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3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39화
검은 하늘 (3)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리아크를 칸 왕국으로 보내고, 드래고니안 왕국으로 돌아온 오진 일행은 빠르게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니플헤임 왕국.
마인족의 본진으로 쳐들어가겠다는 오진의 말에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반대 의사를 밝힌 용인족도 있었지만, 하은이 나서자 언제 반대를 했냐는 듯 무기를 쥐어 들었다.
리아크 쪽과는 따로 연락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전쟁을 준비하면서도 제시간이 올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수인족 전사들까지 본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러, 니플헤임에서 천마의 봉인을 푸는 의식이 치러지기 하루 전.
오진은 결전을 앞두고 마지막 정비를 하고 있었다.
“쓰읍. 후우.”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한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성흔의 마력이 전신에 퍼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과연 끝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득한 마력의 해일.
흑천을 통해 흡수한 마력은 이제 성소에서 봤던 ‘은하수의 샘’과 비견될 정도로 막대한 양이 되어 있었다.
‘물론 양만 많을 뿐 다룰 수 있는 마력은 한정적이긴 하지만.’
거문고자리의 성흔이 9성이 되면서 마력 회로의 넓이가 크게 확장되긴 했지만.
오진의 안에 잠들어 있는 끝 모를 마력을 모두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굵은 호스를 가져온들 바닷물을 비울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
‘그래도 흑천이 열 번째 개화를 하면서 마력의 질 자체가 많이 올라갔어.’
전에는 무식하게 양만 많았다면, 흑천이 열 번째 개화를 하면서 마력의 질이 많이 상승했다.
같은 양의 마력으로도 더 큰 위력을 낼 수 있게 됐으니, 중요한 결전을 앞둔 상황에서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지만.
“…하아.”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내일 있을 결전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 속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듯 답답함을 느꼈다.
‘이번에 실패하면, 천마의 봉인이 풀린다.’
천마의 목적이 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의 봉인이 풀린다면 지금 오진으로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막아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진은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여기 있었느냐?]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베가가 뽀르르 허공을 날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응. 몸은 좀 어때 베가?”
[으음. 아직 제약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의체로 현신하는 것 정도는 괜찮은 것 같구나.]베가는 지난번 데이모스와의 전투에서 오진에게 축복을 내려준 대가로 한동안 현신하지 못한 채 성소에 갇혀 있었다.
의체 상태로나마 다시 현신할 수 있게 된 건 불과 일주일 전.
그것도 아직 제약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현신한 거였다.
“정 힘들면 이번에 빠져도….”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베가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율법의 제약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천마의 봉인이 풀려날 수도 있는 이런 중대한 상황에서 제약을 핑계로 몸을 사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마워.”
오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는 빠져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베가가 빠지면 곤란한 건 오진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축복이 아니라 해도 베가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됐으니까.
“누나랑 벨라는?”
[둘 다 일찍 잠들었느니라.]“그래?”
각성자도 본질은 인간인 이상 수면은 중요했다.
충분한 수면은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주니까.
[그나저나 벨라에게 이번 계획을 들었는데… 그대에게 너무 위험한 역할을 떠넘긴 것 아니냐?]베가가 걱정스럽다는 듯 오진을 바라봤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인족에 비해 압도적으로 전력이 부족한 오진 일행이 전면전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전술적으로 복잡한 전략을 짜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전쟁을 대비한 합동 훈련조차 꼴랑 한 번밖에 해볼 시간이 없었으니까.
‘종족이 다른 것도 큰 문제지.’
그동안 용인족과 수인족 사이에 교류가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두 종족의 관계는 옆에서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하지만.
막말로 말해 서로 만난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생판 남에게 등을 맡기고 편히 싸울 수 있겠는가?
최소한의 피해로 니플헤임 왕국 내부에 진입할 수 있으면서도, 지극히 단순한 전술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계획은.
[어찌 그대 혼자 왕국 내부로 잠입하겠단 말이냐!]베가가 답답하다는 듯 오진의 머리 위에 올라타 머리칼을 쭈욱쭈욱 잡아당겼다.
“아, 아아. 아파, 아파.”
[그대는 더 혼나야 하느니라!]철없는 아이를 훈계하는 어머니처럼 엄한 표정으로 오진을 꾸짖는 베가.
말로는 더 혼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힘은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하아. 정말 왜 매번 이리도 본녀의 속을 썩이는 게냐?]“미안.”
오진은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베가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부루퉁한 표정의 베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이 방법밖에 없었어.”
[그런데 그대 혼자 왕국 내부로 잠입한 다음은 어찌할 것이냐? 운이 좋아 걸리지 않았다 치더라도 다른 이들은….]“그건 생각해 둔 방법이 있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후우. 그대를 믿겠느니라.]베가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대도 오늘은 일찍 자거라. 내일 할 일이 많지 않으냐?]“조금만 더하고.”
