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4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44화
검은 하늘 (8)
“자자, 표정 풀라고. 이렇게 서로 얘기할 기회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천마는 굳어 있는 오진의 옆에 다가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의자가 만들어졌다.
오진은 무(無)에서 만들어진 의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무의식의 공간.”
“맞아. 이번에는 네 무의식이 아닌, 내 무의식에 널 초대한 거지만 말이야.”
천마는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다리를 꽜다.
오진은 의자에 앉은 천마를 날카롭게 쏘아봤다.
“얘기할 기회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건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의 의미야.”
천마는 손가락을 튕겨 커피를 만들어내더니 여유롭게 한 모금 마셨다.
“이제, 다 끝났어.”
어딘가 후련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천마.
피로에 가득 찬 눈이 오진을 향했다.
“길었지… 너무 길었어.”
과거를 회상한다.
오진은 기억하지 못하는, 이미 멸망해 버린 세계의 기억을.
천마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은 채 나지막이 웃었다.
어딘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웃음소리였다.
“너….”
오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베가를 소멸시키는 게 네 목적이었냐?”
이제 다 끝났다는 건, 목적을 달성했다는 뜻이리라.
지금 상황에서 그의 목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건 베가의 소멸 외에는 없었다.
“정확히는 여기 이 자리에 베가를 부르는 게 목적이었지.”
“그걸 위해서 수십 년을 봉인된 척 연기하면서 지냈다고?”
“기다림만큼 남을 속이기 쉬운 방법은 없거든.”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사기꾼이라도 막 쥐어짜 낸 거짓말은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거짓말이란, 필연적으로 오랜 기다림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 미친놈이!”
그 기나긴 시간을, 지금 이 한순간만을 위해 버티는 건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오진은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있는 천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베가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이러는 거야!”
“약속을 했지.”
약속?
“나를 과거로 돌려보내 주면, 그 대가로 직녀성의 별을 먹어 치워달라고.”
“…뭔 개소리야 그게.”
천마를 과거로 돌려보내는 대신 직녀성의 별을 먹어 치워달라고 했다고?
말이 먹어 치워달라는 거지 사실상 죽여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헛소리에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널 돌려보내는 주는 대신 자신을 죽여달라는 게 약속이라고?”
“그래.”
“지랄하지 마, 새끼야!”
멱살을 틀어쥔 손을 들어 올렸다.
너무나 가볍게.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천마가 끌려 올라왔다.
천마는 멱살을 잡힌 채 피로에 가득 찬 눈으로 오진을 내려다봤다.
“내 흑천에 닿았을 때 네가 가진 흑천이랑은 뭔가 다르다는 걸 느꼈지?”
“…그건.”
느꼈다.
어딘가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기운이라고.
“그랬을 거야. 내가 지닌 흑천은 지금 ‘넘쳐흐르는’ 중이거든.”
“…넘쳐흐른다는 게 무슨 말이야.”
“으음. 간단하게 말해서 폭주하기 직전이라고 하면 알기 쉬우려나?”
천마는 씁쓸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작은 물컵과 물병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는 물병을 집어 물컵에 콸콸 들이부었다.
작은 물컵 안에 물이 넘쳐흘러 바닥을 적셨다.
“이런 상태라는 거지.”
“…흑천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는 거냐?”
“애초에 너랑은 달리 ‘그릇’ 자체가 작았으니까.”
자조 섞인 미소를 짓는 천마.
오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자신이 지닌 흑천과 천마가 지닌 흑천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나 자신이나 똑같은 ‘오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둘 사이에 차이가 만들어졌다는 건.
“…역천의 별?”
“알고 있었네.”
카시아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흑천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역천의 별이 필요하다고.
“참 신기하지 않아? 그 머저리 같은 놈한테 운명을 뒤바꿀 힘이 깃들었다는 게.”
천마는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왜.”
오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천마를 바라봤다.
“왜 네가 역천의 별을 흡수하지 않은 거지? 이신혁보다도 과거로 돌아갔잖아?”
“난 이미 그릇이 완성된 상태라 역천의 별을 흡수해도 소용없어.”
아아.
그래서.
“나한테… 역천의 별을 흡수하도록 만든 거냐.”
이미 늦은 자신을 대신해서.
흑천을 완성하기 위해.
“덕분에 네 흑천은 내가 지닌 흑천과 달리 넘쳐흐르지 않고 안정된 상태로 있을 수 있었지.”
“…흑천이 폭주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별을 집어삼킨다는 욕망만 남은 채, 세계를 멸망시키겠지. 예전처럼.”
…예전?
“베가에게 들은 적 없어? 이미 성좌들은 한 번 흑천에 의해서 멸망한 적 있다고.”
“아.”
분명 들은 적 있었다.
과거 흑천에 의해 성좌들은 한 번 멸망한 적이 있다고.
그리고 지금 베가를 비롯한 성좌들은 그 이후에 탄생한 존재라고.
“…….”
오진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천마를 노려봤다.
그래.
이대로 천마의 흑천이 폭주하게 되면 다 같이 멸망한다는 건 알겠다.
“그래서, 그거랑 베가를 죽이는 게 무슨 연관… 아.”
순간.
벼락같은 전율이 오진의 등골을 타고 쫘악 퍼졌다.
천마의 흑천은 그릇 밖으로 넘쳐흐르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직녀성’이라는 폭포수를 들이붓게 되면 어떻게 될까?
혹시.
