륵.
검은 먹구름에 잠식되면서도, 사내의 눈빛에 맺힌 푸른 귀화는 사납게 타오르고 있었다.
“약속을 지킬 시간이다, 베가.”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