오늘은 수련을 쉬고 푹 쉴 생각이었지만.
내일 있을 일을 생각하니 영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이라도 좀 움직이면 잠이 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수련을 이어나가려고 했을 때.
[…나의 아이야.]베가가 조심스럽게 날아올라 오진의 뺨에 손을 댔다.
손끝에 닿는 푸석푸석한 피부의 감촉.
한 달 사이, 마치 메마른 사막처럼 거칠어진 뺨을 매만지며 베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고위 각성자의 초인적인 육체를 지녔음에도 이렇게 피부가 거칠어질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가혹한 수련을 반복하고 있단 말인가.
그가 무엇을 위해 이리도 가혹한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꾸짖을 수조차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상냥하게 뺨을 쓰다듬으며 오진의 콧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대는 역천의 별이 아니더냐.]“…베가.”
오진은 시선이 흔들렸다.
베가 입장에서야 자신을 격려해주기 위해 해준 말일 테지만.
‘문제는 내가 역천의 별이 아니라는 거지.’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아직도 자신을 ‘회귀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여신을 바라봤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그녀를 속일 수 있을까.
아니, 언제까지 그녀를 속인 채 살아야만 할까.
“베가… 만약, 만약에 말이야.”
갑작스러운 충동이 끓어올랐다.
“만약에 내가….”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간다.
심장이 터질 듯 뛰며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만약 여기서 진실을 알려주면 베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그를 상상하자 아찔한 공포가 등골을 타고 퍼졌다.
“아냐, 아무것도.”
[으음? 갑자기 왜 그러느냐?]베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진의 콧등을 찰싹 때렸다.
[말하다 말면 본녀가 궁금하지 않으냐. 어서 말해보거라.]“아무것도 아니래도.”
[어허. 그대의 표정이 이리 어두운데 어찌 아무 일도 아니라 할 수 있느냐?]베가가 엄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대와 본녀 사이에 말 못 할 비밀이 뭐가 있다는 게냐? 괘념치 말고 편히 말하거라.]“…….”
둘 사이에 말 못 할 비밀이 없다는 말에 날카로운 칼날로 도려낸 듯 가슴이 욱신거렸다.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인제 와서 진실을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거짓말을 반복해버렸으니까.
거짓말이라는 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트럭과 같다.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도, 속도를 줄일 수도 없었다.
‘바닥에 충돌해 산산이 부서질 때까지.’
계속 거짓말을 더 해가는 방법뿐이다.
‘…괜찮아.’
평생을 거짓말을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다.
상관없을 것이다.
수북하게 쌓인 거짓말의 산 위에, 한 줌의 거짓말을 더 하는 것 정도는.
“만약에 내가, 베가의 엉덩이를 때리고 싶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덮으며 물었다.
[뭐, 뭐라?!]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 퍼뜩 베가가 날아올랐다.
[지, 지금 여기에서 말이냐? 아, 아니 그보다 왜 갑자기 보, 본녀의 엉덩이를….]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이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베가.
고민을 이어가던 베가는 질끈 눈을 감으며 굳은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알겠느니라. 그, 그대가 바란다면….]“농담이야.” [노, 농담?]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서 분위기 좀 풀어보려고 장난친 거야.”
[으읏!]베가가 파닥파닥 손발을 휘저으며 오진의 콧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이, 이 무엄한 것! 감히 성좌의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하하하. 미안.”
지은 죄가 있는 오진은 그녀의 분이 풀릴 때까지 얌전히 얻어맞았다.
[하아, 하아.]신나게 오진의 콧등을 때리고 머리칼을 잡아당긴 베가가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획 돌렸다.
[본녀는 성소로 돌아가겠느니라.]“삐진 거야?”
[읏…! 그, 그대가 이상한 농담을 해서 그런 게 아니느냐!]“미안하다니까.”
오진은 베가를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에 얹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베가.”
그래.
이제까지 그래왔듯.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다치지 말거라, 나의 아이야.]베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방금까지 찰싹찰싹 때렸던 콧등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그럼 본녀는 성소로 돌아가 보겠느니라. 그대도 일찍 자거라.]은빛 빛무리와 함께 베가의 몸이 허공에 흩어졌다.
“…….”
오진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뾰족하게 솟은 암석 위로 올라가 저 멀리 보이는 니플헤임 왕국을 바라봤다.
왕국이라고는 해도 그 형체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니플헤임 왕국은 마치 하늘 산맥을 뒤덮은 희뿌연 안개처럼 검은 먹구름에 휩싸여 있었으니까.
“조만간 다시 보자고 했던가.”
미안하지만.
“너랑 내가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야.”
오진은 왕국에 내리깔린 검은 먹구름을 노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