‘그릇’째로 부서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왜 이 쉬운 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왜 이 간단한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오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손으로 낯가죽을 쓸었다.
흑천이 폭주하면 세계는 멸망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지 않은가.
“뒤지려고…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이냐?”
천마는 방긋 미소 지었다.
사막처럼 메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만 죽으면, 누나는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입가에 후련하다는 미소를 띤 채.
자신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
숨이 턱 막히는 감각.
아득한 감정의 격류에 순간 다리가 휘청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며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분명 겉으로 보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텐데도, 어째서인지 천마의 얼굴이 지독히도 낯설게 느껴졌다.
“대체, 넌….”
인간이라는 조각이 얼마나 부서지고, 마모되어야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반대 상황이면 너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천마는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굳어 있는 오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너는, 나니까.”
살아온 삶은 다르지만.
결국.
둘 다 권오진이라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나보고 베가가 죽도록 내버려 두라는 말이냐?”
오진은 어깨 위에 올려진 손을 거칠게 쳐내며 천마를 노려봤다.
거칠게 주먹을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뒤지려면 내가 죽여줄 테니까 베가는 내버려 둬.”
“그건 안 돼.”
천마는 나지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날 죽여도 흑천은 그대로 폭주할 거야.”
“…그러면.”
“흑천을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선 직녀성을 흡수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
“왜… 왜 굳이 베가여야 하는 거냐.”
흑천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라면 다른 북극성도 있지 않은가.
“직녀성에는 흑천의 힘을 제어하는 능력이 있거든. 너도 경험한 적 있지 않아? 개천을 사용했을 때 직녀성을 본 적 있을 텐데.”
“…….”
분명 본 기억이 있었다.
검은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오롯이 반짝이는 직녀성의 모습을.
개천을 사용해서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 그 별빛을 따라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
‘그럼 내가 개천을 사용하고 멀쩡할 수 있던 것도 베가 덕분이었던 건가.’
후유증이 없지는 않았지만.
천마처럼 흑천이 폭주하는 경우는 없었다.
“직녀성이 있어야지만 흑천은 폭주를 피해서 소멸시킬 수 있어.”
그렇다면.
베가가 희생해야만 세계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괜찮아.”
“…뭐가.”
뭐가 괜찮다는 거냐.
“나만 죽으면 검은 별의 성좌니 마인들이니 다 걱정할 필요 없어.”
“그게 무슨….”
“내 흑천이 소멸하면 다 같이 죽도록 준비해 뒀거든.”
다 같이 죽도록 준비해 뒀다고?
“너는 기억 못 하겠지만 전생에 ‘위성’ 자식들도 누나를 많이 괴롭혔거든. 아, 이신혁의 기억을 전승받았으니 알고 있으려나?”
“잠깐만. 그럼 네가 위성을 검은 별로 만들었던 이유가….”
천마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죽을 때 같이 놈들까지 죽을 수 있도록 미리미리 손을 써둔 거지.”
“…….”
오진은 그제야 처음 천마가 말했던 ‘이제 다 끝났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천마가 죽으면 그의 힘을 물려받은 모든 존재가 같이 죽어버린다.
더 이상의 위협도, 더 이상의 고난도 없다.
말 그대로 끝.
이야기의 엔딩이다.
그렇게 하은과 오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짝짝짝.
“지랄… 하지, 마.”
오진의 눈동자가 떨렸다.
으득.
입술을 짓씹으며 천마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빠악!
뒤로 튕겨 나간 천마가 바닥에 쓰러졌다.
오진은 천마 위에 올라타 망치를 내려찍듯 주먹을 휘둘렀다.
“지랄하지 말라고 이 새끼야!”
베가가 흑천에 잡아먹히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라고?
베가의 희생 하나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하은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베가가 죽으면! 리아크도 같이 죽는 거야! 알아?!”
성좌의 영혼 일부를 이어받은 게 성령이니, 성좌가 죽는 순간 리아크도 같이 죽게 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뭐? 흑천의 힘을 받은 존재가 다 같이 죽을 거라고?”
귀를 틀어막은 채 고통을 호소하던 이사벨라와 카시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면 이사벨라는! 카시아는?! 네놈이 뒤지면 같이 죽는다는 말이잖아, 이 미친 새끼야!”
흑천의 영향을 받는 모든 존재가 죽게 된다면.
검은 별의 성좌에게 성흔을 받은 이사벨라와 카시아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
가만히 누워서 뺨을 얻어맞고 있던 천마가 눈을 찌푸렸다.
메마른 시선이 오진을 향했다.
“카시아는 알겠는데… 리아크? 이사벨라?”
그는 방금 오진이 외쳤던 이름을 하나씩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들이 누군데?”
“…….”
오진의 주먹이 우뚝 멈췄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오싹한 전율.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구… 냐고?”
“리아크는 들어본 적 있는데 이사벨라는 아예 모르겠네.”
모를 수밖에.
전생의 그녀는 이사벨라라는 이름보다는 ‘피의 마녀’라는 칭호로 더 유명했을 테니까.
“뭐, 어쨌든.”
천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냐니….”
“걔들이 죽든 말든 너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잖아.”
“그게, 무슨 개소리야.”
몸을 일으킨 천마가 환히 미소 지으며 오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누나 말고는, 다 죽어도 상관없잖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자신의 죽음을 말했을 때처럼.
그는 너무나 태연하게 죽음을 입에 담았다.